1. 서울의 명칭
2. 서울의 연혁
3. 서울 지명의 변천
4. 행정구역의 변천
서울의 역사 비교연대표(별표)


1. 서울의 명칭

1) 언어학적 고찰
   서울이란 명칭은 그 유래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이며 그 발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연원을 연구자들은 대부분 삼국시대 신라 초기로 결론을 내리고, 그 근거로서《삼국사기》권 1 신라본기 혁거세조(赫居世條)와 《삼국유사》기이(紀異) 제 2권 신라시조 혁거세왕조를 들고 있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6부 백성들의 추대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또는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는데 이런 이름들이 국호이자 도읍지의 명칭으로 변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徐伐)'또는 '서라벌(徐羅伐, 徐那伐)'이란 명칭에서 오늘날 서울로 변천된 과정을 국어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문헌에서 경주는 서라벌(徐羅伐),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사로(斯盧), 서야벌(徐耶伐), 소벌(蘇伐) 등으로 음차되어 나타나고 그것이 지증왕(智證王)때 정식 국호인 신라(新羅)로 정해졌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렇듯 서울의 연원은 서라벌, 사로, 신라 등이라 할 수 있는 바, 결국 서라벌(또는 사로, 신라)은 경주만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고, 국가의 수도이면 모두 그 명칭을 쓸 수 있다는 조건이 부여되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라벌, '을 서울의 어원으로 보고 ''의 의미는 沙, 所, 東, 徐, 쇠(鐵), 斯, 新, 소(牛), 首 등이고, ''은 , 곧 頭, 明, 白, 太陽에 연원을 둔 말로서 그 의미는 野,平을 뜻하며, 다른 한자표기로선 伐, 火, 發, 弗, 夫里, 夫餘(부여), 沸流(비류) 등으로 나타난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이다.

  출처 : 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 1987, 596쪽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1988, 163~166쪽

2) 문헌상에 나타난 서울

   ※다음글은 주간조선(1648호)기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서지학자 김시한씨, 2년여 노력 끝 '증보문헌비고' 기록 발견

  우리나라의 모든 행정구역은 한자 표기가 가능하지만 오직 한 곳, 한글전용으로만 통용되던 수도 서울의 한자 표기가 '(서울)'이라는 결정적 문헌이 한국고서연구회 이사이자 서지연구가인 김시한(70ㆍ경안서점 대표)씨에 의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제의 문헌은 조선조 영조 때 어명에 의해 정부가 편찬한 전통문화 대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 책의 14편 여지고 2항 신라편에 ‘여지승람에 후인들이 모든 서울을 일컬어 서벌이라고 했다가 후에 변하여 서울로 했다’는 대목이 수록돼 있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10년 전부터 서울의 한자 표기법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서지학자 김시한씨는 그 동안 서울의 한자 지명이 ‘’이라는 10여종 이상의 자료와 사료를 발굴하여 학계와 언론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 사료들은 정통성이나 권위를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어 학계에서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공인하지 못해 왔던 것이 현실이다. 이 와중에 조선 정부가 공식으로 간행한 권위있는 문헌에서 서울의 한자가 ‘’ 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발견됨으로써 서울의 한자 지명 선정 작업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시한씨가 ‘증보문헌비고’에 서울의 한자 표기가 이렇게 수록돼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것은 조선 영조시대에 편찬된 유득공의 ‘21도 회고시’에 수록된 시를 통해서였다. 단군조선부터 고려 때까지의 고도(古都) 21곳을 시로 회고한 이 시집의 신라편에 수록된 작품 중 ‘진한(辰韓) 육부(六部)에 가을 연기 맑았으니/서울의 번화한 것 상상할 수 있다/만만파파(萬萬波波) 호(號)를 가한 피리/ 가로 불어 세 성이 일천년을 누렸다’란 대목을 발견한 것. 저자 유득공은 이 시를 노래한 후 ‘서울은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는 서야벌(徐倻伐)인데 후대 사람들이 경도를 말하려면 서벌(徐伐)이라 하여 차츰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라는 해제를 달아 놓았다.

  이 시를 근거로 김씨는 구한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전집을 샅샅이 뒤져가며 서울의 한자 표기 사례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250권 50책에 이르는 방대한 백과사전의 한 구석에서 서울의 한자표기를 찾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책과 씨름한 지 2년여만에 마침내 문제의 대목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밖에도 김씨는 1930년에 출간된 서울의 대표적인 지지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서울 연혁 부분에서 ‘서울은 수도라는 뜻이고 신라 때의 서야벌, 서벌이 후에 차츰 변하여 서울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을 발견, 학계에 보고했다. 또 한글학자이자 한글사전 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이중화가 1918년 발간한 ‘경성기략(京城記略)’이란 저서의 1권에 ‘경성은 조선어에 서울이라 하니 경도, 즉 수도의 뜻이다. 서울은 신라의 방언으로 신라 시조 혁거세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더니 판도가 확장하여 국호를 개칭한 후 왕도의 명이 되어 서라벌 혹은 서야벌이라 하며, 서울이라 하니라’라는 기록도 발굴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 교과서로 사용하던 ‘배달족 역사’란 책 제4과의 서울 표기 사례, 1928년 발간된 백남신의 저서 ‘서울대관’의 서울 표기 사례, 지방 군지인 ‘옥천지(沃川誌)’의 서울 표기 사례, 이병기ㆍ백철공저인 ‘국문학전사’에도 ‘서울 ’을 이두로 썼다는 기록 등 수많은 증거를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한자 표기가 ' '로 공인받지 못한 이유는 이것이 ‘서완’(자완 완) 혹은 ‘서원’(쌓을 원)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 옥편이나 한자사전에는 ‘초두밑에 宛 ’이 ‘완’과 ‘원’과 함께 우거질 ‘울’로 읽힌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그간 ‘서울’이란 한자 표기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한강변에 도읍을 정한 후부터 500여년간 서울은 ‘한강의 북쪽’이란 뜻에서 ‘한양(漢陽)’이라 불러 왔고 구한말에는 청나라가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京城)’으로 바뀌었다가 1945년 광복 후부터 ‘서울’이란 지명을 되찾았지만 한자는 실종되고 말았다. 덕분에 한ㆍ중 수교 후에도 중국은 ‘한성’(현지 발음은 한청)으로, 일본은 ‘ソウル(소우루)’로 표기하는 등 혼란을 겪어 왔다. 한성이란 도시는 없지만 우리가 마땅한 표기법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은 ‘한성’으로 쓰고 있다. 덕분에 중국에서 보내는 우편물 중 서울대가 ‘한성대’로 둔갑, 서울대로 가야 할 것이 심심치 않게 한성대로 배달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노재원 전 주중(駐中)대사는 “청나라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취급, 서울을 중국의 지방도시로 격을 낮추기 위해 한성이라 불렀다”고 말했다. 중국의 도시명 중 ‘성(城)’은 지방 도시를 의미하며 역사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는 북경, 남경 개경처럼 ‘경(京)’을 붙이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청나라의 지명 강등(降等)에 우리 국가 지도부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아 중국은 오늘까지 ‘관습에 따라’ 서울을 ‘한성’으로 낮춰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 속에는 ‘한국은 중국의 속방국가’란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노 전 대사는 1992년 8월 한ㆍ중 수교 직전 외교팀이 중국과 맺을 각종 협정과 조약 등 공식 문서에 ‘한성’이란 치욕적인 지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 관계부처에 서울의 한자 표기를 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외무부는 ‘한국의 수도’라는 뜻에서 잠정적으로 ‘한경(韓京)’이라는 표기를 검토했다고 한다. 이 요청에 따라 관계부처는 한학자와 역사학자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회의를 열었으나 갑론을박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해 결국 수교 문서에 서울이 ‘한성(漢城)’으로 표기되고 말았다. 노 전 대사는 “서울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정부의 의지 문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서울의 한자 표기를 정해 중국 정부에 통고하면 중국은 우리가 결정한 이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여년의 추적 끝에 서울 한자표기의 결정적 문헌을 발굴한 김시한씨는 “서울의 한자가 ‘’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漢城’이란 모욕적인 표기법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은 관련 학자들과 연구가들의 탐구열 부족 탓”이라고 말했다.



2. 서울의 연혁

  서울은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와 통치기관이 소재하여 전국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首都로서,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중심 역할을 하는 지역이다. 예로부터 首都는 정치지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풍부하고 중앙에 위치하며 방어에 유리한 곳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을 둘러싼 산세는 외사산(外四山)과 내사산(內四山)으로 이루어져 이들 산을 이용해 성곽을 쌓을 수 있는 천연적인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밖으로는 북쪽에 북한산(836m), 남쪽에 관악산(632m), 동쪽에 용마산(348m), 서쪽에 덕양산(125m)의 外四山이 둘러 있고, 안으로는 북쪽의 북악산(342m), 남쪽의 목멱산(남산, 262m), 동쪽의 낙산(125m), 서쪽의 인왕산(338m)의 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 산봉(山峰)을 따라 성곽이 연결되어 있다.

구석기 ~ 청동기 시대 ------------------------------------------

  서울의 역사도 구석기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사실을 고고학적 성과로 알 수 있다.서울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면목동, 암사동, 가락동, 역삼동, 응봉동 등 상당수에 이르며 남한강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1967년과 1983년 사이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발굴로 확인된 암사동유적과 1980년에 조사, 발굴된 미사리유적은 대표적인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로서 여기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도끼, 어망추, 긁개등은 강을 낀 先史人들의 어렵과 농경생활의 정착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양재동, 개포동, 원지동, 고척동 등지에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들이 산재하여 있으며신석기시대 이후 계속시되는 역사시대까지 서울은 한민족의 생활터전과 그 중심지로서의 모습을 형성해 온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 ~ 삼국시대 ---------------------------------------------

  기원전 3세기말에서 기원전 2세기초에는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성읍국가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상호간에는 정복전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형성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됨으로써(475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12년(551)에 백제 성왕과 동맹하여 고구려 영토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을 먼저 회복하자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高峴)이남의 10郡을 빼앗았다 진흥왕은 2년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차지하여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백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신라는 진흥왕 16년(555) 10월에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는데, 이는 이 무렵 신라의 세력을 상징한 지리적 경계 표지물이었다. 진흥왕의 순수비는 북한산순수비를 비롯하여 모두 4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비슷하다. 순수의 목적은 첫째 民心을 살펴보는 것이고, 둘째 수병(戍兵)을 위문하며, 셋째 영토를 확인, 획정한 것으로 보인다.삼국시대 한강유역은 군사적인 면에서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다는 점 이외에 삼국간의 군사적 쟁패지 또는 삼국통일 완수를 위한 당군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화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개발의 전초지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고려시대 -----------------------------------------------------

  고려시대 서울지방은 국초에는 양주(楊州)였으며 문종 이후 충렬왕때까지는 남경(南京)이었고, 충렬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漢陽)이라 불리었다.
 문종 21년(1067)  지금의 서울지방은 태조때 고구려 구도(舊都) 평양에 설치한 서경(西京), 성종 6년(987)에 신라 고도(故都) 경주에 설치한 동경(東京)에 이어 세 번째로 지방 경도(京都)로서 남경(南京)이 되었다.
 西京, 東京과 함께 南京을 설치하여 首都 개경(開京) 외에 별경(別京)으로 한다는 것은 고려가 삼국의 전통을 함께 계승하고 또 민심과 국력의 단합 그리고 강화를 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렬왕은 즉위 원년(1308) 중앙과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침으로써 삼경제(三京制)는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일찍부터 首都를 한양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 이유는 개성의 지기(地氣)가 쇠하였고 더구나 송도(松都)는 '廢君臣之地(폐군신지지)'라는 음양설(陰陽說)이 있었으며, 고려왕조의 구세력이 많아 심리적으로 불안하였을 뿐 아니라 신왕조(新王朝)의 개창과 함께 도읍지를 옮겨 君臣上下의 심기일전(心機一轉)을 꾀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태조는 즉위 3년 10월(1394) 한양으로 천도한 후 종모, 궁궐, 관아, 성곽 등 도성(都城)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면서 그 이듬해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쳐 불렀다.

일제시대 -----------------------------------------------------

  일제는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1개월이 지난 10월부터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치고 수도로서의 행정조직이 아닌 지방 행정조직을 준용한 체제로 개편하였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洞名과 地名의 우리말 명칭을 일본식으로 漢字化하였다. 또 총독부와 경성부청을 새로 지어 식민통치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도시계획을 핑계삼아 성벽과 성문을 헐어 내었다.

광복이후 -----------------------------------------------------

  1946년 9월 18일 미군정청은 <서울특별시 설치>를 발표(1946년 9월28일 시행)하였으며,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이 시행됨에 따라 서울특별시가 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이다.



3. 서울 地名의 변천

1

위례성(慰禮城)

삼 국 시 대

 백제 온조왕 1년 (B.C.18년)

2

북한산(北漢山)

 백제때 정한 이름  <지금의 북한산을 이 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산이 아니고 땅 이름>

3

북한성(北漢城)

4

북한산군(北漢山郡)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시대 이후

5

남평양(南平壤)

           장수왕(長壽王) 63년(475년)

6

신  주(新    州)

신 라 시 대

 24代 진흥왕(眞興王) 15년 (554년)

7

북한산주(北漢山州)

         진흥왕(眞興王) 18년(557년)

8

남천주(南 川 州)

         진흥왕(眞興王) 29년(568년)

9

한  주(漢   州)

 35代 경덕왕(景德王) 16년 (757년)

10

양  주(楊   州)

고 려 시 대

  태조(太祖) 23년 (940년) 

11

남  경(南   京)

 11代 문종(文宗) 21년 (1067년)

12

한양부(漢陽府)

 25代 충렬왕(忠烈王) 34년 (1308년)

13

한성부(漢城府)

조 선 시 대

 1代 태조(太祖) 4년(1395년)

14

경성부(京城府)

일본 침략기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조선총독부 칙령357호 1910.10.1.시행)

15

서 울 市

미 군 정

군정법령 106호(1946.9.28 시행)

16

서울特別市

대 한 민 국

지방자치법(1949.8.15.시행)에 의해 특별시 설치



4. 행정구역의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