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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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해설은 『서울의 옛지도』,『한국의 고지도』,『정도600년 서울지도』를 참고했습니다.

漢 城 全 圖《古地圖帖》
한성전도

채색필사본

17세기 말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19세기 초기 (이찬 교수)

34.4×54.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영남대박물관에 소장된 《古地圖帖》가운데 수록된 서울지도.

  《고지도첩(古地圖帖)》은 <천하산천맥락도(天下山川脈絡圖)> <조선전도(朝鮮全圖)> <한성전도(漢城全圖)> <남한산성(南漢山城)> <강도전도(江都全圖)> <탐라전도(耽羅全圖)>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 <일본전도(日本全圖)>등 여덟폭으로 구성된 지도첩이다. 지도첩의 제작시기는 19세기 초로 추정된다.   서울지도의 북한산 일대의 구름 문양, 그득한 민가를 가로줄로 처리한 도성안의 표현, 성곽과 성문의 표시가 독특하며 간결하다. 반면에 西江과 龍山에는 여러척의 선박과 가옥이 그려져 있어 서울로 들어오는 뱃길의 큰 포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自都城至三江圖《朝鮮疆域總圖》

채색필사본

17세기 말기 (이찬 교수)

1750년대 (허영환 교수)

42.0×66.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都城 안과 성저십리 지역을 포함한 광역의 서울지도.
제목에서와 같이 도성에서 三江, 즉 오늘의 한강까지를 그린 지도이다. 도성 내부를 자세히 그린 지도와, 그 주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그린 지도로 서울을 구분하여 그리는 서울지도의 시작으로 보이는 지도이다. 옛 서울지도에는 한 장의 지도 안에 중심부와 외곽부분의 축척을 달리하는 방법을 쓰는 지도가 많은데, 그 점을 시정한 지도이다. 즉 도성 안은 기입할 내용이 많으므로 대축척으로 하여 자세한 도성지도를 만들고, 주변지역을 포함하는 지도에는 도성안은 간략하게 하고 주변지역을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三江은 한강, 용산강, 서강을 뜻한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은 《동여비고(東輿備攷)》영인본 해제에서 <자도성지삼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도(서울대 규장각본 자도성지삼강도)는 영남대 소장의 《고지도첩》중의 <한성전도>나 경남양산 대성암(大聖庵) 소장의 《동여비고》의 <자도성지삼강도>와 지도의 형태, 지도의 내용등이 동일하다. 세지도를 비교하면 영남대 소장의 <한성전도>가 제일 먼저 제작된 듯하며 두번째로 대성암본이 제작되고 그 뒤를 이어 규장각본이 제작된 듯하다. 왜냐하면 영남대본은 경덕궁등의 궁궐명칭이나 살곶이 다리등이 표시되어 있으나 대성암본과 규장각본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특히 규장각본은 서울의 청계산(淸溪山)을 "청청산(淸淸山)"으로 오기하고 있다. 이는 앞의 지도들을 보고 필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강에 떠있는 배의 숫자를 비교하면 영남대본이나 대성암본은 동일한 위치에 동일한 수의 배가 그려져 있지만 규장각본은 두지도에 비하여 배의 숫자도 적고 위치도 조금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삼각산만 적고 있는데 대성암본에는 삼각산이라고 적고 그 옆에 일명화산(華山)이라고 적은 점등이 다르다.



都 城 圖 《朝鮮疆域總圖》

채색필사본

17세기 말기 (이찬 교수)

1750년대 (허영환 교수)

42.2×67.8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서울의 도성과 四山, 三角山, 그리고 도성안의 궁궐, 사대문 등을 선택적으로 나타낸 서울지도.
제작연대는 1760년에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꾼 경덕궁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1760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1711년에 축조된 북한산성이 없고, 1690년에 남별전(南別殿)에서 이름이 바뀐 후 조선후기 지도에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경희궁 다음으로 크게 그려지는 영희전(永禧殿)이 없으므로 17세기 말경의 제작으로도 추정된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北 漢 圖 《北漢誌》
북한도3 북한도2 북한도1

  『북한지(北漢誌)』는 북한산성의 수호를 책임지고 있던 중흥사(重興寺)의 주지 성능(聖能)이 도리(道里), 연혁, 산계(山溪), 성지(城池) 등 14개 항목으로 세분하여 편찬한 북한산성의 지지(地誌)이다. 『북한지』는 30여년 간의 임무를 마친 성능이 승려 서윤(瑞胤)에게 인계하면서 넘겨 준 것이고, 서윤이 영조(英祖) 21년(1745)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북한산성은 숙종(肅宗) 37년(1711) 4월 3일부터 10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에 완성하였다. 이는 숙종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임금과 김우항(金宇杭), 김중기(金重器)와 같은 현신(賢臣)과 성능이라는 걸승(傑僧)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북한지』는 1711년(숙종37년) 산성 축성을 시작한 후 문루(門樓)나 그 외의 부대시설이 거의 완성된 다음해인 1712년경 초고가 완성되었고, 1745년(영조21) 11월 판각이 이루어질 때까지 약 30년 사이에 부대시설의 이름이 바뀌거나 새로 생겼을 때마다 이 사실을 첨가 수정하여 완성한 것이다.

  <북한도>는 『북한지』의 첫머리에 북한도 一, 二, 三 3매로 나뉘어 실린 것으로 지도라고 하기 보다는 그림에 가까우나, 북한산성을 그린 현존 지도로서는 가장 상세한 것으로 추측된다. 10개의 절과 2개의 암자가 표시되어 있고, 행궁(行宮), 어영(御營), 금영(禁營), 훈국(訓局)이 표시되어 있다. 동문, 서문, 대성문(大成門)을 비롯한 여러 성문과 암문(暗門)이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는 자리만 있는 동장대(東將臺), 남장대(南將臺)등도 표시되어 있다.
해설 : 『北漢誌』(영인본)




都 城 大 地 圖
도성대지도

필사본

1747∼1764년

188.0×213.0cm(2曲가리개)

서울市史편찬위원회 소장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서울지도 가운데 제일 큰 이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의 축척은 1:2,900이다. 모두 8장의 장지를 붙여 그렸으며 두폭 가리개로 표구하였다. 물론 내용도 가장 상세하며, 보존상태도 240년쯤 되었지만 양호한 편이다.

이 <都城大地圖>의 제작연대 추정은 1747년부터 1764년 사이, 즉 英祖 23년부터 40년 사이로 가능해진다.

  이 지도는 <한양전도(漢陽全圖)>, <성시전도(城市全圖)>, <도성지도(都城地圖)>등처럼 지도의 좌우에 행정구역 명칭과 창덕궁에서 4대문 사이의 거리를 밝힌 해설문 등을 쓴 묵서(墨書)는 없으나 모든 것이 자세하고 정확하다. 한성부의 오부(五部)는 오방색(五方色)으로 나타냈고, 도성삼군문(都城三軍門)의 분계(分界)는 점선으로 나타냈으므로 행정지도와 군사지도를 겸한 지도라 하겠다. 또 지도의 아래쪽에 남산은 그려져 있으나 한강은 그리지 않았다.

이 지도를 제작연대와 산수화법 등으로 보아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京 都 《海東地圖》
경도

채색필사본

1750년대

47.5×66.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조대(英祖代)에 편찬된 군현지도집(郡縣地圖集)인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들어있는 서울지도. 지도의 부제로 '북한산성부(北漢山城附)'라고 쓴 것처럼 북한산 일대를 자세히 다루었다. 회화지도라 할 만큼 그림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하게 그렸고, 서울의 행정구역, 관청 등의 내용을 지도의 상하좌우에 자세히 밝힌 점은 조선시대의 서울지도 가운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도다.
  지도의 주기(註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의 가장 상위 행정구역인 경도오부(京都五部)를 동서중남북(東西中南北)이라고 제하(題下)에 표기했다.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종묘(宗廟), 사직(社稷)등의 위치도 밝혔다. 도성의 주위는 14,935보(步)이고, 주척(周尺;조선시대사용하던 자의 일종으로 1주척은 20∼21cm)으로는 89,610척(尺)이라 하였다. 경복궁의 성주(城周;성둘레)는 1,813보(步)이고, 높이는 21척(尺)이며, 광화문(光化門 ; 南-정문), 신무문(神武門 ; 北), 건춘문(建春門 ; 東), 영추문(迎秋門 ; 西)이 있다고 하였다. 도성안의 대로(大路) 폭은 56척, 중로(中路)는 16척, 소로(小路)는 11척이라고 밝혔다. 목멱산(木覓山), 무악(毋岳), 개화산(開花山) 등에 있는 봉수(烽燧)가 어느 곳에서 오는 신호를 받는가도 밝혔다. 창의궁(彰義宮), 함춘원(含春苑)등 별궁(別宮)과 원(苑) 등의 이름과 궐내각사(闕內各司)(승정원 등 20곳)와 외각사(外各司)(의정부등 70여곳)도 나열하였다. 이 가운데는 이미 18세기 초에 혁파된 사섬사(司贍寺)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지도는 제목과 해설을 상하좌우로 같이 병렬했으면서도 지도는 지도책의 양면에 걸쳐 눕혀 그렸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都城三軍門分界之圖
도성삼군문분계지도

목판본

1751년

29.2×42.8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751년(영조 27)에 국왕 英祖가 도성의 수비에 관해 내린 윤음(綸音;임금의 말씀)과 절목(節目 ; 법률, 규정등의 조항) 등을 기록한 책인 『御製守城綸音(어제수성윤음)』가운데 수록된 지도.

   이 책의 앞에는 홍계희(洪啓禧)가 교서(敎書)를 받아 쓴 '수성윤음(守城綸音)'이 있으며, 지도에 이어 「都城三軍門分界總錄(도성삼군문분계총록)」「守城節目(수성절목)」이 실려 있다. 도성 안을 경비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등 三軍의 도성 경비 구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서울의 동쪽 대부분은 어영청이 맡은 구역이고, 북서부는 훈련도감, 남서부는 금위영의 구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성의 관할구역은 그 곳을 맡은 군의 이름과 분할을, 영전(營前)·영좌(營左)·영중(營中)·영후(營後)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즉 영전은 어영청 前軍을 뜻하는 것으로 각 군을 左·右·前·後·中軍 등 5군으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26년(1750년)에 세검정 부근으로 이전한 총융청(總戎廳)이 있고, 영조의 생모를 모신 육상묘(毓祥廟)가 1754년에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었다는데 이 지도에는 毓祥廟로 나타나 있어 지도의 내용으로 보아도 1751년경의 서울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지도는 특히 인쇄되어 반포된 책에 수록된 목판지도로서 현전하는 지도 중 가장 오래된 목판본 서울지도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都 城 圖 《廣 輿 圖》
도성도

채색필사본

18세기 後半

36.9×28.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明堂圖와 유사한 윤곽으로 그려진서울지도.
1760년(영조 36)에 慶熙宮으로 개칭된 慶德宮이 원래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대 전반기의 사정이 반영된 서울지도를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백악산(북악산)에서 한번 뭉쳐 솟아오르고 그 아래 옛 서울인 도성이 펼쳐져 있다. 서쪽 인왕산 자락이 왼쪽을 가려주고 있고, 가림막이 될만한 산이 없는 동쪽에는 假山 두 군데가 묘사되어 있다. 가산은 허한 지기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얕은 흙언덕을 의미한다. 전혀 높지 않은 가산이 그려진 것은 물론 서울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목멱산(남산)이 북한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의 터와 6조를 비롯한 관아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인왕산 자락에는 사직과 경덕궁이, 응봉 자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위치하고 있다. 백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開川:청계천)은 도심을 흐르다가 도성을 빠져나가면서 한강에 합류된다. 도성에 딸린 小門 가운데에는 興德門과 廣熙門이 이미 상당히 무너진 상태였음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두모포에서 서강에 이르는 京江(한강)이 그려져 있다. 경강 주변으로 주요 나루터와 광흥창 등의창고와 망원정 등의 명승지가 표시되어 있다.
해설 : 서울대 규장각 - 배우성



都 城 地 圖
도성지도

필사본

1780년대

67.5×92.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 <도성지도>의 명칭은 『서울六百年史』에 소개될 때부터의 명칭인데, 이찬 교수는 그의 저서인 『한국의 고지도』에서 <도성도(都城圖)>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시대의 서울지도 이름이 여러지도에서 다른 것은 각 지도에 이름이 써 있는 것이 극히 적기때문이다.

이 지도는 <성시전도(城市全圖)>와 <한양전도(漢陽全圖)>등과 함께 크기, 제작방법, 해설문의 내용, 남산의 위치 등이 같은데 다른 두 지도보다 더 정성을 들여 제작한 일급품이다.

제작연대에 대하여 이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것이 아닌가 보는 분도 있으나 정조 원년(1776)에 건립한 경모궁(景慕宮)이 보이므로 정선의 그림이 아님이 확실시되며, 또 순조(1801∼1834)때에 세워진 연우궁(延祐宮)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정조연간에 도화서에서 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도성지도(都城地圖)>는 모든 명칭을 漢字로 단아하고 정확하게 썼으면서도 정작 써야 할 지도의 명칭은 안 썼다. 그리고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종묘 등은 숲 사이에 전각을 그렸으나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불탔으므로 경회루의 돌기둥만 그렸고, 한강과 그 이남은 그리지 않았다. 성안의 축척은 1:9,000정도이다.  
해설 :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城 市 全 圖

채색필사본

1789년

71.0×113.0cm

허영환 소장

 이 지도에 쓰여진 제명 '성시전도'는 소장자가 다시 표구하면서, 절첩(折帖)으로 된 지도 표지에 쓰여 있던 지도명을 그대로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씨에게 부탁하여 1989년에 쓴 것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 영조, 정조시대의 실학자였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 1750∼1806)가 1789년 4월에 정조의 어명에 의해 「한양성시전도시(漢陽城市全圖詩)」를 지었는데 이 시는 역시 어명에 의해 1789년에 그려진 <성시전도>의 해어화(解語畵)라 할 수 있다. 이 성시전도는 지금처럼 활짝 펼쳐져 표구되기 전에는 절첩(折帖; 18번 접었으며 청남색 표지에는 <城市全圖>라는 묵서제명(墨書題名)이 있었음)으로 200년간 전해오고 있었다.

  한상복(韓相復) 박사에 의해 축척이 1 : 9,000으로 밝혀진 이 성시전도의 구도, 화법, 내용, 제작연대 등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都城地圖>(67.0×92.0cm)와 아주 흡사하다. 다만 한성부의 남부에 11방(坊) 70계(契)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71계의 오기다.
  이 <성시전도>는 규장각 소장의 <도성지도>보다 더 실경산수화처럼 그린 회화지도이며, 한성부의 오부(五部)도 오방색(五方色)으로 채색하여 뚜렷이 나타냈다. 특히 중부의 노란색은 가장 짙어 눈에 확 띄며, 소, 중, 대로를 나타내는 붉은 선이 실핏줄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다. 한강은 그려져 있지 않고 남산은 지도의 위쪽에 있다.

  이 지도의 왼쪽에 밝혀져 있는 제작방법과 주요 지점사이의 보수(步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부(五部)의 분계(分界)는 오방본색(五方本色)으로 나눴으며 각부는 방권(方圈)을 둘러 구별하였다. 방명(坊名) 역시 방권을 둘러 표기하였고, 각계(各契) 위에는 소속 방명의 한 자를 보태 원권(圓圈)으로 표시하였다.
  삼군문(三軍門)의 분계(分界)는 황점(黃點)으로 나눴으며, 성내는 보수(步數)의 길고 짧음에 따라 나타내었고 성외는 넓어서 간략하게 하였다. 돈화문(敦化門)에서 파자교(把子橋)를 거쳐 흥인문(興仁門)까지는 1489步이고, 파자교를 거쳐 종가(鍾街)를 지나 숭례문까지는 1826보이다. 그리고 파자교를 거쳐 서쪽의 돈의문(敦義門)까지는 1975보다.



京城圖《東國輿圖》
경성도

채색필사본

1801∼1822년

65.5×57.0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19세기 초엽의 지도책으로 추정되는 《동국여도(東國輿圖)》중에 포함되어 있는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그린 지도.
  북한산성과 도성과의 거리는 서울의 고지도에서는  거의 무시되는 예가 많으나, 이 지도에서는 공간적인 위치와 넓이가 비교적 현대적인 지도에 가까워졌다. 북한산 줄기와 백악, 인왕, 낙산, 목멱산을 포함하는 내사산(內四山), 그리고 한강과 그 수계(水系)를 자세히 나타내 서울의 자연적인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한 도성과 북한산성, 궁궐과 서울의 상징적인 인공물이 조화있게 표현되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도성 내부의 주요 간선도로와 사대문에서 홍제원을 거쳐 서북쪽으로 가는 의주로(義州路), 혜화문(惠化門)에서 수유리를 거쳐 동북쪽으로 가는 경흥로(慶興路), 수구문(水口門)에서 한강진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동래로(東萊路) 등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 경로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여의도에 해당하는 곳에 율도(栗島)라고 표시되어 있어, 밤섬과 여의도는 원래 사주(砂洲)로 접속되어 있던 모래섬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漢城府 (《天下圖倂天地圖》)
한성부

채색필사본

19세기 초기

36.6×42.8cm

개인 소장



  조선 후기에 널리 보급되었던 지도첩에는 한성도(漢城圖), 송도도(松都圖) 등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18장의 지도로 구성된 이 지도첩에는 한성도가 포함되어 있다. 지도책은 1700년대의 것을 1839년에 다시 새롭게 만든 것으로 되어있다. 지도의 내용은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성삼군문분계지도>를 필사하여 한성오부(漢城五部)의 방명(坊名)을 상단에 기재하고, 도성의 길이와 五部居民의 호수를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동쪽의 眞(鎭)長坊(진장방)과 관광방(觀光坊)의 위치가 바뀌고 틀리게 쓴 것 등은 필사과정에서의 오류로 보인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京 江 附 臨 津 圖《東國輿圖》
경강부임진도

채색필사본

19세기 전반

47.0×123.6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남쪽으로 京江(한강)과 북쪽으로 임진강(臨津江)사이의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그린 지도로 <동국여도(東國輿圖)>에 포함되어 있다. 남한강은 충주부터, 북한강은 춘천 부근부터 나타나 있는데 한강변의 상업취락의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한강과 임진강이 함께 표시되어 있어 임진강을 통한 교류의 증가 추세도 살필 수 있다. 군현명은 황색 바탕의 원 안에 쓰여 있고, 군현명 옆에 작고 가늘게 서울로부터의 거리가 쓰여 있다. 한강변의 취락 발달이 강조된 지도라는 특징을 지닌다. 경강변의 주요 포구에 황색 지붕을 그려 취락이 있음을 표시하고, 마을의 이름을 기입하였다.

  이 지도에 표시된 지역적 범위는 <택리지(擇里志)>에서 장삿배의 이익이 있다고 언급한 북한강의 춘천, 남한강의 충주, 그리고 연천 등 임진강 일대와 일치하고 있어 당시 상업의 발달과 지역적 교류의 증가 속에서 지도가 편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都 城 圖 《東國輿圖》
도성도

채색필사본

19세기 전반

47.0×66.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東國輿圖>에 포함된 서울지도. 남쪽으로 한강, 북쪽으로 북한산과 수유현(水踰峴)(店), 서쪽은 양화진(楊花津), 동쪽은 전관교(箭串橋)까지 그려진 도성 안과 밖의 지도이다. 일반적인 도성도에는 궁궐과 공공기관을 주로 표시하고 거주지역과 가옥의 표시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일반 서민들의 가옥 또는 집단을 이루는 촌락 등를 표시한 점, 취락과 그 밖의 것들을 회화적으로 나타낸 점 등이 특징이다. 도성 안에는 주요 궁과 사직(社稷), 사대문 등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지명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와 하천의 사이사이에 기와집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청색 지붕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도성 안에서는 숭례문(崇禮門)과 소의문(昭義門) 근처, 그리고 흥인문(興仁門)과 광희문(光熙門) 근처에 초가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황색 지붕이 섞여 있으며, 도성 밖에는 한강 변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섞여 있는데, 관청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가집의 황색 가옥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도성 밖이라 하더라도 숭례문에서 소의문을 거쳐 돈의문 근처까지 성에 연접한 곳에는 기와집이 그려져 있다. 성밖은 대체로 황색 지붕의 초가가 많은데, 청파역 부근에는 와가의 청색 지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성 밖에 마을이 표시된 곳은 흥인문 밖으로 주심(柱尋)·신촌(新村)·전농(典農), 숭례문 밖으로 이태원(二泰院), 돈의문 밖에 공덕(孔德), 혜화문 밖에 손가장(孫家庄)·수유현(水踰峴)(店) 등 지명까지 쓰여 있어 이들 지역이 비교적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잘 표현된 곳은 京江(한강) 연안이다. 살곶이다리(전관교(箭串橋);청계천, 안암천, 정릉천, 중랑천이 만나는 하류에 놓여진 다리)로부터 동남쪽으로 한강에 연한 곳을 보면 두모포(豆毛浦)·한강진(漢江鎭)·둔지촌(屯之村)·서빙고(西氷庫)· 동작(銅雀)·노량(露梁)·용산(龍山)·동막(東幕)·마포(麻浦)·광흥창(廣興倉)까지 건물이 그려져 있어 강변 취락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도성 내외의 도로와 하천의 표시가 상세하게 잘 되어 있고 하천의 이름, 고개 등의 이름도 비교적 잘 적혀 있는 점이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漢 陽 圖 《新編標題纂圖寰瀛誌(신편표제찬도환영지)》
한양도 한양도

목판본

1770년 위백규(魏伯珪) 편찬

1822년 간행

24.3×35.3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와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고, 청계천의 유로 등으로 미루어 임란 전에 원도(原圖)가 작성된 후 일부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는 위백규(魏伯珪 ; 1727∼1798)가 영조 46년(1770)에 저술한《환영지(寰瀛誌)》 안에 들어 있는 지도이다. 《환영지》는 고본(稿本 ; 초고 또는 필사본)으로 전해 오다가 후손에 의해서 순조 22년(1822)에 목판으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1770년 이전에 작성되었으나 출간된 것은 1822년이다.

  도성과 사대문, 북한산과 북한산성, 그리고 궁궐과 종가(鍾街)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서울의 옛 지도이다. 18세기 후기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서울에 대한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한 지도이며, 한강, 청계천, 북한산, 백악산, 인왕산 등의 자연과 궁궐, 종가, 도성, 사대문 등의 문화적인 유산이 조화된 서울을 선택적으로 나타내면서도 그 당시의 서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慶熙宮)으로 개명된 경덕궁(慶德宮;전 서울고등학교 자리)이 옛 이름으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도의 작성연대는 176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집을 잇대어 그린 종가의 표시방법은 오랜 방법이며,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유사한 방법으로 그린 〈요동성도(遼東城圖)〉가 발견된 바 있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都 城 全 圖 《靑 邱 要 覽》
도성전도

  채색필사본

  김정호

  1834년경

  40.3×67.1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서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靑邱要覽》에 전국 지도와는 별도로 지도책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는 도성전도.
  이 지도는 8면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1면으로 합쳐서 만든 것이다.
  지도의 범위는 도성안과 義州路, 東大門밖 中梁川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四山으로 둘러싸인 도성안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경복궁, 창경궁과 종묘, 경희궁, 사직을 비롯하여 또한 당시의 주요 공공기관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종로를 비롯하여 大路, 中路, 小路를 적색으로 도로폭을 구별하여 마치 혈관같이 그렸다. 도성 내외의 하천을 굵기에 의해서 대소를 가릴 수 있게 하였고 현재는 볼 수 없는 교량이 표시되어 있다. 청계천에는 오간수문에서부터 마전교, 효경교, 하랑교, 수표교, 장통교, 광통교, 모전교 등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종로에는 종루를 중심으로 동서남 세 방향으로 발달된 각종 시전의 이름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지도의 우측 상단 여백에는 黑點線으로 五部界, 紅點線은 三營界를 표시한다는 범례가 있다. 이 선은 도성내의 행정구역을 部, 坊, 洞으로 나누고 있었는데, 현재의 區에 해당하는 東部, 西部, 南部, 北部, 中部의 경계를 알아 볼 수 있게 한다.
해설:  이찬 『서울의 옛지도』

  김정호가 만든 《靑邱圖》의 異本은 현재 9개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3개의 유형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본 《청구요람》은 乾,坤 2책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총 29층, 동서로는 22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乾권에는 홀수층이, 坤권에는 짝수층이 수록되어 있다. 각 층판의 면은 남북 100리와 동서 70리의 동일한 크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책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31.5cmX21.5cm이다.
해설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이기봉



首 善 全 圖
수선전도

목판본

김정호

1840년대

83.0×65.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首善全圖>의 原版木은 3매1조로 상,중,하 3단으로 조합할 수 있다.

  古山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수선전도〉는 1840년대에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지도의 원판목에는 누가 언제 판각했다는 이름도 없고 간지도 없다. 따라서 모든 정황과 기록 및 지도의 내용으로 보아 김정호가 1840년대에 그리고 새겼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으뜸가는 선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建首善自京師始'건수선자경사시')"는 말에서 비롯한 首善은 首都,서울 등을 말한다. 따라서 "首善全圖"는 "서울全圖"라는 뜻이다.

  이 <首善全圖>의 상단에는 가운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首善全圖"라 썼고, 바로 그 아래에 도봉산과 삼각산을 그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거의 원형으로 한성부(漢城府)의 관할행정구역(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까지)을 새겨 넣었다. 즉,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모래내(沙川), 남쪽은 한강까지 그렸고, 표기는 모두 漢字로 하였다. 지도의 축척은 도성 안은 균일하게 하였고 도성 밖은 소축척(小縮尺)으로 하였다.

해설: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京 兆 五 部 《大東輿地圖》
경조오부

목판본

김정호(金正浩)

1861년

30.6×40.2cm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에 포함되어 있는 특별도이다. 특별도라는 의미는 《대동여지도》의 동일축척 약 16만분의 1로 그린 전국지도와는 달리 수도 서울을 특별히 대축척으로 그렸다는 뜻이다. 수도 서울을 단일 지도로 같은 축척으로 만든 경우에는 도성안이 너무 작아 자세하게 그릴 수 없어서 대부분의 도성도는 도성 내부는 대축척으로 과장해 그리고 주변지역은 소축척으로 줄여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러한 같은 지도안에 세축척을 달리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 김정호는 <경조오부>를 <도성도(또는 한성도)>보다 소축척으로 하여 서울 부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도성도>는 성내 내부에 한정시켜서 대축척으로 그리게 하였다. 즉 이렇게 서울을 2매의 지도로 작성함으로써 지도를 통해서 올바른 공간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지도로서 갖추어야 할 동일 축척개념을 구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지도의 표현상의 특징은 지금까지의 도성도에서의 지형표시와 전혀 다른 《대동여지도》의 독특한 표현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 지도에서는 하나하나의 산보다는 산이 연결되는 산줄기, 즉 산계(山系)를 중시하고 있다. 북한산에서 뻗고 있는 산줄기와 그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 즉 수계(水系)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북한산의 산줄기는 백악에 연결되고, 서울의 내사산인 백악(白岳), 인왕산(仁王山), 목멱산(木覓山), 낙타산(駱駝山)도 산줄기로 연결되고 잇다. 실제로 산이 연결되지 않았어도 분수령(分水嶺)을 이루는 지맥(地脈)을 연결되는 산계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김정호가 고안해낸 독특한 표현방법이다.

  이 지도에서 북한산성과 도성의 위치를 보면 북한산성은 도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측량에 의한 5만분의 1지도를 보면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지도에서는 백악에서 북쪽으로 선을 그으면 그 선은 북한산성을 통과하지 않고 북한산성의 서쪽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악의 정북은 북한산성의 중앙부보다 약간 동쪽을 통과하고 있다. 지도의 인문적인 내용은 도성 안에서는 주요 간선도로만 있을 뿐이다. 주변지역은 한강진(漢江津), 서빙고(西氷庫), 동작진(銅雀津), 압구정(狎鷗亭), 저자도(楮子島), 동묘(東廟), 선농단(先農壇) 등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해설 : 이찬『서울의 옛지도』



漢城圖 또는 都城圖 《大東輿地圖》

목판본

김정호(金正浩)

1861년

30.6×40.2cm

  <경조오부도>(《대동여지도첩 中》)의 옆에 있는 지도인데 처음부터 제명(題名)이 없어서 필자가 붙인 이름이다. 이찬 교수는 <도성도>라 하였다. <경조오부도>와는 달리 도성안을 자세히 그리고 주변(즉 도성 밖인 城底 10리까지)까지 포함시킨 지도다. 1861년 교간(校刊)후 성신여대본의 궁궐은 노란색, 산은 푸른색, 길은 붉은색, 내는 푸른색으로 칠했고, 규장각본의 궁궐은 경계만 붉은색, 큰내는 푸른색을 엷게 칠했다. 산과 길 등은 먹색을 그대로 두었다.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산세나 화법은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 <수선전도>와 아주 흡사하다. 이 <한성도>(또는 <도성도>) <경조오부도>등은 《대동여지도》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따로 채색되고 표구된 것이 많다.
해설 :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대동여지도에 실린 서울부근
대동여지도

목판본

김정호(金正浩)

1861년

30.5×171.5cm



《東輿圖》의 서울부근도
동여도

채색필사본

김정호(金正浩)

1860년경

200×30.5cm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2폭으로 나누어 그린 높이 약7m의 대형지도로 대동여지도의 형태와 비슷하다. 《대동여지도》가 목판본인데 반해 동여도는 필사본으로 채색이 들어 있으며 《동여도》는 《대동여지도》 보다 5,548개 더 많은 주기(註記 ; 지리정보)를 담고있다.



首 善 總 圖
수선총도

목판본

19세기 중기

77.0×86.0cm

윤형두 소장

  1840년대에 제작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首善全圖>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서울지도이나, 제작기법과 내용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김정호의 <首善全圖>에서는 북한산과 한강이 있으나 이 <수선총도(首善總圖)>에서는 도성안과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무악재 고개까지만 있을 뿐이다. 지명에 <首善全圖>보다도 각종 궁궐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특징 중의 하나이며, 지형과 하천표시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내사산인 백악(白岳), 인왕(仁王), 타락(駝駱),목멱산(木覓山)과 하천을 양각(陽刻)으로 하였고 주요 궁궐과 방명(坊名)은 음각(陰刻)으로 하였다.

  종로거리 양측의 시전(市廛)표시, 지도의 표현범위, 구도 등을 볼 때 오히려 《청구요람(靑邱要覽)》의 〈도성전도(都城全圖)〉와 유사하다. 제작연대는 순조 24년(1824)에 창덕궁의 서쪽에 건립한 경우궁(景祐宮)이 있고 고종 7년(1870)에 육상궁(毓祥宮)에 합친 선희궁(宣禧宮)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24년에서 187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해설 : 이찬 『서울의 옛지도』



首 善 總 圖
수선총도

목판본

19세기 중엽

82.5×73.5cm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위 <수선총도>와 같은 형태의 서울지도이나 남대문과 서대문 밖의 의주로 부분을 생략한 지도이다. 판각에서 양각과 음각을 혼합한 점, 지도의 구도 등으로 보아 위의 지도를 모방한 목판본으로 생각된다.



슈션젼도(首善全圖)
슈션젼도

필사본

1892年頃

99.0×70.0cm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미국인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이 <슈션젼도>는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首善全圖>보다 몇cm크지만 고려대본을 보고 펜으로 모사한 것이다. 지도의 제목은 한문과 한글, 내용은 한글과 영문을 병용하였다.

이 서울 고지도는 1824년(순조24)에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목판본<수선전도>를 그대로 베껴 그리고, 지명은 모두 한글로 기입한 채색사본이다. "진고개", "구리개", "풀무고개"등 지명을 모두 우리말로 표기한 것이 특색인 이 지도는 당시 우리나라에 와있던 외국인들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도의 상단 가운데에는 한문으로"首善全圖"라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그 아래에 붉은색으로 "슈션젼도"라 썼다. 한강과 하천은 푸른색, 산은 먹색과 푸른색, 건물과 길은 붉은색, 도성과 궁궐의 담장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또 한강 이남을 그리지 않은 하단의 여백에는 주요명소의 영문명칭과 범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