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鍾路區)

  이 구의 종로 1가에 서울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을 쳐서 알려주던 종루(鍾樓) 곧 보신각(普信閣)이 있으므로 종루가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종로라 하였다. 종루에서는 새벽4시경에 인정(人定), 저녁 10시경에 파루(罷漏)를 쳐서 도성의 출입을 통제했으므로 오늘날의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려 주는 곳이었다. 종로구는 서울의 종갓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양반 계층이 거주했는데, 인왕산 밑을 우대라 하고 북산 밑은 북촌, 낙산 밑은 동촌이라 했다. 1943년 6월에 종로구가 되었다.

가회동(嘉會洞)  견지동(堅志洞)  경운동(慶雲洞)  계 동(桂 洞)      공평동(公平洞)  관수동(觀水洞)  관철동(貫鐵洞)  관훈동(寬勳洞) 
교남동(橋南洞)  교북동(橋北洞)  구기동(舊基洞)  궁정동(宮井洞)  권농동(勸農洞)  낙원동(樂園洞)  내수동(內需洞)  내자동(內資洞)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당주동(唐珠洞)  도렴동(都染洞)  돈의동(敦義洞)  동숭동(東崇洞) 
명륜동1가(明倫洞1街)  명륜동2가(明倫洞2街)  명륜동3가(明倫洞3街)  명륜동4가(明倫洞4街)  묘 동(廟 洞)  무악동(毋岳洞) 
봉익동(鳳翼洞)  부암동(付岩洞)  사간동(司諫洞)  사직동(社稷洞)  삼청동(三淸洞)  서린동(瑞麟洞)  세종로(世宗路)  소격동(昭格洞) 
송월동(松月洞)  송현동(松峴洞)  수송동(壽松洞)  숭인동(崇仁洞)  신교동(新橋洞)  신문로1가(新門路1街)  신문로2가(新門路2街) 
신영동(新營洞)  안국동(安國洞)  연건동(蓮建洞)  연지동(蓮池洞)  예지동(禮智洞)  옥인동(玉仁洞)  운니동(雲泥洞)  와룡동(臥龍洞) 
원남동(苑南洞)  원서동(苑西洞)  이화동(梨花洞)  익선동(益善洞)  인사동(仁寺洞)  인의동(仁義洞)  장사동(長沙洞)  재 동(齋 洞) 
적선동(積善洞)  종로1가(鐘路1街)  종로2가(鐘路2街)  종로3가(鐘路3街)  종로4가(鐘路4街)  종로5가(鐘路5街)  종로6가(鐘路6街) 
중학동(中學洞)  창성동(昌成洞)  창신동(昌信洞)  청운동(淸雲洞)  청진동(淸進洞)  체부동(體府洞)  충신동(忠信洞)  통의동(通義洞) 
통인동(通仁洞)  팔판동(八判洞)  평 동(平 洞)      평창동(平倉洞)  필운동(弼雲洞)  행촌동(杏村洞)  혜화동(惠化洞)  홍지동(弘智洞) 
홍파동(紅把洞)  화 동(花 洞)      효자동(孝子洞)  효제동(孝悌洞)  훈정동(薰井洞) 



가회동(嘉會洞)

유래 :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北部 10坊 중의 하나인 嘉會坊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嘉會坊, 陽德坊
1751 : 北部 嘉會坊 嘉會坊契
1789 : 北部 嘉會坊 齋洞契
1895 : 北署 嘉會坊 齋洞契 齋洞 · 紅峴 · 孟峴 · 東谷, 陽德坊 桂生洞契 桂洞
1911 : 京城府 北部 嘉會坊 孟峴, 齋洞, 東谷, 陽德坊 桂洞
1914 : 嘉會洞
1936 : 嘉會町
1943 : 鐘路區 嘉會町
1946 : 鐘路區 嘉會洞



견지동(堅志洞)

유래 : 조선시대 中部 8坊의 하나인 堅平坊에 있는 義禁府에서 재판할 때 뜻을 굳게 가지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堅平坊, 寬仁坊
1751 : 中部 堅平坊 禁府內契 · 後洞契 · 典醫監洞契 · 中魚物廛一牌契 · 中魚物廛二牌契, 寬仁坊 大寺洞一牌契 · 大寺洞二牌契 · 大寺洞 三牌契 · 大寺洞四牌契 · 忠勳府內契
1867 : 中部 堅平坊 禁府內契 禁府後洞契 典醫監契 中魚物廛一牌契, 寬仁坊 大寺洞 一牌契 · 二牌契 · 三牌契 · 四牌契
1895 : 中署 堅平坊 典洞契 典洞 · 禁府後洞 · 銅井洞 · 氷庫洞 · 下槐洞, 典醫監契 典洞 · 槐洞, 魚物廛契 里門洞, 里門洞契 里門洞, 禁府契 禁府後洞 · 圖畵洞
中署 寬仁坊 大寺洞契 大寺洞 · 下靑石洞, 鐵物橋契 大寺洞, 塔洞契 大寺洞
1911 : 京城府 中部 堅平坊 典洞?禁府後洞 氷庫洞 銅井洞, 寬仁坊 靑石洞 大寺洞
1914 : 堅志洞
1936 : 堅志町
1943 : 鐘路區 堅志町
1946 : 鐘路區 堅志洞



경운동(慶雲洞)

유래 : 조선시대 이 지역은 中部 8坊의 하나인 慶幸坊에 속하였으므로 여기서 '慶'자를 따고, 또 부근에 있는 雲峴宮의 '雲'자를 따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中部 慶幸坊
1751 : 中部 慶幸坊 漢源東邊契 · 漢源西邊契 · 四巨里契 · 吳順德契 · 宮內契 · 布廛契
1867 : 中部 慶幸坊 漢源東邊契 · 漢源西邊契 · 四巨里契 · 吳順德契 · 漢源宮內契 · 女嬪宮內契
1894 : 中署 慶幸坊 洞口契 紬洞, 於義洞契 於義洞 · 校洞, 校洞契 於義宮洞, 吳順德契 於義洞 · 校洞 · 石井洞, 樓洞契 樓洞, 塔洞契 校洞 · 塔洞
1911 : 京城府 中部 慶幸坊 石井洞 · 校洞
1914 : 慶雲洞
1936 : 慶雲町
1943 : 鐘路區 慶雲町
1946 : 鐘路區 慶雲洞



계동(桂洞)

유래 : 원래 이곳에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이던 濟生院이 있어서 濟生洞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桂生洞이라 불리기도 하다가, 1914년 洞名 제정때 桂生洞의 발음이 妓生洞과 비슷하다 하여 桂洞으로 줄여 부르게 된 것임.
1396 : 漢城府 北部 陽德坊
1751 : 北部 陽德坊契
1867 : 北部 陽德坊 桂生洞契
1895 : 北署 陽德坊 桂生洞契 桂洞
1911 : 京城府 北部 陽德坊 桂洞
1914 : 桂洞
1936 : 桂洞町
1943 : 鐘路區 桂洞町
1946 : 鐘路區 桂洞



공평동(公平洞)

유래 : 堅志洞 동명 유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지역이 中部 8坊의 하나인 堅平坊에 속하였고, 이 堅平坊에 있던 義禁府에서 재판을 행할 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中部 堅平坊
1751 : 中部 堅平坊 禁府內契 · 後洞契 · 典醫監洞契 · 中魚物廛一牌契 · 中魚物廛二牌契
1895 : 中署 堅平坊 典洞契 典洞 · 下槐洞 · 禁府後洞 · 銅井洞 · 氷庫洞, 典醫監契 典洞 · 槐洞, 鉢里廛契 鉢里洞, 魚物廛契 里門洞 · 後洞 · 香井洞 · 水典洞 · 承洞, 里門洞契 里門洞, 上米廛契 上米廛前洞 · 上米廛後洞, 壽洞契 外相洞, 禁府契 禁府後洞 · 圖畵洞
1911 : 京城府 中部 堅平坊 槐洞 · 典洞 · 禁府後洞 · 鉢里洞 · 里門洞
1914 : 公平洞
1936 : 公平町
1943 : 鐘路區 公平町
1946 : 鐘路區 公平洞



관수동(觀水洞)

유래 : 융희 4년(1910)에 청계천 위에 가설하였던 ‘觀水橋’라는 아름다운 다리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 또한 이 관수교의 다리 이름은 이곳에 청계천의 준설사업을 위한 상설기관인 濬川司(지금의 관수동 152?153번지 일대 위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水位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얻어짐.
1396 : 漢城府 中部 長通坊
1751 : 中部 長通坊 琵琶洞契 · 廣州主人契 · 笠廛契 · 兪士益契 · 徐千守契
1867 : 中部 長通坊 琵琶洞契 · 廣州主人契 · 笠廛契 · 兪士益契
1895 : 中署 長通坊 徐千守契 笠洞, 兪士益契 小笠洞, 標橋契 小笠洞, 笠洞契 小笠洞 · 帽谷洞, 廣州主人契 上板洞 · 帽谷洞 · 琵琶洞
1911 : 京城府 中部 長通坊
1914 : 觀水洞
1936 : 觀水町
1943 : 鐘路區 觀水町
1946 : 鐘路區 觀水洞



관철동(貫鐵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貫子洞의 ‘貫’자와, 그 북쪽에 있던 다리 이름인 鐵物橋의 ‘鐵’자를 합한 것임.
1396 : 漢城府 中部 長通坊
1751 : 中部 長通坊 水標東邊契 · 丁萬石契 · 貫子洞契 · 徐千壽契 · 義城正契 · 兪士益契
1867 : 中部 長通坊 水標東邊契 · 笠廛契 · 義城正契 · 丁萬石契 · 兪士益契 · 鹽廛契 · 貫子洞契
1895 : 中署 長通坊 貫子洞契 貫子洞, 兪士益契 小笠洞, 標橋契 大笠洞, 笠洞契 小笠洞 · 大笠洞, 義城正契 大笠洞, 徐千壽契 東谷 · 長橋洞 · 鹽洞 · 鐵物橋 · 笠洞 · 貫子洞, 丁萬石契 東谷 · 靑布後洞 · 丁字洞 · 鹽洞
1911 : 京城府 中部 長通坊 長橋洞 · 貫子洞 · 丁字洞 · 靑布後洞 · 靑布後洞 · 鹽洞 · 東谷 · 笠洞
1914 : 貫鐵洞
1936 : 貫鐵町
1943 : 鐘路區 貫鐵町
1946 : 鐘路區 貫鐵洞



관훈동(寬勳洞)

유래 : 조선시대 이 지역이 中部 8坊의 하나인 寬仁坊에 속하였으므로 여기서 '寬'자를 따고, 또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忠勳府內契 · 勳洞에서 '勳'자를 따온 것임.
1396 : 漢城府 中部 寬仁坊
1751 : 中部 寬仁坊 大寺洞一牌契 · 大寺洞二牌契 · 大寺洞三牌契 · 大寺洞四牌契 · 忠勳府內契
1867 : 中部 寬仁坊 大寺洞一牌契 · 二牌契 · 三牌契 · 四牌契 · 忠勳府內契
1895 : 中署 寬仁坊 大寺洞契 園洞 · 大寺洞 · 下靑石洞 · 承洞 · 塔洞, 鐵物橋契 大寺洞 · 承洞, 塔洞契 大寺洞
1911 : 京城府 中部 寬仁坊 勳洞 · 大寺洞 · 靑石洞
1914 : 寬勳洞
1936 : 寬勳町
1943 : 鐘路區 寬勳町
1946 : 鐘路區 寬勳洞



교남동(橋南洞)

유래 :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橋南洞, 북쪽을 橋北洞이라 한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 池下契 慕華峴 · 谷井洞 · 新村洞 · 銀杏洞 · 御水井洞 · 紅門洞 · 館前洞 · 石橋洞 · 把撥洞 · 月岩洞 · 川邊洞 · 松亭洞 · 平洞 · 壯元洞 · 館後洞 · 玉瀑洞 · 李判洞 · 冷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池下契 平洞 冷洞 石橋洞 · 川邊洞
1914 : 橋南洞
1936 : 橋南町
1943 : 西大門區 橋南町
1946 : 西大門區 橋南洞
1975 : 鐘路區 橋南洞



교북동(橋北洞)

유래 : 교남동과 연접된 지점인 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 북쪽 동네라 하여 동명이 유래.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로 교남파출소 앞에 돌다리가 있어 다리의 북쪽을 교북동, 남쪽을 교남동이라 한데서 비롯됨.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 池下契 慕華峴 · 谷井洞 · 新村洞 · 銀杏洞 · 御水井洞 · 紅門洞 · 館前洞 · 石橋洞 · 把撥洞 · 月岩洞 · 川邊洞 · 松亭洞 · 平洞 · 壯元洞 · 館後洞 · 玉瀑洞 · 李判洞 · 冷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池下契 石橋洞 · 壯元亭洞 · 館前洞 · 新村洞 · 把撥洞 각 일부와 紅花洞
1914 : 橋北洞
1936 : 橋北町
1943 : 西大門區 橋北町
1946 : 西大門區 橋北洞
1975 : 鐘路區 橋北洞



구기동(舊基洞)

유래 : 전에 '구텃굴'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그 연원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음.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經理廳契
1751 : 北部 義通坊 經理廳契
1867 : 北部 常平坊 經理廳契
1895 : 北署 常平坊(城外) 經理廳契 舊基洞 · 鷹岩洞 · 王亭坪
1911 : 京城府 恩平面 舊基 · 鷹岩 · 王亭坪
1914 : 京畿道 高揚郡 恩平面 舊基里
1949 : 西大門區 舊基里
1950 : 西大門區 舊基洞
1965 : 西大門區 舊基洞
1975 : 鐘路區 舊基洞



궁정동(宮井洞)

  궁정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의 상궁동(毓祥宮洞),동곡(東谷),온정동(溫井洞),신교(新橋),박정동(朴井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宮"자와 온정동,박정동의 '井'자를 따서 궁정동(宮井洞)이라 하였다. 궁정동은 조선초까지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었으며 1914년 4월1일 육상궁동,동곡,온정동,신교,박정동의 각 일부를 합쳐 궁정동을 신설하였다.
  1936년 4월 1일 궁정동은 궁정정(宮井町)으로 변경되었다. 1943년 6월10일에는 구제도를 신설하였는데 도성 안에 있던 궁정동은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에 따라 궁정정은 궁정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1955년 4월 18일 행정동제가 실시됨에 따라 청운동,신교동,궁정동 일원 및 세종로 1번지를 합하여 자하동(紫霞洞)이라 하였다.
 1970년 5월 18일 궁정동,신교동,청운동,세종로1번지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청운동사무소가 설치되어 행정을 맡고 있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박정동(朴井洞)이라고도 한다.
  육상궁골은 육상궁동이라고도 하는데 육상궁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청와대 옆 경농제(慶農齊) 앞에는 우리나라 8도의 모양을 따라 여덟배미의 논을 만들어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팔도배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택가와 도로로 바뀌었다.
  궁정동의 동명이 유래된 육상궁은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를 향사(享祀)하는 사당이다. 경종이 후사없이 재위 4년만인 1704년에 승하하자 이복 동생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가문과 출신자랑을 일삼던 당시에 궁중의 하인격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를 생모로 한 영조의 한스러움과 생모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였다. 숙종 44년(1718)에 이미 세상을 떠난 숙빈을 위해 영조는 호조판서에 명하여 생모의 신위를 모실 육상궁을 짓게 하고 그 기둥과 문 모양 등을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종묘와 똑같이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비(正妃)가 아닌 숙빈의 사당을 종묘와 똑같이 지을 수가 없어 고심하다가 집터를 깎아내어 평지보다 낮게하고 그 외의 칫수는 종묘와 같이 하였다.
 1908년에 서울의 모든 사묘(私廟)를 철폐할 때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연우궁(延祐宮),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선희궁(宣嬉宮), 정조의 후궁 육빈박씨(毓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을 합사하여 「6宮」으로 되었다. 1929년 고종의 후궁 엄씨(嚴氏)의 덕안궁(德安宮)까지 옮겨와 속칭 「7宮」이라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상 북악산 기슭 가운데 가장 집터가 빼어난 곳은 역시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북쪽으로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내려다보게 되므로 私家가 들어서기 힘들었을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조선 전기부터 행세하던 사대부들이 터잡고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육상궁 북쪽에 있는 대은암(大隱岩)이다. 중종대의 대학자 어숙권(魚淑權)은 대은암이 있는 대은암동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지정(南止亭) 곤(袞;1471~1527)이 백악산록에 짐을 지으니 그 북쪽 동산은 천석(泉石)의 빼어남이 있었다. 박읍취헌(朴읍翠軒)은(誾;1479~1504)이 매양 이용제(李容齊) 荇(행;1478~1534)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가서 놀았는데 止亭은 승지로 새벽에 들어가서 밤에 돌아오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읍취헌이 장난으로 그 바위를 대은(大隱)이라하고 그 시내를 만리(萬里)라 하였다. 대개 그 바위가 주인이 알아주는 바 되지 못하니 그런 까닭으로 대은이 되는 것이며 시내는 만리 밖 멀리에 있는 것 같다 해서 일컬었다.」궁정동에는 서울의 진산인 북악 상봉에는 백악신(白岳神)과 삼각신(三角神)을 모신 백악신사가 있었다. 조선 초부터 내려오다가 고종 때 폐지되었다.
  육상궁 뒤쪽에 있는 석벽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의 꽃구경은 장관이므로 영조,정조,순조,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둥하였다.


권농동(勸農洞)

유래 : ① 채소 재배를 권장하는 農圃署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勸農洞이라 함.
② 농업 권장의 뜻을 가진 內農圃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그 뜻을 따라 勸農洞이라 이름함.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水門洞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1867 : 中部 貞善坊 水門洞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1894 : 中署 貞善坊 金萬年契 麻洞, 承文契 承文洞, 林己孫契 麻洞, 敦寧契 承文洞, 農圃契 農圃洞 · 水門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水門洞 承文洞 麻洞 農圃洞
1914 : 勸農洞
1936 : 勸農町
1943 : 鐘路區 勸農町
1946 : 鐘路區 勸農洞



낙원동(樂園洞)

  樂園洞은 1914년 4월 1일 동명 제정에 따라 이전 中部 慶幸坊 校洞, 塔洞, 於義洞,  紬洞의 각 일부와 貞善坊의 漢洞과 寬仁坊의 圓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만한 탑골공원이 있으므로 樂園洞이라는 洞名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1910년 10월 1일 漢城府는 京城府로 바뀌고 경기도의 관할지역으로 격하되었다 이듬해 4월 1일에는 경성부의 행정조직을 5部 8面制로 바꿈에 따라 낙원동은 中部로 도성안 지역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경성부에서 5부 8면을 직할로 하였다. 동년 4월 1일에는 경성부 관내의 洞, 町, 丁目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제정 공포함에 따라 낙원동이 탄생되었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의 구역이 대폭 확장되고 동의 명칭도 일본식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낙원동은 樂園町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에 따라 낙원정은 낙원동으로 명칭이 바뀌어졌다.
  낙원동은 현재 종로1,2가 동사무소에서 행정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낙원동은 서울의 北村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과 관련이 깊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되어온 곳이기도 하다.
  낙원동과 경운동이 인접한 校洞지역에는 於義宮이 있었다. 仁祖의 私邸가 있어 어의동이므로 동명을 인용하여 어의궁이라 하였다.
  낙원동 17번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種痘를 실시하여 천연두를 없앤 松村 池錫永(1855∼1935)의 자택이 있다.
  낙원동 241번지에는 우리나라 洋醫 제1호이며 漢城醫藥會(大韓醫師會 前身)를 창설한 박계양의 계양병원이 있었다.



내수동(內需洞)

유래 :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미곡,포목,잡물,노비 등을 조달하는 관아인 內需司가 있었으므로 그 명칭이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1751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 奉常寺契 · 內需司契
1864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 奉常寺契 · 內需司契
1895 : 西署 仁達坊 奉常寺契 北門洞, 大昌洞契 大昌洞, 內需司契 內司前 · 樓井洞 · 銀杏洞 · 宗橋, 社稷洞契 承傳橋 · 英嬪洞 · 社稷洞 · 朴井洞, 長興庫契 銀杏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英嬪洞 · 樓井洞 · 承傳橋 · 內需洞 · 內需司前洞 · 社稷洞 · 朴井洞 · 大昌洞 · 北門洞
1914 : 需昌洞 (內需司와 大昌洞의 이름을 인용)
1936 : 內需町
1943 : 鐘路區 內需町
1946 : 鐘路區 內需洞



내자동(內資洞)

유래 :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쌀,밀가루,술,기름,채소,과실,잔치,직조 등의 공급을 담당하는 관아인 內資寺가 있으므로 그 명칭이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1751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 壽城宮內契 · 內需司契
1867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 壽城宮內契 · 內需司契 · 壽城宮越邊契 · 都染洞契
1895 : 西署 仁達坊 大昌洞契 大昌洞, 內需司契 銀杏洞 · 宗橋, 社稷洞契 社稷洞, 壽城宮契 南征峴 · 戰笠洞, 長興庫契 銀杏洞 · 長興洞 · 古澗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1914 : 內資洞
1936 : 內資町
1943 : 鐘路區 內資町
1946 : 鐘路區 內資洞



누상동(樓上洞)

  누상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재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쪽에 위치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누상동은 조선초 한성부를 5부(部)로 나눌 때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다시 제정하면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은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으로 되었고 관내에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누각동(樓閣洞)이 지금의 누상동 지역으로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漢城府)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어지고 1914년 3월 1일 경성부 관내에 모두 186개의 정(町),정목(丁目),동(洞)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북부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는 누상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폭 확장함과 동시에 누상정(樓上町)이 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6년 10월 1일에는 우리말 동명으로 개칭하는 원칙에 따라 누상정은 누상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누상동 막바지는 인왕산(仁旺山)에 걸쳐있는데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산이름이 붙여졌다. 중종(中宗) 때에는 필운산(弼雲山)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산 동쪽에 필운동(弼雲洞)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한양천도 당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산 중턱에 선암(禪岩)이 있는 것을 보고 主山으로 하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정도전(鄭道傳)이 예부터 제왕(帝王)은 南面을 하되 東向으로 도읍을 정한 일은 없다고 반대하여 白岳을 主山으로 정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인왕산에는 인왕사를 비롯해서 복세암(福世庵),금강암(金剛庵),내불당(內佛堂),천향암 등 사찰이 있었으나 방자하게 경복궁을 내려다 본다해서 민가 11채와 함께 모두 헐어버린 일도 있었다.   누상동 약수 옆에는 와룡당(臥龍堂)이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중국 촉한(蜀漢)의 정치가였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신봉하던 곳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폐지되었다.
  누상동 159번지에는 누각골약물 혹은 누상동약수라 부르는 약수가 흘러내렸는데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인왕산 정상쪽으로 점점 민가들이 들어서면서 약수터는 주택가로 바뀌어졌다. 이 누상동약수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와룡당 위쪽에도 약수가 나왔다. 바위로 된 굴속에 약수가 떨어지고 바위에 불로천(不老泉)이라 새겨져 있어 불로천약수 혹은 불로천이라 불렀는데 이 물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약수가 톡쏘는 듯한 맛이었다고 한다.
  불로천 동북쪽에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부처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부처바위 혹은 불상암(佛像岩)이라 부른다.
  누상동에서 무악동(毋岳洞)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미처에는 범(虎)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범바위,호암이라 불렀다. 1968년 1월 21일 북괴무장공비 침입이후 수도권 경비와 산책로로서 서울특별시의 방어 및 관광도로의 스카이웨이 건설계획에 따라 북악스카이웨이가 만들어졌다. 당초 공사 계획에는 없었던 것을 도중에 계획을 변경, 인왕산길을 확장 연결시키면서 범바위는 폭파되어 없어졌다.
  부처바위 동북쪽에는 돌로 된 굴속바위에 천향암(天香庵)이라고 새겨져 있으므로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그 아래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여름철의 굴속에서는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 서늘하므로 피서지로도 적격이었다.
  조선초 태조(太祖)는 수도 한양에 궁궐, 종묘, 사직, 관가, 도로, 시전(市廛) 등을 계획하고 건설하였으며 정도전에게 城의 기초를 측정할 것을 명하였고 태조 자신이 직접 수차에 걸쳐서 산에 올라 성지(城址)를 관찰하는 등 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의 건설의 주역이요 개국공신의 1인자인 정도전은 한양의 산세를 자세히 살피고 백악산(白岳山),낙산(駱山),목멱산(木覓山),인왕산(仁旺山)의 소위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총 연장 59,500尺의 성곽을 확정하였다.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도성창축(都城創築)은 1936년 1월 9일 개기제(開基祭)를 올리고 민정(民丁) 118,070명을 동원하여 구간당 600尺씩 97구간으로 나누어 축성공사를 시작하였다. 축성공사는 49일만인 2월 28일에 마쳤는데 단시일내에 끝나게 된 것은 처음부터 축성계획을 농한기에 끝내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10호로 지정되었다.
  인왕산 기슭을 향해 올라가는 누상동 9번지 기와집에서는 1940년대 일제하의 어둠을 몰아내고 민족 광복에의 염원으로 괴로워하며 격렬한 시를 썼던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가 1년 동안 하숙을 하였다.



누하동(樓下洞)

  누하동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京城府制)의 실시에 따라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오거리(五巨里),남척동(南隻洞),송목동(松木洞),장성동(長城洞),유목동(柳木洞),복정동(福井洞),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래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누하동은 조선초 한성부를 5부(部)로 나눌 때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한성부의 5부(部)는 5서(署)로 바뀌었다. 지금의 누하동 지역은 누각동 일부와 남척동,유목동,장성동,복정동,오거리,송목동이다.
  1914년 4월 1일에는 경서부 관내에 186개의 정(町),정목(丁目),동(洞)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누각동 아래쪽의 일부 지역을 합쳐 누하동을 신설하였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이 대폭 확장됨과 동시에 경성부(京城府) 누하정(樓下町)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누하정은 종로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에는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꾼다는 원칙아래 누하정에서 누하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누하동은 남척동, 송목동, 장성동, 오거리, 유목동, 복정동, 누각동 등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에 걸쳐있는 누각동에 사는 사람들은 예부터 집집마다 담배 쌈지와 갓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위에 시렁을 얹고 쌈지와 갓을 널어 말렸으므로 "누각골 색시는 쌈지 접는 데로 다간다"는 노래가 있었다.
  남척동은 누각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납작하므로 납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남척동(南隻洞)이라 표기하였고, 유목동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졌으며 버드나뭇골이라고 한다. 또 복정동은 물이 맑고 차서 삼복더위도 물리친다는 복우물이 있기 때문에 복우물골이라 했고 한자로 쓴 것이 복정동이다.
  송목동은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장성동은 담이 성처럼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도 인경궁의 담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성동(水聲洞)은 누하동 뒤쪽으로 누상동과 경계된는 곳의 지명인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성동에는 기린교(麒麟橋)가 있었는데 석교(石橋)였다. 기린교 근처에는  비해당(匪解堂) 安平大君의 집이 있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안평대군이 피살되자 중부(仲父)인 孝寧大君 보(補;1396~1486)의 차지가 되었다.



당주동(唐珠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唐皮洞의 ‘唐’자와 夜珠峴의 ‘珠’자를 따서 붙임.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 積善坊
1751 : 西部 仁達坊 奉常寺契 · 內贍司契, 積善坊 夜珠峴契 · 唐皮洞契
1867 : 西部 仁達坊 奉常寺契 · 內贍寺內契 · 唐皮洞契, 積善坊 夜晝峴契 · 唐皮洞契
1895 : 西署 仁達坊 夜珠峴契 燻造洞 · 昌漆洞 · 夜珠峴, 奉常寺契 南門洞 · 內贍司 · 奉常寺前 · 北門洞, 大昌洞契 大昌洞
西署 積善坊 唐皮洞契 唐皮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積善坊
1914 : 唐珠洞
1936 : 唐珠町
1943 : 鐘路區 唐珠町
1946 : 鐘路區 唐珠洞



도렴동(都染洞)

유래 : 朝鮮時代 궁중에서 필요한 직조물의 염색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는 관아인 都染署가 있었던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積善坊
1751 : 西部 積善坊 司譯院契 · 工曹後洞契 · 司온洞契
1867 : 西部 積善坊 司譯院內契 · 工曹後洞契
1895 : 西署 積善坊 工曹後洞契 工後洞, 都染洞契 義盈洞 · 都染洞, 司온洞契 司온洞
1911 : 京城府 中部 義盈庫洞 都染洞 司온洞 工後洞
1914 : 都染洞
1936 : 都染町
1943 : 鐘路區 都染町
1946 : 鐘路區 都染洞



돈의동(敦義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敦寧洞과 於義洞의 이름을 따 붙인데서 유래.
1396 : 中部 貞善坊?慶幸坊
1751 : 中部 貞善坊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慶幸坊 吳順德契
1867 : 中部 貞善坊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慶幸坊 吳順德契
1895 : 中署 貞善坊 金萬年契 樓洞, 林己孫契 樓洞, 於義洞契 於義洞, 敦寧契 敦寧洞 · 長大將洞 · 樓洞
中署 慶幸坊 洞口契 紬洞, 於義洞契 於義洞 · 校洞, 橋洞契 於義宮洞, 吳順德契 於義洞 · 校洞, 樓洞契 樓洞, 塔洞契 校洞, 布屛契 校洞
1911 : 京城府 中部 長大將洞 漢洞 於義洞?樓洞 紬洞
1914 : 敦義洞
1936 : 敦義町
1943 : 鐘路區 敦義町
1946 : 鐘路區 敦義洞



동숭동(東崇洞)

유래 : 崇敎坊 동쪽에 있는 洞이라 하여 東崇洞의 동명이 유래.
1396 : 東部 崇信坊
1895 : 東署 崇信坊 景二契 雙溪洞 · 下柏洞 · 新垈洞 · 上柏洞
1911 : 京城府 崇信面 新垈洞 · 下柏洞 · 上柏洞 · 雙溪洞
1914 : 東崇洞
1936 : 東崇町
1943 : 鐘路區 東崇町
1946 : 鐘路區 東崇洞



명륜동1가(明倫洞1街)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儒學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1396 : 東部 崇敎坊
1751 : 東部 崇敎坊 成均館契?崇敎一契
1895 : 東署 崇敎坊 成均館契 食堂洞 · 水之洞 · 道德洞 · 避馬洞 · 興德洞 · 宋洞
1911 : 京城府 東部 崇敎坊 食堂洞 · 水之洞 · 道德洞 · 浦洞 · 上井洞 · 興德洞 · 避馬洞 · 宋洞
1914 : 崇1洞
1936 : 明倫町1丁目
1943 : 鐘路區 明倫町1丁目
1946 : 鐘路區 明倫洞1街



명륜동2가(明倫洞2街)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1396 : 東部 崇敎坊
1751 : 東部 崇敎坊 成均館契
1895 : 東署 崇敎坊 成均館契 避馬洞 · 興德洞 · 旌門洞 · 四賢洞 · 山泉洞 · 宮內洞 · 宋洞, 景一契 上土橋 · 廣禮橋 · 宮內井洞
1911 : 京城府 東部 崇敎坊 宮內井洞 · 四賢洞 · 旌門洞 · 山泉洞 · 宮內洞 · 朴井洞 · 觀기橋洞 · 宋洞 · 廣禮橋洞 · 避馬洞 · 興德洞 · 上土橋洞
1914 : 崇2洞
1936 : 明倫町2丁目
1943 : 鐘路區 明倫町2丁目
1946 : 鐘路區 明倫洞2街



명륜동3가(明倫洞3街)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1396 : 東部 崇敎坊
1751 : 東部 崇敎坊 成均館契
1895 : 東署 崇敎坊 成均館契 里門洞 · 紅門洞 · 西泮洞 · 濟玉洞 · 養賢洞 · 營洞 · 館洞 · 東泮洞
1911 : 京城府 東部 崇敎坊 養賢洞 · 西泮洞 · 濟玉洞 · 紅門洞 · 營洞 · 里門洞
1914 : 崇3洞
1936 : 明倫町3丁目
1943 : 鐘路區 明倫町3丁目
1946 : 鐘路區 明倫洞3街



명륜동4가(明倫洞4街)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1396 : 東部 崇敎坊
1751 : 東部 崇敎坊 成均館契
1895 : 東署 崇敎坊 成均館契 ?石峴 · 思樂洞, 景一契 廣禮橋 · 寒井洞
1911 : 京城府 東部 崇敎坊 寒井洞 · 思樂洞 · ?石峴 · 廣禮橋洞
1914 : 崇4洞
1936 : 明倫町4丁目
1943 : 鐘路區 明倫町4丁目
1946 : 鐘路區 明倫洞4街



묘동(廟洞)

유래 : 조선시대 역대 왕 및 그 配位의 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드리는 宗廟에서 가깝다는 데에서 洞名이 유래.
1396 :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1895 : 中署 貞善坊 大廟洞契 廟洞 · 下廟洞, 金萬年契 大廟洞 · 麻洞 · 樓洞, 林己孫契 麻洞 · 樓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樓洞 · 麻洞 · 廟洞
1914 : 授恩洞
1936 : 授恩町
1943 : 鐘路區 授恩町
1946 : 鐘路區 廟洞



무악동(毋岳洞)

유래 : 1975년 서대문구에 속해 있던 峴底洞 중 義州路 동쪽 지역을 종로구로 편입하면서 서울에서 개성-평양-의주로 연결되는 의주로의 무악재(毋岳峴)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동명임.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城外) 池下契 慕華峴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1914 : 峴底洞
1936 : 峴底町
1943 : 西大門區 峴底町
1946 : 西大門區 峴底洞
1975 : 鐘路區 毋岳洞



봉익동(鳳翼洞)

유래 : ① 昌德宮 敦化門 앞에 위치하며 나라의 祥瑞인 臥龍과 鳳翼의 이름을 따서 유래.
② 鳳翼이란 흔히 봉황새의 날개를 말하고, 鳳은 龍과 함께 임금을 뜻하기 때문에 왕궁의 소재지나 왕의 주거지와 관련이 있으므로, 창덕궁 앞의 臥龍洞과 대비하여, 역대 왕의 神位가 모셔져 있는 종묘에서 가까운 이곳을 鳳翼洞이라 함.
③ 鳳翼洞에 조선 초기부터 宦官들이 대대로 많이 살아 온 사실과 관련하여, 환관의 존재와 같이 높은 곳에 붙어서 행세하는 것을 이르는 말 ‘發鳳翼’ 즉 鳳鳥의 날개에 붙어서 자기의 뜻을 이룬다는 말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 金萬年契
1895 : 中署 貞善坊 大廟洞契 廟洞 · 太井洞, 金萬年契 麻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麻洞 · 太井洞 · 廟洞
1914 : 鳳翼洞
1936 : 鳳翼町
1943 : 鐘路區 鳳翼町
1946 : 鐘路區 鳳翼洞



부암동(付岩洞)

유래 : 지금의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洞名이 유래. 부침바위는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질러 붙이면 손을 떼는 순간 암벽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생김.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1751 : 北部 義通坊 經理廳契
1867 : 北部 常平坊 經理廳契
1895 : 北署 常平坊(城外) 經理廳契 武溪洞 · 付岩洞 · 白石洞
1911 : 京城府 恩平面 白石洞?武溪洞 · 付岩洞
1914 : 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付岩里
1936 : 京城府 付岩町
1943 : 西大門區役所 付岩町
1946 : 西大門區 付岩洞
1975 : 鐘路區 付岩洞



사간동(司諫洞)

유래 : 지금의 사간동 62번지에 조선시대 관청인 司諫院이 있었기 때문에 비롯됨.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1751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1895 : 北署 觀光坊 中學契 碧洞 · 諫洞
1911 : 京城府 北部 觀光坊 碧洞 · 諫洞
1914 : 諫洞
1936 : 諫町
1943 : 鐘路區 諫町
1946 : 鐘路區 司諫洞



사직동(社稷洞)

유래 : 지금의 사직동 1-28번지에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1751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1895 : 西署 仁達坊 社稷洞契 社稷洞 · 朴井洞 · 武德洞 · 昌平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社稷洞 · 朴井洞 · 武德洞 · 昌平洞
1914 : 社稷洞
1936 : 社稷町
1943 : 鐘路區 社稷町
1946 : 鐘路區 社稷洞



삼청동(三淸洞)

유래 : ① 道敎의 太淸, 上淸, 玉淸 3位를 모신 三淸殿이 이곳에 있었던 데서 洞名이 유래.
② 이곳에 들어오면 산도 맑고(山淸), 물도 맑고(水淸), 사람의 마음마저 맑아지기(人淸) 때문에, 세 가지가 맑다는 뜻의 三淸이라 함.
1396 : 漢城府 北部 鎭長坊
1751 : 北部 鎭長坊 鎭長坊契
1867 : 北部 鎭長坊 三淸洞契
1895 : 北署 鎭長坊 三淸洞契 三淸洞 · 八判洞
1911 : 京城府 北部 鎭長坊 三淸洞 · 八判洞
1914 : 三淸洞
1936 : 三淸町
1943 : 鐘路區 三淸町
1946 : 鐘路區 三淸洞



서린동(瑞麟洞)

유래 : 조선 건국 후 漢陽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中部 8坊의 하나인 瑞麟坊의 坊名을 그대로 洞名으로 한 것임.
1396 : 漢城府 中部 瑞麟坊
1751 : 中部 瑞麟坊 捕盜廳契 · 日影臺契 · 古索井契 · 砂器廛契 · 朴井契 · 典獄內契 · 後洞契, 澄淸坊 豆錫洞契
1895 : 中署 瑞麟坊 日影臺契 新作路 · 松橋 · 惠泉 · 避馬洞 · 廊後, 毛橋契 許屛,
古索井契 許屛 · 椎洞, 黃土峴契 避馬洞, 蛤洞契 毛橋, 砂器廛契 蛤洞 · 砂器廛洞, 富井洞契 富井洞, 典獄契 砂器廛洞 · 典獄後洞 · 紬廛洞 · 典獄前洞, 白木廛契 白木廛後洞
中署 澄淸坊 惠政橋契 豆錫洞
1911 : 京城府 中部 瑞麟坊 毛橋 · 典獄洞 · 椎洞 · 砂器廛洞 · 避馬洞 · 惠泉 · 白木廛洞 · 富井洞 · 松橋 · 許屛
1914 : 瑞麟洞
1936 : 瑞麟町
1943 : 鐘路區 瑞麟町
1946 : 鐘路區 瑞麟洞



세종로(世宗路)

   세종로는 1946년 동명 개정 때에 이곳이 우리나라 정치,행정의 중심지인 것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역대 왕중 업적이 가장 뛰어난 세종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동명이다.
   세종로는 북으로 경복궁과 청운동, 동쪽은 중학동과 종로1 · 2가동이, 남쪽은 서린동 정동 중구 무교동과 서쪽은 적선동 도렴동 신문로1가로 둘러싸여 있다.
   세종로동은 조선시대 옛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로와 도렴동이 이어지는 세종로81-3번지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 건축, 삼림 및 하천관리를 담당했던 공조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는 공후동(工後洞), 공조뒷골이라 하였다.
   신문로1가 1번지와 세종로202번지 사이에는 광제교(廣濟橋)가 있었으므로 인근의 마을은 광제교, 중구 태평로1가와 연결되는 광화문지하도 태흥빌딩쪽 출입구는 구서부동(舊西部洞, 구서붓골)이라 하였다. 191번지 현대빌딩의 당주동쪽은 당피동(唐皮洞, 당핏골), 도렴동 12번지와 이웃한 세종로쪽은 도렴서가 있다 하여 도렴서동(都染署洞, 도렴섯골), 세종로202번지 일대는 동령동(東嶺洞,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으로 되었다.
   현재 동아일보사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에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교보빌딩 뒤쪽을 주석전골?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고, 세종로 150번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는 노예의 송사(訟事)등을 맡은 장예원이 있었는데 1764년에 보민사로 고쳤으므로 그 일대를 보민동(保民洞, 보민삿골)로 불렀다. 사온동은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가 있었으므로 인근을 사온섯골 · 사온동이라 하였는데 정부종합청사 후문쪽 일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구 태평로 60-61번지에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과정인 사학 가운데 하나인 西學이 있었고, 이 근처에는 얕으막한 고개가 있었으므로 이를 서학현(西學峴, 서학재)라 하였는데 태평로 1가와 세종로의 경계부분에 해당된다.
   신문로1가 23번지에는 송기교(松杞橋)가 있었으므로 그 인근의 부락을 송기교(松杞橋, 송기다리)라 하였는데 근방에 가죽을 파는 송기전이 있었으므로 다리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방교(下芳橋)는 하방골
아래방골이라고도 하는데 신문로1가와 세종로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의 이름이 하방교이므로 인근의 마을은 하방골이라고 하였다.
   문화관광부와 미대사관이 있는 곳은 조선 초기에 손님 접대와 연향 및 종재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관청인 예빈시가 있었으므로 예빈동(禮賓洞, 예빈싯골)이라 하였다. 지금의 광화문로터리는 황토가 많은 얕으막한 고개로 되어있으므로 황토마루라 하였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 신문로1가, 태평로1가 어름에 있는 마을을 황토현(黃土峴, 황토마루)이라 불렀다.
청운동쪽의 물이 흘러내려 광화문 앞을 지나 중학동에서 삼청동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쳐지므로 세종로에는 여러 개의 교량이 있었다. 붕어다리는 魚橋라고도 부르는데 광화문 동쪽과 서쪽에 놓여진 다리를 말한다. 동쪽은 동붕어교, 서쪽은 서붕어교라고 하는데 御橋라던 것이 변하여 魚橋가 되고 다시 와전되어 붕어다리라고 했던 것 같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의 좌측에는 예조 · 중추부 · 사헌부 · 병조 · 형조 · 사역원 · 공조, 오른쪽에는 의정부 · 이조 · 한성부 · 호조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이 거리를 육조거리라 하였다.
   세종로 76번지에는 의정부가 있었다. 의정부는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였다. 한 때는 창덕궁 인정전 서쪽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의정부 대신 군국기무처에서 그 일을 대신하였는데 의정부 자리는 內部로 바뀌었다. 그 후 경기도청이 들어섰으며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한 후에는 치안본부에서 건물을 사용하였다. 다시 서울특별시 경찰국 제1별관으로 되다가 서울시경찰청을 내자동에 새로 신축, 이전해 감에 따라 1990년에 가로변시민공원 및 정부종합청사 이용차량의 주차장으로 조성되었다.
   세종로 149-150번지에는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고관으로 나이 70세 이상되면 입사시켜 때때로 잔치를 베풀며 즐겼다 기로소(耆老所)가 있었다.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西部 積善坊 · 餘慶坊, 中部 瑞麟坊 · 澄淸坊
1751 : 北部 觀光坊 觀光坊契 · 議政府內契, 西部 積善坊 唐皮洞契 · 工曹後洞契 · 司온洞契 · 都染洞契, 餘慶坊 新門內契
         · 長生洞契 · 豆錫契 · 海豊君契 · 西學洞契 · 內契 · 東嶺洞契,
         中部 瑞麟坊 日影臺契, 澄淸坊 豆錫洞契
1867 : 西部 積善坊 唐皮洞契 · 工曹後洞契, 餘慶坊 新門內契 · 豆錫洞契 · 海豊君契 · 西學洞契 · 西學內契 · 東嶺洞契,
         中部 澄淸坊 豆錫洞契, 瑞麟坊 日影臺契
1895 : 北署 觀光坊 東十字橋契 水門洞, 內部契 禮賓洞
         西署 積善坊 黃土峴契 三澗洞 · 保民洞, 工曹後洞契 工後洞, 都漆洞契 都漆洞, 司온署契 司온洞, 唐皮洞契 唐皮
         洞, 餘慶坊 長生洞契 松橋 · 東嶺洞, 西學峴契 西學洞, 廣濟橋契 舊西部洞, 海豊君契 下芳橋
         中署 瑞麟坊 日影臺契 新作路 · 松橋, 澄淸坊 豆錫洞契 豆錫洞, 上漁物廛契 豆錫洞, 惠政橋契 豆錫洞
1911 : 京城府 北部 禮賓洞 · 水門洞, 西部 保民洞 · 三澗洞 · 司온洞 · 都染洞 · 工後洞 · 舊西部洞 · 西學峴 · 下芳橋 ·
         唐皮洞 · 松橋,
         中部 廣濟橋 · 東嶺洞 · 豆錫洞 · 黃土峴 · 松橋
1914 : 光化門通
1943 : 鐘路區 光化門通
1946 : 鐘路區 世宗路



소격동(昭格洞)

유래 : 조선시대 이곳에 道敎의 大淸, 上淸, 玉淸 3位를 모신 三淸殿의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昭格署가 있었다 하여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 鎭長坊
1751 : 北部 觀光坊 觀光坊契, 鎭長坊 鎭長坊契
1867 : 北部 觀光坊, 鎭長坊 三淸洞契
1895 : 北署 觀光坊 大安洞契 大安洞 · 花開洞 · 昭格洞, 鎭長坊 三淸洞契 花開洞
1911 : 京城府 北部 觀光坊 大安洞契 大安洞 · 花開洞 · 昭格洞, 鎭長坊 三淸洞契 花開洞
1914 : 昭格洞
1936 : 昭格町
1943 : 鐘路區 昭格町
1946 : 鐘路區 昭格洞



송월동(松月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인 松亭洞의 ‘松’과 月岩洞의 ‘月’자를 따서 洞名을 붙임.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城外) 池下契 松亭洞 · 月岩洞 · 川邊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松亭洞 · 月岩洞 · 川邊洞
1914 : 松月洞
1936 : 松月町
1943 : 西大門區 松月町
1946 : 西大門區 松月洞
1975 : 鐘路區 松月洞



송현동(松峴洞)

유래 : 솔고개(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洞名이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1751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1895 : 北署 觀光坊 中學契 松峴 · 碧洞, 大安洞契 古里井洞 · 大安洞
1911 : 京城府 北部 觀光坊 松峴 · 碧洞 · 古里井洞 · 大安洞
1914 : 松峴洞
1936 : 松峴町
1943 : 鐘路區 松峴町
1946 : 鐘路區 松峴洞



수송동(壽松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인 壽洞과 松峴의 첫 자인 ‘壽’와 ‘松’을 각각 따서 壽松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中部 壽進坊?澄淸坊
1751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中部 壽進坊 濟用下契 · 松峴契 · 司僕川契
1867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中部 壽進坊 濟用下契 · 松峴契 · ?洞契, 澄淸坊 司僕川契
1895 : 北署 觀光坊 中學契 中學洞?松峴, 中署 壽進坊 壽進宮契 壽洞 · ?洞 · 槐井洞, 松峴契 松峴, 濟用監契 壽洞, 司僕契 壽洞, 澄淸坊 司僕契 司僕洞 · 中學橋
1911 : 京城府 中部 壽進坊 壽進宮契 壽洞??洞?槐井洞, 松峴契 松峴, 濟用監契 壽洞, 司僕契 壽洞, 澄淸坊 司僕契 司僕洞?中學橋, 北部 觀光坊 中學契 中學洞?松峴
1914 : 壽松洞
1936 : 壽松町
1943 : 鐘路區 壽松町
1946 : 鐘路區 壽松洞



숭인동(崇仁洞)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 초부터 있었던 漢城府 崇信坊과 仁昌坊의 첫 글자를 따서 붙였음.
1396 : 漢城府 東部 崇信坊?仁昌坊
1751 : 東部 崇信坊(城外) 崇信坊契, 仁昌坊(城外) 仁昌坊契
1867 : 東部 崇信坊(城外) 崇信洞契, 仁昌坊(城外) 仁昌洞契
1895 :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 穎眉洞 · 米廛洞 · 新設洞 · 藍橋, 仁昌坊(城外) 東門外契 藍橋 · 場巨里 · 東廟洞
1911 : 京城府 東部 仁昌面, 崇信面 穎眉洞 · 米廛洞 · 藍橋 · 場巨里 · 新設洞 · 東廟洞
1914 : 崇仁洞
1936 : 崇仁町
1943 : 東大門區 崇仁町
1946 : 東大門區 崇仁洞
1975 : 鐘路區 崇仁洞



신교동(新橋洞)

 신교동은 이 동의 70번지 신교소방관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 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수선전도」에도 표시가 되어있으나 『한경지략』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 『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교동은 조선 초기까지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으며 영조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로, 1867년에 만든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에 각각 속한 것으로 되어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상패계(上牌契) 신교(新橋)로 신교동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면서 경성부 북서 순화방 신교가 되었다가 이듬해 경성부 북부 신교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관내의 186개 동명칭을 새로 제정할 때 신교의 일부를 신교동(新橋洞)으로 하였다. 1936년 4월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과 동명의 개정으로 신교정(新橋町)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광복과 함께 서울의 각 동명을 우리말로 개정함에 따라 신교동으로 되었다.   신교동은 현재 청운동사무소의 행정관할을 받고 있다.
  1955년 4월 18일 동장관할구역의 행정동제가 실시되었다. 이 때 궁정동,신교동,청운동  일원과 세종로 1번지를 합쳐 자하궁(紫霞宮)의 이름을 따온 자하동(紫霞洞)으로 하였다. 1970년 5월 18일 자하동은 청운동으로 바뀌었으며 신교동은 이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교동에는 「우대」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서울의 양반이라는 뜻과 통한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성안을 크게 세 개의 마을로 나누어 각각 북촌,남촌,중촌이라 이르고 있었는데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 성 안, 곧 도성 안의 종로구 일대를 가리켰던 북촌에는 대체로 그 시대에 실권을 쥔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아 양반 동네로 통했다. 그 남쪽 성 안, 곧 도성 안의 중구 일대를 가리켰던 남쪽에는 대체로 벼슬자리가 당장엔 없거나 그리 높지 않은 관리들과 엄연히 양반이면서도 그 시대에는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했던 군인 계층들이 많이 살았다. 오늘의 청계천 언저리를 가리켰던 중촌에는 대체로 중인계층이, 그것도 오늘의 종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육의전언저리에서 장사하는 돈 많은 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우대라는 말은 바로 이 북촌,남촌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아래대,우대사람,우댓말,우대양반 등의 말과 함께 서울에서 널리 쓰여졌다. 『한국의 여로』라는 책에 「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래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우대는 아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및 북쪽 동네를 우대라고 했었다. 서울의 양반하면 우댓 양반을 치는데 상민하고 통틀어 '우대사람'이라면 서울 사람을 대표했었다. 우대 사람들은 우댓말을 써서 한강,용산,마포 등의 강변사람 또는 왕삽리 같은 미나리 장수와는 발음의 억양이 달랐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이 우댓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의 조심하면서 바로잡아주었다.


신문로1가(新門路1街)

유래 : 동리 서쪽 언덕 위에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되면서 새로 지어짐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新門’이라 한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積善坊, 仁達坊, 餘慶坊
1751 : 西部 仁達坊?積善坊 唐皮洞契, 餘慶坊 新門內契 · 長生洞契 · 繕工內契
1895 : 西署 仁達坊 夜珠峴契 燻造洞 · 夜珠峴, 積善坊 唐皮洞契 唐皮洞, 餘慶坊 新門內契 紫門洞 · 長生洞契 含春園 · 農圃洞 · 芳楸洞 · 備邊司 · 夜珠洞 · 廉井洞 · 松橋 · 上芳橋 · 五宮洞 · 亭子洞 · 中芳橋 · 園洞, 海豊君契 下芳橋 · 繕工監契 繕工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餘慶坊, 積善坊 上芳橋 · 中芳橋 · 繕工洞 · 園洞 · 廉井洞 · 備邊司 · 亭子洞 · 松橋 · 下芳橋 · 夜珠峴 · 唐皮洞 · 燻造洞 · 五宮洞
1914 : 西大門町1丁目
1943 : 鐘路區 西大門町1丁目
1946 : 鐘路區 新門路1街



신문로2가(新門路2街)

유래 : 동리 서쪽 언덕 위에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되면서 새로 지어짐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新門’이라 한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餘慶坊
1751 : 西部 餘慶坊 新門內契?長生洞契
1895 : 西署 餘慶坊 新門內契 紫門洞, 長生洞契 含春園 · 農圃洞 · 芳楸洞 · 五宮洞
1911 : 京城府 西部 餘慶坊 紫門洞 · 新門內 · 含春園 · 芳楸洞 · 長生洞 · 農圃洞 · 五宮洞
1914 : 西大門町2丁目
1943 : 鐘路區 西大門町2丁目
1946 : 鐘路區 新門路2街



신영동(新營洞)

유래 :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조선시대 5軍營의 하나인 摠戎廳의 청사를 영조 26년(1750)에 삼청동으로부터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일대로 신축,이전하였으므로, 새로(新) 지은 군영(營)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1751 : 北部 義通坊 造紙署契
1867 : 北部 常平坊 造紙署契
1895 : 北署 常平坊(城外) 經理廳契 新營洞
1911 : 京城府 恩平面 新營洞
1914 : 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新營里
1936 : 新營町
1943 : 西大門區役所 新營町
1946 : 西大門區 新營洞
1975 : 鐘路區 新營洞



안국동(安國洞)

유래 : 이곳이 조선시대 漢城府 北部 安國坊이었던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安國坊, 嘉會坊
1751 : 北部 安國坊 安國坊契, 嘉會坊 嘉會坊契
1895 : 北署 安國坊 小安洞契 小安洞 · 紅峴 · 安峴, 嘉會坊 齋洞契 紅峴 · 齋洞
1911 : 京城府 北部 嘉會坊, 安國坊 安峴 · 小安洞 · 紅峴 · 齋洞
1914 : 安國洞
1936 : 安國町
1943 : 鐘路區 安國町
1946 : 鐘路區 安國洞



연건동(蓮建洞)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 초부터 있었던 漢城府 東部 蓮花坊과 建德坊의 坊名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온 것임.
1396 : 漢城府 東部 建德坊, 蓮花坊
1751 : 東部 建德坊 於義洞契, 蓮花坊
1895 : 東署 蓮花坊 統左契 含春洞, 建德坊 於義洞契 新橋, 景二契 獨甲峴 · 果洞 · 南彌塔洞 · 盤松井洞 · 南墻洞 · 北墻洞
1911 : 京城府 東部 蓮花坊, 建德坊 果洞 · 墻洞 · 獨甲峴 · 盤松井洞 · 南彌塔洞 · 含春洞 · 新橋洞
1914 : 蓮建洞
1936 : 蓮建町
1943 : 鐘路區 蓮建町
1946 : 鐘路區 蓮建洞



연지동(蓮池洞)

유래 : 이곳에 도성의 東?西?南池 중 東池에 해당하는 큰 연못인 ‘蓮池’가 있었던 데서 연유됨.
1396 : 漢城府 東部 彰善坊 · 建德坊 · 蓮花坊
1751 : 東部 彰善坊 彰善坊契 · 建德坊 於義洞契 · 蓮花坊 蓮池洞契
1895 : 東署 彰善坊 於義洞契 蓮池洞, 蓮花坊 統左契 蓮池洞, 建德坊 於義洞契 蓮池洞 · 冷井洞
1911 : 京城府 東部 彰善坊, 蓮花坊, 建德坊 冷井洞 · 蓮池洞
1914 : 蓮池洞
1936 : 蓮池町
1943 : 鐘路區 蓮池町
1946 : 鐘路區 蓮池洞



예지동(禮智洞)

유래 : ① 인근에 조선시대 유학 교육기관인 東學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유학의 大綱인 仁義?孝悌?忠信?禮智의 이름을 따서 洞名이 유래.
② 이 부근 일대가 예로부터 큰 상가지대였던 만큼 商權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도 특별한 예절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생긴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蓮花坊
1751 : 東部 蓮花坊 蓮二契, 川邊契
1895 : 東署 蓮花坊 中路契 梨峴 · 石手房洞 · 玉房洞 · 田間洞 · 道德洞 · 孝橋 · 漆房洞 · 北川邊洞, 蓮二契 下避馬洞
1911 : 京城府 東部 蓮花坊 中學洞 · 山間洞 · 上川邊洞 · 玉房洞 · 漆房洞 · 石手房洞 · 孝橋 · 下避馬洞 · 梨峴
1914 : 禮智洞
1936 : 禮智町
1943 : 鐘路區 禮智町
1946 : 鐘路區 禮智洞



옥인동(玉仁洞)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옥인동은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 관할 하에 있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개편이 이루어졌을 때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준수방(俊秀坊) 사포서계(司圃署契) 인왕동(仁王洞),옥동(玉洞)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구획 및 洞,町,丁目의 명칭을 새로 제정함에 따라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 仁王洞과 玉洞을 합쳐 玉仁洞으로 하였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이 확장되고 동명 개정에 따라 옥인정(玉仁町)으로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鐘路區 玉仁町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 원칙에 따라 玉仁洞으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옥인동의 동명이 유래된 옥동은 옥류동(玉流洞) 혹은 옥골이라 불려지기도 하는데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있는 지역이다.   기록에 仁王洞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世宗 때부터인바 인왕동이란 지명은 세종 무렵부터 존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인왕동이란 지명은 어떻게 하여 생겼나가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인왕동과 관계 있는 것으로는 仁旺山과 仁王寺로 이들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므로 그 세가지는 상호간에 서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왕사는 太祖,成宗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사 福世庵과 금강굴(金剛窟)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仁旺山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로 이때는 서봉(西峯),서산(西山)이라는 명칭이었다. 인왕산의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광해군(光海君) 때로 「산에 옛날에는 仁王寺가 있어서 그 이름으로 되었다」고 하여 인왕사에서 인왕산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연유에서 본다면 옥인동 역시 仁王寺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데 아마도 仁王寺洞에서 仁王洞으로 변천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인왕산 중턱에는 웅장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어서 이를 병풍바위라 했고 그 아래에 우뚝 솟은 바위는 치마바위라 불렀는데 사직동의 치마바위에 얽힌 사연과 같다. 곧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부인 신씨(愼씨)는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 때 제일 먼저 피살되었는데 반정을 주도해온 박원종(朴元宗)등이 죄인의 딸은 왕비가 될 수 없다 하며 반대를 하자 궁궐로 들어가지 못한 채 인왕산 아래 살면서 중종을 그리워했다. 신씨는 중종이 날마다 경회루에서 인왕산 아래 옛집을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종을 시켜 자기가 입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이곳 바위에 걸쳐 놓음으로써 중종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산이 깊고 바위가 많은 곳에는 우물도 많이 있는 것이 보편적인데 옥인동의 경우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우선 47번지에 가재우물이 있는데 이곳의 석벽 및 가재 구멍 같은 데서 물이 나오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조그마한 우물 셋이 品字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이 가재우물 위에는 국자우물이 있었다. 똑같이 패인 바위 속에서 물이 솟아 나왔으므로 물을 퍼올릴 때는 국자나 국자처럼 생긴 두레박을 사용해야 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옥인동 65번지의 바닥우물은 우물 바닥이 암반으로 되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인근 일대의 개발로 수원이 메마르고 원형이 파괴되어 있다.



운니동(雲泥洞)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고개 이름인 雲峴과 泥洞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임. 雲峴은 교동초등학교 뒤에 있던 고개로, 이 고개가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려 ‘구름재’ 또는 ‘雲峴’이라 했다고도 하고, 이 고개 바로 북쪽에 書雲觀(觀象監)이 있어서 처음에는 고개 이름을 書雲觀嶺이라 했다가 조선 말에 雲峴 또는 觀峴으로 전화되어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泥洞은 이 지역의 땅이 몹시 질므로 ‘진골’ 또는 한자명으로 泥洞이라 했다.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古兵曹契 ·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1895 : 中署 貞善坊 敦寧契 泥洞, 舊兵曹契 泥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泥洞
1914 : 雲泥洞
1936 : 雲泥町
1943 : 鐘路區 雲泥町
1946 : 鐘路區 雲泥洞



와룡동(臥龍洞)

유래 : 이곳에 임금이 기거하던 昌德宮이 있으므로 나라의 祥瑞인 臥龍,鳳翼의 이름을 따온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水門洞契 · 林己孫契 · 金萬年契 · 古兵曹契 ·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1895 : 中署 貞善坊 金萬年契 麻洞 · 樓洞, 承文契 承文洞, 林己孫契 麻洞 · 樓洞, 敦寧契 泥洞 · 樓洞 · 承文洞, 農圃契 水門洞, 舊兵曹契 泥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麻洞 · 樓洞 · 承文洞 · 泥洞 · 水門洞
1914 : 臥龍洞
1936 : 臥龍町
1943 : 鐘路區 臥龍町
1946 : 鐘路區 臥龍洞



원남동(苑南洞)

유래 : ⓛ 昌慶苑의 남쪽에 있다 하여 洞名이 유래.
② 조선시대에 있던 함춘원의 남쪽에 있다하여 유래. 그 이전 지명으로 巡邏洞?含春洞,麻井洞,相思洞 등이 있었음.
1396 : 漢城府 東部 蓮花坊
1751 : 東部 蓮花坊 蓮池洞契
1895 : 東署 蓮花坊 統右契 承文洞 · 新民洞 · 甘井洞 · 壺洞 · 相思洞 · 巡邏洞, 統左契 麻田井洞 · 含春洞 · 蓮池洞
1911 : 京城府 東部 壺洞 · 相思洞 · 甘井洞 · 承文洞 · 新民洞 · 麻井洞 · 含春洞 · 蓮池洞 · 巡邏洞
1914 : 苑南洞
1936 : 苑南町
1943 : 鐘路區 苑南町
1946 : 鐘路區 苑南洞



원서동(苑西洞)

유래 : ① 昌慶苑 서쪽에 있다 하여 유래.
② 昌德宮 後苑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北部 廣化坊, 陽德坊
1751 : 北部 廣化坊 廣化坊契, 陽德坊 陽德坊契
1867 : 北部 廣化坊 花洞契, 陽德坊 桂生洞契
1895 : 北署 陽德坊 桂生洞契 桂洞, 廣化坊 觀峴契 觀峴 · 苑洞
1911 : 京城府 北部 陽德坊, 廣化坊 苑洞 · 觀洞 · 桂洞
1914 : 苑洞
1936 : 苑西町
1943 : 鐘路區 苑西町
1946 : 鐘路區 苑西洞



이화동(梨花洞)

유래 :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정자의 이름인 梨花亭에서 유래. 梨花亭은 봄이면 정자 주위가 배꽃으로 둘러 싸였으므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東部 崇信坊
1895 : 東署 崇信坊 景二契 雙溪洞 · 梨花亭洞 · 長生殿洞
1911 : 京城府 崇信面 雙溪洞 · 梨花亭洞 · 長生殿洞 · 壺洞
1914 : 梨花洞
1936 : 梨花町
1943 : 鐘路區 梨花町
1946 : 鐘路區 梨花洞



익선동(益善洞)

유래 : ①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益洞에서 ‘益’자를 따고, 조선 초기에 漢城府 中部 貞善坊 관할이었으므로 이 坊名에서 ‘善’자를 따서 붙인 이름.
② 1914년에 동리 명칭을 새로 제정하면서 "예전보다 더 좋은"이라는 뜻으로 益善이라 함.
③ 益洞은 조선 철종의 生父인 全溪府院君의 사당이었던 樓洞宮이 이곳에 있었으며, 이 누동궁에는 대문 좌우쪽으로 있는 줄행랑, 즉 益廊이 많았으므로 ‘익랑골’이라 하던 것이, 익낭동(益廊洞)에서 어느 사이엔가 익동(益洞)으로 고쳐짐.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1751 : 中部 貞善坊 敦寧府上契 · 敦寧府下契
1895 : 中署 貞善坊 敦寧契 敦寧洞 · 漢洞 · 益洞 · 樓洞 · 宮洞 · 泥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漢洞 · 敦寧洞 · 樓洞 · 益洞 · 宮洞 · 泥洞
1914 : 益善洞
1936 : 益善町
1943 : 鐘路區 益善町
1946 : 鐘路區 益善洞



인사동(仁寺洞)

  仁寺洞은 조선시대 中部 寬仁坊의 「仁」자와 大寺洞의 「寺」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漢京識略』卷2 各洞條를 보면 「大寺洞은 곧 塔寺洞인데 옛날에는 圓覺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石塔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때에는 大寺洞과 「塔寺洞」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사동은 조선초기까지는 漢城府 中部 寬仁坊과 堅平坊 관내였다.
  1910년 10월 1일 京城府 중부 관인방과 견평방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중부 대사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 원동 각 일부를 합쳐 仁寺洞으로 하였다. 동년 9월 29일에는 경성부 북부출장소 인사동이 되었으며 이듬해 6월1일 경성부 인사동으로 되었다. 1936년 4월 1일 京城府 仁寺町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에는 鍾路區 仁寺町으로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종로구 인사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여러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仁寺洞은 大寺洞에서부터 동명 유래가 되는데 댓절골, 寺洞 등의 이름으로도 불려졌으며 지금의 인사동과 관훈동 사이에 걸친 마을이다. 큰 절인 圓覺寺가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인사동을 塔洞, 寺洞, 塔寺洞이라는 명칭으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은 大光明殿을 비롯하여 400여칸 규모의 원각사에 딸린 석탑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 현존하는 이 석탑은 원각사가 낙성된 후에 세워졌고 이때부터 大寺洞이라는 동명보다 塔과 관련된 동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인사동은 일제말부터 골동품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960∼1970년대에 걸쳐 성시를 이루었다.



인의동(仁義洞)

유래 : 成均館의 아래쪽에 있고 四學의 하나인 東學이 있으므로 유학의 大綱인 孝悌,忠信,仁義,禮智의 이름을 따서 仁義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東部 蓮花坊
1751 : 東部 蓮花坊 蓮池洞契 · 蓮三契
1895 : 東署 蓮花坊 統右契 登子洞, 統左契 蓮池洞, 中路契 梨峴, 蓮三契 後井洞 · 新基洞
1911 : 京城府 東部 蓮花坊 登子洞 · 新基洞 · 碑石洞 · 嘉井洞 · 後井洞 · 蓮池洞
1914 : 仁義洞
1936 : 仁義町
1943 : 鐘路區 仁義町
1946 : 鐘路區 仁義洞



장사동(長沙洞)

유래 : 청계천 쪽의 沙土가 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長沙洞의 洞名이 생겨남.
1396 : 漢城府 中部 長通坊
1751 : 中部 長通坊 廣州主人契, 義城正契
1895 : 中署 長通坊 義城正契 中部洞 · 下板橋 · 板井洞 · 河橋, 廣州主人契 中部洞 · 上板橋 · 帽谷洞
1911 : 京城府 中部 長通坊 義城正契 中部洞 · 下板洞 · 板井洞 · 河橋 · 上板洞 · 帽谷洞
1914 : 長沙洞
1936 : 長沙町
1943 : 鐘路區 長沙町
1946 : 鐘路區 長沙洞



재동(齋洞)

유래 :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 잿골이란 동리 이름은 首陽大君이 韓明澮 등과 함께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단종 1년(1453)에 단종이 그 누이 惠敬公主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 무사들을 이곳에 매복시키고 단종을 보필하던 皇甫仁 등을 유인 참살하여,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마을사람들이 집안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으므로, 이후부터 이곳을 재를 덮은 마을, 잿골(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齋洞으로 바뀐 것임.
1396 : 漢城府 北部 嘉會坊
1751 : 北部 嘉會坊 嘉會坊契
1867 : 北部 嘉會坊 齋洞契
1895 : 北署 嘉會坊 齋洞契 齋洞 · 紅峴 · 孟峴 · 東谷
1911 : 京城府 北部 嘉會坊 齋洞契 齋洞 · 紅峴 · 孟峴 · 東谷
1914 : 齋洞
1936 : 齋洞町
1943 : 鐘路區 齋洞町
1946 : 鐘路區 齋洞



적선동(積善洞)

유래 : 이 지역이 조선시대 漢城府 西部 積善坊이었기 때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됨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積善坊
1751 : 西部 仁達坊 內需司契, 積善坊 사온동契 · 十字閣契
1867 : 西部 仁達坊 內需司契 · 사온동契 · 十字閣契
1895 : 西署 仁達坊 內需司契 宗橋, 長興庫契 長興庫洞, 積善坊 十字橋契 魚橋, 사온동契 사온동, 月宮洞契 月宮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內需司契 · 長興庫契, 積善坊 都染洞契 · 十字橋契 · 사온동契 · 月宮洞契
1914 : 積善洞
1936 : 積善町
1943 : 鐘路區 積善町
1946 : 鐘路區 積善洞



종로1가(鐘路1街)

   종로1가의 동명은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의 첫머리에 있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종로1가는 조선시대에 시전상가가 형성되었던 곳이므로 대부분 상업과 관련된 옛 지명이 많다.
   紬廛洞은 명주를 파는 전이 있고 일명 명주전골이라고도 하였다. 상사동은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골목을 좁게 만들어서 사복시에서 기르는 상사마가 암내를 맡고 뛰면 이 골목으로 몰아넣고 붙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상삿골, 또는 상동이라고도 부렀다.
  豆錫洞은 주석을 파는 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주석전골이라고도 불렀고 세종로 근방에 있었던 마을이다.
  외상사동은 청진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상삿골의 바깥쪽이 되므로 바깥상삿골이라고도 불렀다. 허병동(許屛洞)은 서린동과 종로1가에 걸쳐있던 마을이다.
   피맛골은 하관이 말을 타고 큰 길을 가다가 상관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길가에 엎드리고 있음으로써 예절을 지켰다. 그러나 걷는 시간보다 말에서 내려 엎드리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 관아에서는 지각사태가 생기고 업무마저 지체하기 일쑤였다. 말에서 내려 피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종로 한쪽 길에 면한 행랑 뒤쪽에 겨우 말 한 마리가 지나다닐만한 골목길을 만들고 하관이나 서민들은 이 길로 다니게 함으로써 상관을 만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잇게 하였다. 큰 길을 가다가도 높은 사람의 행차를 멀리서 보면 말머리를 이 골목으로 돌렸기에 피마동(避馬洞)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혜천(惠泉)골은 종로1가와 서린동에 걸쳐잇던 마을로 혜전교우물, 두께우물, 상상골우물이라 부르던 우물이 있으므로 혜정교우물골 또는 혜천동으로 불렀다.
   광화문우체국 북쪽에서 흘러내린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데 종로쪽에 놓인 다리가 혜정교(惠政橋) 혹은 복청교(福淸橋)이고 그 남쪽에 놓인 다리는 모교(毛橋)이다. 꾸밈없는 평면의 돌다리인데 이곳에서 탐관오리에 대한 처형을 시행하였다. 팽형(烹刑) 또는 부형(釜刑)이라고 하는 이 형벌은 끓는 가마솥물에 죄인을 담그고 삶는 공개형이었다. 법전에 있는 성문화된 형이 아니라 관습화된 사형(私刑)인데 한말까지 시행되어 외국인이 목격하고 견문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혜정교에서 시행된 팽형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에게 가하는 제재형인 동시에 부정부패를 제거한다는 통치이념을 백성에게 과시하는 전시효과적 의미가 있었다. 육조거리와 백성이 많이 집결하는 종로거리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청(右捕廳) 앞이므로 공개 형터로는 최상의 장소로 인정되어 혜정교에서 탐관오리의 처형을 시행하였다.
   조개전골은 종로1가와 서린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조개전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 합동(蛤洞)이라고도 하였다.
   우포도청은 현재 종로1가 89번지 관화문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일명 포청이라고도 하였는데 도둑이나 범죄자를 잡기위해 둔 관청이다. 설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설치 논의는 문종 원년(1451)부터 있었다. 형조, 의금부, 한성부 등 포도(捕盜) 업무 집행기관이 있는데 포도군의 별도 설치는 민폐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실현되지 못하다가 연산군 때 서울 안팎으로 도둑이 많아 임시로 포도관과 포도장 등을 임명하였다. 중종 때 와서 포도청을 설치하여 당시 서울의 치안을 위해 도둑과 범죄자를 잡고 야경순찰을 맡아 보았는데 갑오개혁(1894) 때 폐지되고 경무청으로 이관되었다.
   육의전터는 종로1가 54번지, 2가14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국가에서 경영하던 여섯가지 종류의 도매상점으로 일명 육주비전, 육부전, 육분전, 육장전 등으로 불렀다.

1396 : 漢城府 中部 澄淸坊 · 瑞麟坊
1751 : 中部 澄淸坊 豆錫洞契, 瑞麟坊 日影臺契 · 古索井契 · 沙器廛契 · 鐘樓西邊契
1867 : 中部 澄淸坊 豆錫洞契 · 司僕前契 · 司僕川邊契 · 鐘懸屛門契, 壽進坊 相思洞契, 瑞麟坊 日影臺契 · 古索井契 · 沙器廛契 · 鐘樓西邊契
1895 : 中署 瑞麟坊 日影臺契 惠泉 · 避馬洞, 毛橋契 許屛, 古索井契 許屛, 黃土峴契 避馬洞, 沙器廛契 蛤洞, 典獄契 紬廛洞, 澄淸坊 司僕契 相思洞, 豆錫洞契 豆錫洞, 惠政橋契 豆錫洞, 堅平坊 壽洞契 外相洞
1911 : 京城府 中部 瑞麟坊, 堅平坊, 澄淸坊 紬廛洞 · 豆錫洞 · 避馬洞 · 惠泉 · 相思洞 · 外相思洞 · 黃土峴 · 許屛 · 蛤洞
1914 : 鐘路1丁目
1943 : 鐘路區 鐘路1丁目
1946 : 鐘路區 鐘路1街



종로2가(鐘路2街)

유래 : 종로의 두 번째 거리가 된다 하여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慶幸坊 · 長通坊 · 堅平坊
1751 : 中部 慶幸坊 吳順德契, 貞善坊 布廛契, 長通坊 紙廛一契 · 紙廛二契, 丁萬石契, 鹽廛契, 堅平坊 典醫監洞契 · 中魚物廛一牌契 · 中魚物廛二牌契
1867 : 中部 慶幸坊 吳順德契, 長通坊 紙廛一契 · 紙廛二契 · 丁萬石契 · 鹽廛契, 堅平坊 典醫監洞契 · 中魚物廛一牌契
1895 : 中署 堅平坊 典洞契 典洞, 典醫監契 典洞, 鉢里廛契 鉢里洞, 魚物廛契 里門洞 · 香井洞 · 水典洞 · 承洞, 里門洞契 里門洞, 慶幸坊 吳順德契 校洞, 塔洞契 校洞 · 塔洞, 布屛契 校洞 · 塔洞,
長通坊 丁萬石契 東谷 · 鞋廛後洞 · 靑布後洞 · 鹽洞, 徐千壽契 東谷 · 鹽洞 · 鐵物橋 · 笠洞, 笠洞契 布屛洞
1911 : 京城府 中部 長通坊, 堅平坊, 慶幸坊 鐵物橋 · 靑布後洞 · 鞋廛後洞 · 鹽洞 · 東谷 · 笠洞 · 布屛洞 · 典洞 · 里門洞 · 香井洞 · 水典洞 · 承洞 · 塔洞 · 校洞 · 鉢里洞
1914 : 鐘路2丁目
1943 : 鐘路區 鐘路2丁目
1946 : 鐘路區 鐘路2街



종로3가(鐘路3街)

유래 : 종로에서 세번째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貞善坊 · 慶幸坊 · 長通坊
1751 :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慶幸坊 吳順德契, 長通坊 琵琶洞契 · 廣州主人契 · 笠廛契 · 義城正契 · 徐千壽契
1867 :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慶幸坊 吳順德契, 長通坊 琵琶洞契 · 廣州主人契 · 笠廛契 · 義城正契
1895 : 中署 貞善坊 大廟洞契 廟洞, 金萬年契 大廟洞, 長通坊 徐千壽契 笠洞, 笠洞契 布屛洞 · 帽谷洞, 笠廛契 避馬洞, 義城正契 避馬洞 · 中部洞 · 下板橋, 廣州主人契 中部洞 · 上板洞 · 帽谷洞 · 琵琶洞, 慶幸坊 洞口契 紬洞 · 校洞, 吳順德契 校洞, 塔洞契 橋洞
1911 : 京城府 中部 貞善坊, 慶幸坊, 長通坊 避馬洞 · 布屛洞 · 琵琶洞 · 帽谷洞 · 上板橋 · 中部洞 · 校洞 · 紬洞 · 廟洞 · 下板橋 · 笠洞
1914 : 鐘路3丁目
1943 : 鐘路區 鐘路3丁目
1946 : 鐘路區 鐘路3街



종로4가(鐘路4街)

유래 : 종로에서 네 번째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蓮花坊
1751 : 東部 蓮花坊 中路契 · 蓮二契 · 蓮三契
1895 : 東署 蓮花坊 中路契 梨峴 · 孝橋, 蓮二契 下避馬洞 · 廟洞 · 二橋, 蓮三契 後井洞, 彰善坊 於義洞契 二橋
1911 : 京城府 東部 蓮花坊 廟洞 · 下避馬洞 · 後井洞 · 梨峴 · 孝橋 · 二橋
1914 : 鐘路4丁目
1943 : 鐘路區 鐘路4丁目
1946 : 鐘路區 鐘路4街



종로5가(鐘路5街)

유래 : 종로에서 다섯 번째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彰善坊, 建德坊
1751 : 東部 彰善坊 彰善坊契 · 小川邊契, 建德坊 於義洞契
1867 : 東部 彰善坊 彰善洞一契 · 小川邊契, 建德坊 於義洞契
1895 : 東署 彰善坊 於義洞契 二橋 · 於義洞 · 蓮池洞, 午橋契 下大井洞 · 上北川邊洞 · 下北川邊洞 · 下大井洞, 建德坊 於義洞契 蓮池洞
1911 : 京城府 東部 彰善坊, 建德坊 於義洞 · 下大井洞 · 下川邊洞 · 上大井洞 · 二橋 · 蓮池洞
1914 : 鐘路5丁目
1943 : 鐘路區 鐘路5丁目
1946 : 鐘路區 鐘路5街



종로6가(鐘路6街)

유래 : 종로에서 여섯번째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
1396 : 東部 彰善坊, 建德坊
1751 : 東部 彰善坊 東學洞契 · 東學內契, 建德坊 於義洞契
1895 : 東署 彰善坊 東學契 島村?養士洞 · 東學洞, 建德坊 於義洞契 · 杵橋
1911 : 京城府 中署 彰善坊 養士洞 · 東學洞 · 島村 · 杵橋洞
1914 : 鐘路6丁目
1943 : 鐘路區 鐘路6丁目
1946 : 鐘路區 鐘路6街



중학동(中學洞)

유래 : 지금의 중학동 88번지에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으로 四部學堂의 하나인 中部學堂, 곧 中學이 자리하고 있었던 데에 연유.
1396 : 漢城府 北部 觀光坊 · 嘉會坊
1751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 觀光坊契, 嘉會坊 嘉會坊契
1867 : 北部 觀光坊 中學內契 · 部契, 嘉會坊 齋洞契
1895 : 北署 觀光坊 東十字橋契 水門洞, 內部契 東谷, 中學契 中學洞 · 松峴 · 碧洞, 嘉會坊 齋洞契 東谷
1911 : 京城府 北部 觀光坊 中學橋洞 · 東谷 · 松峴 · 碧洞 · 水門洞
1914 : 中學洞
1936 : 中學町
1943 : 鐘路區 中學町
1946 : 鐘路區 中學洞



창성동(昌成洞)

 창성동(昌成洞)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성동(昌成洞)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온데서 유래된다.
  창성동은 조선 초기까지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로 되어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백구동(白狗洞),창성동(昌成洞),간곡(間谷),옥정동(玉井洞),대동(帶洞),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장동,간곡으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북부 옥정동(玉井洞),간곡(間谷),창성동(昌成洞)과 대동(帶洞),장동(壯洞),백구동(白狗洞) 각 일부를 합쳐 창성동으로 하였다. 1936년 4월 경성부 창성정(昌成町)이 되었다. 1943년 6월 종로구 창성정이 되었다가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을 우리의 고유한 이름으로 바꿀 대 종로구 창성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가운데 옥정동(玉井洞)은 일명 더운우물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달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더우므로 더운우물이라 하며, 또는 우물이 맑고 달아서 옥로수(玉露水)와 같다 하여 옥정(玉井)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帶洞)은 창성동과 통의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띠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여졌고 띳골이라고도 하였다. 범솟골이란 마을이 白狗洞(흰갯골) 서쪽에 있었는데, 수목이 많아서 범이 소롤 많이 잡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창신동(昌信洞)

유래 : 조선 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坊 가운데 仁昌坊과 崇信坊에서 각각 ‘昌’자와 ‘信’자를 따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 崇信坊
1751 : 東部 崇信坊(城外) 崇信坊契, 仁昌坊(城外) 仁昌坊契
1867 : 東部 崇信坊(城外) 崇信洞契, 仁昌坊(城外) 仁昌洞契
1895 :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 紅樹洞 · 伏車洞 · 藍橋 · 堂峴 · 大井洞 · 穎眉洞 · 亭子洞 · 新里?紫芝洞 · 仁壽洞, 仁昌坊(城外) 東門外契 藍橋 · ?井洞 · 伏車洞
1911 : 京城府 東部 崇信面 穎眉洞 · 藍橋 · 紫芝洞 · 亭子洞 · 城底洞 · 新村 · 堂峴洞 · 仁壽洞 · 伏車洞 · 紅樹洞 · 大井洞, 仁昌面 ?魚井洞 · 伏車橋
1914 : 昌信洞
1936 : 昌信町
1943 : 東大門區 昌信町
1946 : 東大門區 昌信洞
1975 : 鐘路區 昌信洞



청운동(淸雲洞)

 청운동(淸雲洞)의 동명은 이곳에 원래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 글자를 따온 데서 유래된다.
 청운동은 조선 초기까지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지역이었다가 영조(英祖)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가 되었고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로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때에는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신교(新橋),백운동(白雲洞),박정동(朴井洞),청풍계(淸風溪) 지역이었다. 1910년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에서 경성부(京城府) 북부(北部)로 바뀌었고 1914년 4월 1일에는 경성부(京城府)의 행정구획과 동의 명칭을 새로 제정함에 따라 경성부(京城府) 북부(北部) 백운동(白雲洞),청풍동(淸風洞)과 박정동(朴井洞),신교(新橋) 각 일부를 합쳐서 청운동(淸雲洞)으로 하였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 청운정(淸雲町)이 되고 1943년 6월 10일 경성부(京城府) 종로구(鐘路區) 청운정(淸雲町)이 되었다. 광복으로 종래의 행정구역명을 우리 말로 개정하게 됨에 따라 1946년 10월 1일 다시 청운동(淸雲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운동의 동명이 유래한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은 도성 북쪽 인왕산(仁旺山)과 백악(白岳) 사이 자하문(紫霞門;창의문(彰義門)) 고개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깊은 계곡에 맑은 水石이 淸風과 함께 상상 白雲으로 덮혀 있었다. 백운동에는 조선 초기 중추부(中樞府)의 이의념(李義念)이 살자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성의 서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도 높지 않고 골짜기도 그렇게 깊지 않지만 푸른 송림(松林) 사이로 맑은 냇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맑은 하늘에는 아침 저녁으로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이 아름다워 주변의 경관과 함께 어우러지므로 옛날부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隱居消暢(은거소창)하던 곳이었다. 청풍계(淸風溪),세심대(洗心臺),유란동(幽蘭洞),도화동(桃花洞),대은암(大隱岩),만리뇌(萬里瀨) 등이 모두 이 부근에 있던 명소였다. 그 중에도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아우 청음(淸陰)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었던 청풍계(淸風溪)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문인과 명사가 자주 찾던 청풍계 일대도 일제의 강점에 의해 그 면모가 크게 변하였다. 삼정회사(三井會社;미쓰이)가 이곳을 차지하고 마음대로 자연과 고적을 훼손하였다. 시내를 메우고 바위를 깨뜨려 새로 집을 지었고, 단 한 채 남은 태고정(太古亭) 옛 건물도 인부들의 숙소로 일시 사용되었다. 천유대(天遊臺),청풍대(淸風臺)라 부르던 곳으로 「大明日月」「百世淸風」의 큰 글자를 새겼던 바위마저 수난을 겪어 「百世淸風」의 刻字만이 청풍동 52-58번지 개인주택 담장안의 암벽에 남아 있다. 단지 1935년 유지 이윤영(李潤榮)이 태고정터 뒤로 청운양로원을 짓고 부근의 자연풍경을 보호하기에 힘쓴 결과 양로원 뒤 山谷間의 자연풍경이 일부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 자리는 농상소(農桑所)로 농사시험소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설치된 농상아문(農商衙門) 농상국(農桑局) 관하에 있었는데 1923년에 경기도립상업학교(현 경기상업고등학교)와 1921년에 제2고등보통학교(1951년에 경복고등학교로 개칭)가 설립되면서 일부 묘목원(苗木園)은 경복고등학교 부속 온실로 사용하였다. 묘목원이라고도 부르던 농상소의 식물원은 창경원 온실에 버금갈 정도로 종류와 수가 많았는데 차츰 청량리 임업시험장으로 옮겨가고 농상소의 나머지 부지를 학교 시설물로 사용하였다.
  청운동 4번지 청운노인정 뒤에는 말빠진골이라는 골짜기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청풍교 근처에서 낳은 아이는 젖먹이로서 행동이 너무나 비범하므로 나라에서 알면 멸문(滅門)을 당할까 두려워 부모가 아이를 억지로 죽인지 사흘만에 용마가 나와 울면서 집 근처를 돌고 인왕산을 뛰어다니다가 칠성대(七星臺) 아래 높이 솟은 바위 틈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백운동은 인왕산 동쪽 밑에 있는 마을로 골이 그윽하고 수석이 아름다워 서울에서 경치 좋기로 첫째 삼청동(三淸洞), 둘째 인왕동(仁旺洞), 셋째 쌍계동(雙溪洞), 넷째 백운동(白雲洞), 다섯째 청학동(靑鶴洞)이라 하였다.
  창의동(彰義洞)은 청운동 일대를 일컫는데 창의문 안쪽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으로도 불렀으며 줄여서 장동(壯洞)이라고도 한다.   청풍계에 있던 다리는 청풍교, 청운초등학교 앞의 다리는 청운교라 불렀으나 지금은 일대의 하천 모두가 복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경복고등학교(청운동 89-1)가 있는 곳은 조선말에 孝谷 또는 쌍효자거리,쌍효자가(雙孝子街)로 불렸는데 오늘날 효자동(孝子洞)의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본관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오른쪽에 「雲江臺」라고 새겨진 나지막한 바윗돌이 있다. 雲江이란 선조(宣祖) 때 승지를 지낸 조원(趙瑗;1544~?)의 아호로 그가 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새겨진 것이다.
  창의문(彰義門)은 경복궁의 主山인 백악상(白嶽山)의 서쪽에 위치하며 태조(太祖) 5년(1396)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건축되었다. 자핫골에 있어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문 밖의 지형이 지네 모양으로 되었으므로 그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네의 상극인 나무로 만든 닭을 문위에 걸었다 한다. 창의문은 태종(太宗) 13년(1413)에 풍수학자 최장선(崔揚善)이 백악산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경복궁의 양 팔과 같으므로 동령에 있는 숙청문(肅淸門)과 서령에 있는 창의문은 함께 폐쇄해야 한다고 상언하여 일시 폐문되었지만 궁장(宮墻)축조와 같은 국가의 대역(大役)이 있을때에는 역력(役力)의 감소를 위하여 창의문을 열고 통행을 허락하였다.   1956년의 창의문 보수공사 때에는 영조(英祖) 17년의 창의문 건립과정을 기록하여 둔 墨書가 장여(長茹)에서 나왔다. 이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창의문 문루는 영조 17년(1741) 6월 16일 구성임(具聖任)에 의해 상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의문의 건축양식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남대문,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지었다. 건물의 양식이나 수법은 小門을 대표하던 소의문(昭義門)과 동일하다.   서울 성곽 4小門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잔존 상태인 창의문 목조문루는 견고하고 튼튼하게 짜여졌으며 石門은 아담하다.   청운동 89번지 경기상업고등학교는 유란동(幽蘭洞)으로 청송당(聽松堂)이 있었다. 청송당은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形影相隨(형영상수)하던 집우(執友)로 율곡학파를 함께 이루어 놓은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부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1493~1564)의 독서당이었다. 조광조의 제자인 청송이 중중(中宗) 21년(1526) 봄에 기묘사화(1519)로 스승을 비롯한 많은 士友들이 사약을 받는 등 화를 입자 出仕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념하기 위해 집 뒤에 자그마한 크기의 書室로 지은 것이 청송당이었다. 청송당이란 이름은 청송의 부친 대사헌 성세순(成世純;1463~1514)의 막객(幕客)이며 기묘명현중의 하나인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이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옛날 장동(壯洞)의 청운동 123번지에서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거장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탄생하였다. 본관이 연일(延日)이고 자는 계함(季涵)이다.   정철은 인종의 귀인이던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류(瑠)의 부인이던 둘째누이로 인해 자주 궁중에 출입하였다. 156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관직생 활이 시작되었으나 1578년 진도군수(珍島郡守) 이주(李銖)의 뇌물사건으로 東人의 공격을 받아 벼슬을 빼앗겼다. 그 후 강원도관찰사로 복직되어 강원도,전라도,함경도 등지에 부임하면서 산수를 노래한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을 지었다. 형조,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강화 송정촌(松亭村)에서 살다가 1593년에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이 터는 현재 청운초등학교의 부지로 사용하고 있다.
  1986년 8월 30일 개통된 자하문길은 청운초등학교에서 너널간과 세검정로터리에서 터널간의 폭4~15m의 도로를 25~29m의 6차선 도로로 확정하고 연장 2,060m의 도로를 낸 것이다. 터널이름을 처음에는 청운터널이라 하다가 자하문기로가 일치시켜 자하문터널로 변경하였다.



청진동(淸進洞)

유래 : 조선시대에 이곳이 漢城府 中部 澄淸坊과 壽進坊의 일부였으므로 坊名에서 한 자씩 따온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中部 澄淸坊, 壽進坊, 堅平坊
1751 : 中部 壽進坊 壽進宮內契 · 相思洞契 · 司僕前契 · 上米廛契, 堅平坊 禁府後洞契
1895 : 中署 堅平坊 上米廛契 上米廛前洞 · 上米廛後洞, 壽洞契 外相洞, 禁府契 禁府後洞, 澄淸坊 相洞契 相洞, 司僕契 相思洞, 壽進坊 壽進宮契 壽洞, 司僕契 壽洞, 濟用監契 壽洞, 相洞契 相洞
1911 : 京城府 中部 堅平坊, 壽進坊, 澄淸坊 米廛洞 · 相洞 · 壽進洞 · 外相思洞 · 相思洞 · 禁府後洞
1914 : 淸進洞
1936 : 淸進町
1943 : 鐘路區 淸進町
1946 : 鐘路區 淸進洞



체부동(體府洞)

유래 : 이곳에 體察使府 혹은 體府廳이라는 관청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順化坊
1751 : 北部 順化坊 司宰監契
1867 : 北部 順化坊 司宰監下牌契
1895 : 北署 順化坊 司宰監下牌契 九曲洞 · 體府洞 · 樓閣洞
1911 : 京城府 北部 順化坊 司宰監下牌契 九曲洞 · 體府洞 · 樓閣洞
1914 : 體府洞
1936 : 體府町
1943 : 鐘路區 體府町
1946 : 鐘路區 體府洞



충신동(忠信洞)

유래 : ⓛ 洞의 서북쪽에 조선시대 儒學의 최고 교육기관인 成均館이 있고, 동쪽으로는 四部學堂의 하나인 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 하여 유학의 8大綱目인 仁義禮智孝悌忠信을 각 두 글자씩으로 洞名을 만듦.
② 1914년 京城府의 洞名 제정 때 坊名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忠信洞의 일부 지역이 조선시대 崇信坊에 해당되므로 ‘崇’과 의미가 비슷한 ‘忠’을 써서 忠信洞이 됨.
1396 : 漢城府 東部 建德坊
1751 : 東部 建德坊 於義洞契
1895 : 東署 建德坊 於義洞契 杵橋 · 新橋 · 經基洞 · 長垣洞, 崇信坊 景二契 長生殿洞
1911 : 京城府 東部 建德坊 於義洞契 杵橋 · 新橋 · 經基洞 · 長垣洞 · 長生殿洞
1914 : 忠信洞
1936 : 忠信町
1943 : 鐘路區 忠信町
1946 : 鐘路區 忠信洞



통의동(通義洞)

유래 : 조선시대 이곳이 漢城府 北部 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通儀坊으로 바뀐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順化坊
1751 : 北部 義通坊 迎秋門契, 順化坊 司宰監契
1867 : 北部 義通坊 迎秋門契, 順化坊 司宰監上牌契
1895 : 北署 通義坊 彰義宮契 彰義洞 · 西門洞, 順化坊 司宰監上牌契 帶洞, 司宰監下牌契 壯洞 · 梅洞
1911 : 京城府 北部 通義坊 彰義洞 · 西門洞, 順化坊 梅洞 · 帶洞 · 壯洞
1914 : 通義洞
1936 : 通義町
1943 : 鐘路區 通義町
1946 : 鐘路區 通義洞



통인동(通仁洞)

 통인동(通仁洞)의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 옛 마을의 하나인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 통곡(通谷)과 인왕산(仁旺山)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데서 유래되었다.
  통인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 관할이었다가 1894년 갑오개혁시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준수방(俊秀坊) 사포서계(司圃署契) 인왕동(仁王洞),옥동(玉洞),통곡(通谷)이 되었다.
 1915년 6월 1일자로 경성부(京城府) 통동(通洞)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경성부 통인정(通仁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4월 1일 종로구 통인정으로 되었다가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칭에 따라 통인정은 통인동(通仁洞)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인동을 이룬 통곡(通谷)은 통골이라고도 하며 사포서(司圃署)가 있는 마을은 사포동(司圃洞),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옥동(玉洞) 혹은 옥류동(玉流洞)이라 하였다.
  통인동 137번지 일대는 조선 제 4대왕 세종(世宗;1397~1450)의 탄생지이다. 세종은 태조 6년(1397) 4월 10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였는데 이 탄생지에는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난 지금은 메워져 찾아볼 수 없고 주변은 길가에 면한 상가와 주택가로 어우러져 있다. 세종은 당시 태종이 세자(世子)로 있었기 때문에 궁(宮)이 아닌 사저(私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통인동 154번지는 1930년대 우리나라 국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상(李箱;1910~1937)이 자랐던 곳이다.



팔판동(八判洞)

유래 : 조선시대 이곳에 8명의 判書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北部 鎭長坊
1751 : 北部 鎭長坊 鎭長坊契
1789 : 北部 鎭長坊 三淸洞契
1867 : 北部 鎭長坊 三淸洞契
1895 : 北署 鎭長坊 三淸洞契 八判洞
1911 : 京城府 北部 鎭長坊 三淸洞契 八判洞
1914 : 八判洞
1936 : 八判町
1943 : 鐘路區 八判町
1946 : 鐘路區 八判洞



평동(平洞)

유래 : ①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자연부락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이 지역이 鞍山과 仁王山 사이에 낀 盆地形 지대로 지대가 낮고 평탄하므로, '原' '벌'이라는 의미의 '平'을 붙여 동명을 붙임.
② 1914년 경성부의 洞 · 町의 명칭을 개정할 때 居平洞을 줄여 平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 池下契 平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平洞
1914 : 平洞
1936 : 平洞町
1943 : 西大門區 平洞町
1946 : 西大門區 平洞
1975 : 鐘路區 平洞



평창동(平倉洞)

유래 : 지금의 평창동 156번지 일대에 宣惠廳의 平倉과 330번지 일대에 摠戎廳의 平倉 등 2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1751 : 北部 義通坊 宣惠廳契
1867 : 北部 常平坊 宣惠廳契
1895 : 北署 常平坊(城外) 宣惠廳契 平倉
1911 : 京城府 恩平面 平倉
1914 : 京畿道 高陽郡 恩平面 平倉里
1949 : 西大門區 平倉里
1950 : 西大門區 平倉洞
1975 : 鐘路區 平倉洞



필운동(弼雲洞)

유래 : 이곳에 있던 동리 弼雲臺에서 연유하고, 弼雲臺라는 명칭은 仁王山의 별칭인 弼雲山에서 비롯됨.
1396 : 漢城府 西部 仁達坊
1751 : 西部 仁達坊 分繕工內契 · 社稷洞契 · 壽城宮內契 · 內需司契
1867 : 西部 仁達坊 社稷洞契 · 壽城宮內契 · 內需司契 · 壽城宮越邊契
1895 : 西署 仁達坊 內需司契 都家洞, 社稷洞契 社稷洞, 壽城宮契 松木洞 · 都家洞 · 南征峴, 分繕工契 塡井洞 · 弼雲臺 · 龜洞
1911 : 京城府 西部 仁達坊 弼雲臺 · 龜洞 · 塡井洞 · 大口都家洞 · 都家洞 · 松木洞 · 南征峴 · 社稷洞
1914 : 弼雲洞
1936 : 弼雲町
1943 : 鐘路區 弼雲町
1946 : 鐘路區 弼雲洞



행촌동(杏村洞)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에 따라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西部 盤松坊의 銀杏洞과 新村洞에서 각각 ‘杏’자와 ‘村’자를 따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 池下契 谷井洞 · 銀杏洞 · 新村洞 · 御水井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新村洞 · 銀杏洞 · 谷井洞 · 御水井洞
1914 : 杏村洞
1936 : 銀杏町
1943 : 西大門區 銀杏町
1946 : 西大門區 杏村洞
1975 : 鍾路區 杏村洞



혜화동(惠化洞)

유래 :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 4小門 가운데 하나인 惠化門이 있었던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崇敎坊 · 崇信坊
1751 : 東部 崇敎坊 成均館契 · 崇敎一契, 崇信坊 崇信坊契
1895 : 東署 崇敎坊 成均館契 宋洞, 景一契 上土橋, 崇信坊 景一契 上橋 · 宋洞, 景二契 土橋 · 上柏洞
1911 : 京城府 崇信面 宋洞 · 上土橋 · 下土橋 · 上柏洞
1914 : 惠化洞
1936 : 惠化町
1943 : 鐘路區 惠化町
1946 : 鐘路區 惠化洞



홍지동(弘智洞)

유래 : 蕩春臺城의 관문인 弘智門에서 비롯됨.
1396 : 漢城府 北部 義通坊
1751 : 北部 義通坊 經理廳契 · 造紙署契
1867 : 北部 常平坊 造紙署契 · 經理廳契
1895 : 北署 常平坊(城外) 經理廳契 弘智門內洞 · 三芝洞 · 南門洞
1911 : 京城府 恩平面 三芝洞 · 南門洞 · 弘智門內洞
1914 : 高陽郡 恩平面 弘智里
1936 : 弘智町
1943 : 西大門區 弘智町
1946 : 西大門區 弘智洞
1975 : 鐘路區 弘智洞



홍파동(紅把洞)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紅門洞과 把撥洞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붙임.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 池下契
1895 : 西署 盤松坊(城外) 池下契 紅門洞 · 新村洞 · 御水井洞 · 月岩洞 · 把撥洞 · 川邊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新村洞 · 川邊洞 · 御水井洞 · 紅門洞 · 把撥洞 · 月岩洞
1914 : 紅把洞
1936 : 紅把町
1943 : 西大門區 紅把町
1946 : 西大門區 紅把洞
1975 : 鐘路區 紅把洞



화동(花洞)

유래 : ① 조선시대 이곳에 掌苑署가 있어 화초를 재배하므로 花開洞, 줄여서 花洞이라 함.
② 옛날 이곳에 화약을 저장하는 火藥庫나 이를 관리하는 부서 火器都監이 있어서, 火器와 음이 비슷한 花開洞으로 전칭된 후 이를 줄여 花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北部 嘉會坊 · 安國坊 · 觀光坊
1751 : 北部 嘉會坊 嘉會坊契, 安國坊 安國坊契, 觀光坊 議政府內契
1867 : 北部 嘉會坊 齋洞契, 安國坊 安國洞契, 觀光坊 議政府內契
1895 : 西署 觀光坊 內部契 東谷, 大安洞契 花開洞, 安國坊 小安洞契 小安洞 · 紅峴, 嘉會坊 齋洞契 紅峴 · 東谷
1911 : 京城府 北部 觀光坊, 安國坊, 嘉會坊 東谷 · 紅峴 · 小安洞
1914 : 花洞
1936 : 花洞町
1943 : 鐘路區 花洞町
1946 : 鐘路區 花洞



효자동(孝子洞)

 효자동(孝子洞)의 동명은 이곳에 있던 원래의 자연부락 효곡(孝谷)에서 유래되었다.
  효자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지역이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효곡(孝谷), 신교(新橋), 육상궁동(毓祥宮洞), 온정동(溫井洞), 동곡(東谷), 백구동(白狗洞)과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장동(壯洞)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행정구획과 동명칭이 새로 제정되어 북부 효곡과 백구동,동곡,육상궁동,장동,온정동,신교 각 일부를 합쳐 효자동(孝子洞)을 신설하였다. 1936년 4월1일 경성부 효자정(孝子町)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종로구 효자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효자동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마을로는 효자로 이름이 났던 선조 때 학자인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가 살았던 효곡에서부터 비롯된다.
  효자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곳에는 더운우물이 있어서 더운우물골 혹은 온정동으로 불렀다. 효자동과 궁정동 사이를 지나는 도로 한가운데쯤 되는 곳인데 겨울에도 우물물에서 더운 김이 올라 왔고 물의 온도가 따뜻하였으므로 더운우물이라 하였다.
  효자동,창성동,통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창의동(彰義洞)이라 하다가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이 되고 다시 장동(壯洞)으로 줄여서 불렀다. 지금의 효자로를 따라 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흰갯골 혹은 백구동(白狗洞)으로 불렀다. 경복궁 가까이에 있던 이 동네에서는 흰털을 가진 개를 많이 길렀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효자동의 동명은 환관의 집단 취락촌으로 고자의 별칭인 화자(火者)의 음이 전화하여 효자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들 환관은 모시던 임금이 병으로 퇴위하면 같이 물러나 궁궐 밖에서 살았으며 왕이 서거했을 때에도 관직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소복을 하였다. 이들 환관은 죽어서도 집단적으로 묻혔는데 조선말까지는 지금의 도봉구 쌍문동과 파주군 교하면, 양주군 장흥면 등지에 묘지군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의 거주지였던 효자동 일대에는 경복궁내에 조선총독부청사가 세워지면서 총독부 관사가 이곳에 세워졌고 일본인 거류집단지였던 원효로~효자동간을 잇는 전차노선이 지금의 효자로에 개설되면서부터 1968년 서울시 전역에서 전차궤도가 철거되기까지 시민,학생들이 세검정계곡의 맑은 물과 능금,자두 등의 꽃구경 또는 과일을 맛보기 위해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서 걸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효자동을 통과하였다.


효제동(孝悌洞)

유래 : ① 이곳에 父王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던 조선 효종의 潛邸(於義宮)가 있었던 데서 연유.
② 이 洞의 위쪽에는 成均館이 있고, 인접한 종로 6가에 4部學堂의 하나인 東學이 위치하여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 하여 유학의 大綱인 仁義,禮智,孝悌,忠信 등을 인용하여 孝悌洞이라 부름.
1396 : 漢城府 東部 彰善坊 · 建德坊
1751 : 東部 彰善坊 彰善坊契, 建德坊 於義洞契
1867 : 東部 蓮花坊 彰善坊 彰善洞一契, 建德坊 於義洞契
1895 : 東署 建德坊 於義洞契 內橋 · 新橋 · 槐泉洞 · 蓮池洞, 彰善坊 於義洞契 尙北洞 · 蓮池洞
1911 : 京城府 東部 彰善坊, 建德坊, 蓮花坊 內橋洞 · 槐泉洞 · 尙北洞 · 新橋洞 · 蓮池洞
1914 : 孝悌洞
1936 : 孝悌町
1943 : 鐘路區 孝悌町
1946 : 鐘路區 孝悌洞



훈정동(薰井洞)

유래 : 원래 지금의 종묘 앞 시민공원 안의 훈정동 66-5번지에 더운 우물골이 있었으므로 이를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蓮花坊, 中部 貞善坊
1751 : 東部 蓮花坊 蓮三契 · 宗廟洞契,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1867 : 東部 蓮花坊 蓮二契 · 蓮三契 · 宗廟洞契, 中部 貞善坊 大廟洞契 · 金萬年契
1895 : 東署 蓮花坊 蓮二契 廟洞, 蓮三契 大廟洞 · 後井洞, 統右契 巡羅洞, 中署 長通坊 中谷契 廟前洞, 貞善坊 大廟洞契 廟洞 · 太井洞, 金萬年契 大廟洞
1911 : 京城府 東部 廟前洞 · 巡羅洞 · 後井洞, 中部 太井洞 · 廟洞
1914 : 薰井洞
1936 : 薰井町
1943 : 鐘路區 薰井町
1946 : 鐘路區 薰井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