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鍾路區)
이 구의 종로 1가에 서울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종을 쳐서 알려주던 종루(鍾樓) 곧 보신각(普信閣)이 있으므로 종루가 있는 거리라는 뜻으로 종로라 하였다. 종루에서는 새벽4시경에 인정(人定), 저녁 10시경에 파루(罷漏)를 쳐서 도성의 출입을 통제했으므로 오늘날의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려 주는 곳이었다. 종로구는 서울의 종갓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양반 계층이 거주했는데, 인왕산 밑을 우대라 하고 북산 밑은 북촌, 낙산 밑은 동촌이라 했다. 1943년 6월에 종로구가 되었다.
가회동(嘉會洞)
견지동(堅志洞)
경운동(慶雲洞)
계 동(桂 洞)
공평동(公平洞)
관수동(觀水洞)
관철동(貫鐵洞)
관훈동(寬勳洞)
교남동(橋南洞)
교북동(橋北洞)
구기동(舊基洞)
궁정동(宮井洞)
권농동(勸農洞)
낙원동(樂園洞)
내수동(內需洞)
내자동(內資洞)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당주동(唐珠洞)
도렴동(都染洞)
돈의동(敦義洞)
동숭동(東崇洞)
명륜동1가(明倫洞1街)
명륜동2가(明倫洞2街)
명륜동3가(明倫洞3街)
명륜동4가(明倫洞4街)
묘 동(廟 洞)
무악동(毋岳洞)
봉익동(鳳翼洞)
부암동(付岩洞)
사간동(司諫洞)
사직동(社稷洞)
삼청동(三淸洞)
서린동(瑞麟洞)
세종로(世宗路)
소격동(昭格洞)
송월동(松月洞)
송현동(松峴洞)
수송동(壽松洞)
숭인동(崇仁洞)
신교동(新橋洞)
신문로1가(新門路1街)
신문로2가(新門路2街)
신영동(新營洞)
안국동(安國洞)
연건동(蓮建洞)
연지동(蓮池洞)
예지동(禮智洞)
옥인동(玉仁洞)
운니동(雲泥洞)
와룡동(臥龍洞)
원남동(苑南洞)
원서동(苑西洞)
이화동(梨花洞)
익선동(益善洞)
인사동(仁寺洞)
인의동(仁義洞)
장사동(長沙洞)
재 동(齋 洞)
적선동(積善洞)
종로1가(鐘路1街)
종로2가(鐘路2街)
종로3가(鐘路3街)
종로4가(鐘路4街)
종로5가(鐘路5街)
종로6가(鐘路6街)
중학동(中學洞)
창성동(昌成洞)
창신동(昌信洞)
청운동(淸雲洞)
청진동(淸進洞)
체부동(體府洞)
충신동(忠信洞)
통의동(通義洞)
통인동(通仁洞)
팔판동(八判洞)
평 동(平 洞)
평창동(平倉洞)
필운동(弼雲洞)
행촌동(杏村洞)
혜화동(惠化洞)
홍지동(弘智洞)
홍파동(紅把洞)
화 동(花 洞)
효자동(孝子洞)
효제동(孝悌洞)
훈정동(薰井洞)
유래 :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北部 10坊 중의 하나인 嘉會坊에서 유래. |
유래 : 조선시대 中部 8坊의 하나인 堅平坊에 있는 義禁府에서 재판할 때 뜻을 굳게 가지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유래. |
유래 : 조선시대 이 지역은 中部 8坊의 하나인 慶幸坊에 속하였으므로 여기서 '慶'자를 따고, 또 부근에 있는 雲峴宮의 '雲'자를 따서 붙인 이름. |
유래 : 원래 이곳에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이던 濟生院이 있어서 濟生洞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桂生洞이라 불리기도 하다가, 1914년 洞名 제정때 桂生洞의 발음이 妓生洞과 비슷하다 하여 桂洞으로 줄여 부르게 된 것임. |
유래 : 堅志洞 동명 유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지역이 中部 8坊의 하나인 堅平坊에 속하였고, 이 堅平坊에 있던 義禁府에서 재판을 행할 때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 |
유래 : 융희 4년(1910)에 청계천 위에 가설하였던 ‘觀水橋’라는 아름다운 다리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 또한 이 관수교의 다리 이름은 이곳에 청계천의 준설사업을 위한 상설기관인 濬川司(지금의 관수동 152?153번지 일대 위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水位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얻어짐.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貫子洞의 ‘貫’자와, 그 북쪽에 있던 다리 이름인 鐵物橋의 ‘鐵’자를 합한 것임. |
유래 : 조선시대 이 지역이 中部 8坊의 하나인 寬仁坊에 속하였으므로 여기서 '寬'자를 따고, 또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忠勳府內契 · 勳洞에서 '勳'자를 따온 것임. |
유래 :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 북쪽, 곧 교남파출소 앞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다리의 남쪽 동네를 橋南洞, 북쪽을 橋北洞이라 한데서 유래. |
유래 : 교남동과 연접된 지점인 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는 북쪽 동네라 하여 동명이 유래. 지금의 교남동 100번지로 교남파출소 앞에 돌다리가 있어 다리의 북쪽을 교북동, 남쪽을 교남동이라 한데서 비롯됨. |
유래 : 전에 '구텃굴'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무엇에 대한 구터인지 그 연원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음. |
궁정동은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의 상궁동(毓祥宮洞),동곡(東谷),온정동(溫井洞),신교(新橋),박정동(朴井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宮"자와 온정동,박정동의 '井'자를 따서 궁정동(宮井洞)이라 하였다. 궁정동은 조선초까지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었으며 1914년 4월1일 육상궁동,동곡,온정동,신교,박정동의 각 일부를 합쳐 궁정동을 신설하였다. 1936년 4월 1일 궁정동은 궁정정(宮井町)으로 변경되었다. 1943년 6월10일에는 구제도를 신설하였는데 도성 안에 있던 궁정동은 종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에 따라 궁정정은 궁정동으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1955년 4월 18일 행정동제가 실시됨에 따라 청운동,신교동,궁정동 일원 및 세종로 1번지를 합하여 자하동(紫霞洞)이라 하였다. 1970년 5월 18일 궁정동,신교동,청운동,세종로1번지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청운동사무소가 설치되어 행정을 맡고 있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박정동(朴井洞)이라고도 한다. 육상궁골은 육상궁동이라고도 하는데 육상궁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청와대 옆 경농제(慶農齊) 앞에는 우리나라 8도의 모양을 따라 여덟배미의 논을 만들어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팔도배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택가와 도로로 바뀌었다. 궁정동의 동명이 유래된 육상궁은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를 향사(享祀)하는 사당이다. 경종이 후사없이 재위 4년만인 1704년에 승하하자 이복 동생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가문과 출신자랑을 일삼던 당시에 궁중의 하인격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를 생모로 한 영조의 한스러움과 생모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였다. 숙종 44년(1718)에 이미 세상을 떠난 숙빈을 위해 영조는 호조판서에 명하여 생모의 신위를 모실 육상궁을 짓게 하고 그 기둥과 문 모양 등을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종묘와 똑같이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비(正妃)가 아닌 숙빈의 사당을 종묘와 똑같이 지을 수가 없어 고심하다가 집터를 깎아내어 평지보다 낮게하고 그 외의 칫수는 종묘와 같이 하였다. 1908년에 서울의 모든 사묘(私廟)를 철폐할 때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연우궁(延祐宮),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선희궁(宣嬉宮), 정조의 후궁 육빈박씨(毓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을 합사하여 「6宮」으로 되었다. 1929년 고종의 후궁 엄씨(嚴氏)의 덕안궁(德安宮)까지 옮겨와 속칭 「7宮」이라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상 북악산 기슭 가운데 가장 집터가 빼어난 곳은 역시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북쪽으로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내려다보게 되므로 私家가 들어서기 힘들었을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조선 전기부터 행세하던 사대부들이 터잡고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육상궁 북쪽에 있는 대은암(大隱岩)이다. 중종대의 대학자 어숙권(魚淑權)은 대은암이 있는 대은암동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지정(南止亭) 곤(袞;1471~1527)이 백악산록에 짐을 지으니 그 북쪽 동산은 천석(泉石)의 빼어남이 있었다. 박읍취헌(朴읍翠軒)은(誾;1479~1504)이 매양 이용제(李容齊) 荇(행;1478~1534)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가서 놀았는데 止亭은 승지로 새벽에 들어가서 밤에 돌아오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읍취헌이 장난으로 그 바위를 대은(大隱)이라하고 그 시내를 만리(萬里)라 하였다. 대개 그 바위가 주인이 알아주는 바 되지 못하니 그런 까닭으로 대은이 되는 것이며 시내는 만리 밖 멀리에 있는 것 같다 해서 일컬었다.」궁정동에는 서울의 진산인 북악 상봉에는 백악신(白岳神)과 삼각신(三角神)을 모신 백악신사가 있었다. 조선 초부터 내려오다가 고종 때 폐지되었다. 육상궁 뒤쪽에 있는 석벽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의 꽃구경은 장관이므로 영조,정조,순조,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둥하였다. |
유래 : ① 채소 재배를 권장하는 農圃署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勸農洞이라 함. |
樂園洞은 1914년 4월 1일 동명 제정에 따라 이전 中部 慶幸坊 校洞, 塔洞, 於義洞, 紬洞의 각 일부와 貞善坊의 漢洞과 寬仁坊의 圓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시내 중앙의 낙원지라 할만한 탑골공원이 있으므로 樂園洞이라는 洞名이 새로 생겨난 것이다.
1910년 10월 1일 漢城府는 京城府로 바뀌고 경기도의 관할지역으로 격하되었다 이듬해 4월 1일에는 경성부의 행정조직을 5部 8面制로 바꿈에 따라 낙원동은 中部로 도성안 지역이 되었다. |
유래 :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미곡,포목,잡물,노비 등을 조달하는 관아인 內需司가 있었으므로 그 명칭이 유래. |
유래 :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쌀,밀가루,술,기름,채소,과실,잔치,직조 등의 공급을 담당하는 관아인 內資寺가 있으므로 그 명칭이 유래. |
누상동은 1914년 4월 1일 경성부(京城府)의 동명을 새로 재정 실시함에 따라 누각동의 위쪽에 위치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의 누각동(樓閣洞)의 일부를 누상동이라 하였다. |
누하동 1914년 4월 1일 경성부제(京城府制)의 실시에 따라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오거리(五巨里),남척동(南隻洞),송목동(松木洞),장성동(長城洞),유목동(柳木洞),복정동(福井洞),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래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唐皮洞의 ‘唐’자와 夜珠峴의 ‘珠’자를 따서 붙임. |
유래 : 朝鮮時代 궁중에서 필요한 직조물의 염색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는 관아인 都染署가 있었던 데서 유래.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 명칭인 敦寧洞과 於義洞의 이름을 따 붙인데서 유래. |
유래 : 崇敎坊 동쪽에 있는 洞이라 하여 東崇洞의 동명이 유래. |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儒學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
유래 : 1936년 4월 1일 동명을 개정하면서 유학 교육기관인 明倫學院이 있는 洞이라 하여 비롯됨. |
유래 : 조선시대 역대 왕 및 그 配位의 神位를 봉안하고 제사드리는 宗廟에서 가깝다는 데에서 洞名이 유래. |
유래 : 1975년 서대문구에 속해 있던 峴底洞 중 義州路 동쪽 지역을 종로구로 편입하면서 서울에서 개성-평양-의주로 연결되는 의주로의 무악재(毋岳峴)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동명임. |
유래 : ① 昌德宮 敦化門 앞에 위치하며 나라의 祥瑞인 臥龍과 鳳翼의 이름을 따서 유래. |
유래 : 지금의 부암동 134번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洞名이 유래. 부침바위는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 수대로 문질러 붙이면
손을 떼는 순간 암벽에 돌이 붙고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생김. |
유래 : 지금의 사간동 62번지에 조선시대 관청인 司諫院이 있었기 때문에 비롯됨. |
유래 : 지금의 사직동 1-28번지에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 |
유래 : ① 道敎의 太淸, 上淸, 玉淸 3位를 모신 三淸殿이 이곳에 있었던 데서 洞名이 유래. |
유래 : 조선 건국 후 漢陽으로 천도하여 구획했던 행정구역 가운데 中部 8坊의 하나인 瑞麟坊의 坊名을 그대로 洞名으로 한 것임. |
세종로는 1946년 동명 개정 때에 이곳이 우리나라 정치,행정의 중심지인 것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역대 왕중 업적이 가장 뛰어난 세종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동명이다. |
유래 : 조선시대 이곳에 道敎의 大淸, 上淸, 玉淸 3位를 모신 三淸殿의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昭格署가 있었다 하여 유래.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인 松亭洞의 ‘松’과 月岩洞의 ‘月’자를 따서 洞名을 붙임. |
유래 : 솔고개(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洞名이 유래.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위치하였던 동리인 壽洞과 松峴의 첫 자인 ‘壽’와 ‘松’을 각각 따서 壽松洞이라 함. |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 초부터 있었던 漢城府 崇信坊과 仁昌坊의 첫 글자를 따서 붙였음. |
신교동은 이 동의 70번지 신교소방관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 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수선전도」에도 표시가 되어있으나 『한경지략』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 『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교동은 조선 초기까지는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속하였으며 영조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로, 1867년에 만든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에 각각 속한 것으로 되어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상패계(上牌契) 신교(新橋)로 신교동의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면서 경성부 북서 순화방 신교가 되었다가 이듬해 경성부 북부 신교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관내의 186개 동명칭을 새로 제정할 때 신교의 일부를 신교동(新橋洞)으로 하였다. 1936년 4월1일 경성부의 관할구역과 동명의 개정으로 신교정(新橋町)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광복과 함께 서울의 각 동명을 우리말로 개정함에 따라 신교동으로 되었다. 신교동은 현재 청운동사무소의 행정관할을 받고 있다. 1955년 4월 18일 동장관할구역의 행정동제가 실시되었다. 이 때 궁정동,신교동,청운동 일원과 세종로 1번지를 합쳐 자하궁(紫霞宮)의 이름을 따온 자하동(紫霞洞)으로 하였다. 1970년 5월 18일 자하동은 청운동으로 바뀌었으며 신교동은 이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교동에는 「우대」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서울의 양반이라는 뜻과 통한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성안을 크게 세 개의 마을로 나누어 각각 북촌,남촌,중촌이라 이르고 있었는데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그 북쪽 성 안, 곧 도성 안의 종로구 일대를 가리켰던 북촌에는 대체로 그 시대에 실권을 쥔 높은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아 양반 동네로 통했다. 그 남쪽 성 안, 곧 도성 안의 중구 일대를 가리켰던 남쪽에는 대체로 벼슬자리가 당장엔 없거나 그리 높지 않은 관리들과 엄연히 양반이면서도 그 시대에는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했던 군인 계층들이 많이 살았다. 오늘의 청계천 언저리를 가리켰던 중촌에는 대체로 중인계층이, 그것도 오늘의 종로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육의전언저리에서 장사하는 돈 많은 상인들이 많이 살았다. 우대라는 말은 바로 이 북촌,남촌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아래대,우대사람,우댓말,우대양반 등의 말과 함께 서울에서 널리 쓰여졌다. 『한국의 여로』라는 책에 「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큰 개천(청계천)을 사이에 놓고 남쪽이 아래대인데 북쪽이 반드시 우대는 아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서쪽 및 북쪽 동네를 우대라고 했었다. 서울의 양반하면 우댓 양반을 치는데 상민하고 통틀어 '우대사람'이라면 서울 사람을 대표했었다. 우대 사람들은 우댓말을 써서 한강,용산,마포 등의 강변사람 또는 왕삽리 같은 미나리 장수와는 발음의 억양이 달랐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의 말이 우댓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의 조심하면서 바로잡아주었다. |
유래 : 동리 서쪽 언덕 위에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되면서 새로 지어짐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新門’이라 한데서 유래. |
유래 : 동리 서쪽 언덕 위에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되면서 새로 지어짐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新門’이라 한데서 유래. |
유래 :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조선시대 5軍營의 하나인 摠戎廳의 청사를 영조 26년(1750)에 삼청동으로부터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일대로
신축,이전하였으므로, 새로(新) 지은 군영(營)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 |
유래 : 이곳이 조선시대 漢城府 北部 安國坊이었던 데서 유래. |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 초부터 있었던 漢城府 東部 蓮花坊과 建德坊의 坊名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온 것임. |
유래 : 이곳에 도성의 東?西?南池 중 東池에 해당하는 큰 연못인 ‘蓮池’가 있었던 데서 연유됨. |
유래 : ① 인근에 조선시대 유학 교육기관인 東學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유학의 大綱인 仁義?孝悌?忠信?禮智의 이름을 따서 洞名이 유래. |
옥인동의 동명은 옥동(玉洞)과 인왕동(仁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
유래 :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고개 이름인 雲峴과 泥洞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임. 雲峴은 교동초등학교 뒤에 있던 고개로, 이 고개가 비만 오면 땅이 몹시 질퍽거려 ‘구름재’ 또는 ‘雲峴’이라 했다고도 하고, 이 고개 바로 북쪽에 書雲觀(觀象監)이 있어서 처음에는 고개 이름을 書雲觀嶺이라 했다가 조선 말에 雲峴 또는 觀峴으로 전화되어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泥洞은 이 지역의 땅이 몹시 질므로 ‘진골’ 또는 한자명으로 泥洞이라 했다. |
유래 : 이곳에 임금이 기거하던 昌德宮이 있으므로 나라의 祥瑞인 臥龍,鳳翼의 이름을 따온 데서 유래. |
유래 : ⓛ 昌慶苑의 남쪽에 있다 하여 洞名이 유래. |
유래 : ① 昌慶苑 서쪽에 있다 하여 유래. |
유래 : 지금 이화동 2번지에 있던 정자의 이름인 梨花亭에서 유래. 梨花亭은 봄이면 정자 주위가 배꽃으로 둘러 싸였으므로 붙인 이름. |
유래 : ①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益洞에서 ‘益’자를 따고, 조선 초기에 漢城府 中部 貞善坊 관할이었으므로 이 坊名에서 ‘善’자를 따서 붙인 이름. |
仁寺洞은 조선시대 中部 寬仁坊의 「仁」자와 大寺洞의 「寺」자를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 『漢京識略』卷2 各洞條를 보면 「大寺洞은 곧 塔寺洞인데 옛날에는 圓覺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石塔만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한경지략은 순조(1801∼1834)연간에 지어진 책인데 이때에는 大寺洞과 「塔寺洞」으로 혼용하여 불리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
유래 : 成均館의 아래쪽에 있고 四學의 하나인 東學이 있으므로 유학의 大綱인 孝悌,忠信,仁義,禮智의 이름을 따서 仁義洞이라 함. |
유래 : 청계천 쪽의 沙土가 長蛇形을 이루었으므로 그 뜻을 따서 長沙洞의 洞名이 생겨남. |
유래 :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 잿골이란 동리 이름은 首陽大君이 韓明澮 등과 함께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단종 1년(1453)에 단종이 그 누이 惠敬公主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 무사들을 이곳에 매복시키고 단종을 보필하던 皇甫仁 등을 유인 참살하여,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마을사람들이 집안에 있던 재를 가지고 나와 길을 덮었으므로, 이후부터 이곳을 재를 덮은 마을, 잿골(灰洞)이라 부르던 것이 齋洞으로 바뀐 것임. |
유래 : 이 지역이 조선시대 漢城府 西部 積善坊이었기 때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됨 |
종로1가의 동명은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의 첫머리에 있다하여 붙여진 것이다. |
유래 : 종로의 두 번째 거리가 된다 하여 유래. |
유래 : 종로에서 세번째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 |
유래 : 종로에서 네 번째 거리가 된다는 뜻에서 유래. |
유래 : 종로에서 다섯 번째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 |
유래 : 종로에서 여섯번째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 |
유래 : 지금의 중학동 88번지에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으로 四部學堂의 하나인 中部學堂, 곧 中學이 자리하고 있었던 데에 연유. |
창성동(昌成洞)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성동(昌成洞)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온데서 유래된다. 창성동은 조선 초기까지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로 되어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백구동(白狗洞),창성동(昌成洞),간곡(間谷),옥정동(玉井洞),대동(帶洞), 사재감하패계(司宰監下牌契) 장동,간곡으로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북부 옥정동(玉井洞),간곡(間谷),창성동(昌成洞)과 대동(帶洞),장동(壯洞),백구동(白狗洞) 각 일부를 합쳐 창성동으로 하였다. 1936년 4월 경성부 창성정(昌成町)이 되었다. 1943년 6월 종로구 창성정이 되었다가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을 우리의 고유한 이름으로 바꿀 대 종로구 창성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가운데 옥정동(玉井洞)은 일명 더운우물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달며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더우므로 더운우물이라 하며, 또는 우물이 맑고 달아서 옥로수(玉露水)와 같다 하여 옥정(玉井)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帶洞)은 창성동과 통의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띠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여졌고 띳골이라고도 하였다. 범솟골이란 마을이 白狗洞(흰갯골) 서쪽에 있었는데, 수목이 많아서 범이 소롤 많이 잡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유래 : 조선 초부터 있었던 한성부의 坊 가운데 仁昌坊과 崇信坊에서 각각 ‘昌’자와 ‘信’자를 따서 붙인 이름. |
청운동(淸雲洞)의 동명은 이곳에 원래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 글자를 따온 데서 유래된다. |
유래 : 조선시대에 이곳이 漢城府 中部 澄淸坊과 壽進坊의 일부였으므로 坊名에서 한 자씩 따온 데서 유래. |
유래 : 이곳에 體察使府 혹은 體府廳이라는 관청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 |
유래 : ⓛ 洞의 서북쪽에 조선시대 儒學의 최고 교육기관인 成均館이 있고, 동쪽으로는 四部學堂의 하나인 東學이 있었기 때문에 유학이 성하던 곳이라 하여 유학의 8大綱目인 仁義禮智孝悌忠信을 각 두 글자씩으로 洞名을 만듦. |
유래 : 조선시대 이곳이 漢城府 北部 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通儀坊으로 바뀐 데서 유래. |
통인동(通仁洞)의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 옛 마을의 하나인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준수방(俊秀坊) 통곡(通谷)과 인왕산(仁旺山)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데서 유래되었다. |
유래 : 조선시대 이곳에 8명의 判書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 |
유래 : ①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자연부락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이 지역이 鞍山과 仁王山 사이에 낀 盆地形 지대로 지대가 낮고 평탄하므로, '原'
'벌'이라는 의미의 '平'을 붙여 동명을 붙임. |
유래 : 지금의 평창동 156번지 일대에 宣惠廳의 平倉과 330번지 일대에 摠戎廳의 平倉 등 2개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
유래 : 이곳에 있던 동리 弼雲臺에서 연유하고, 弼雲臺라는 명칭은 仁王山의 별칭인 弼雲山에서 비롯됨. |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에 따라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西部 盤松坊의 銀杏洞과 新村洞에서 각각 ‘杏’자와 ‘村’자를 따서 붙인 이름. |
유래 : 성북구 삼선동과의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도성 4小門 가운데 하나인 惠化門이 있었던 데서 유래. |
유래 : 蕩春臺城의 관문인 弘智門에서 비롯됨. |
유래 : 1914년 洞名 개정 때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있던 동리인 紅門洞과 把撥洞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붙임. |
유래 : ① 조선시대 이곳에 掌苑署가 있어 화초를 재배하므로 花開洞, 줄여서 花洞이라 함. |
효자동(孝子洞)의 동명은 이곳에 있던 원래의 자연부락 효곡(孝谷)에서 유래되었다. 효자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지역이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漢城府) 북서(北署) 순화방(順化坊)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효곡(孝谷), 신교(新橋), 육상궁동(毓祥宮洞), 온정동(溫井洞), 동곡(東谷), 백구동(白狗洞)과 사재감상패계(司宰監上牌契) 장동(壯洞)이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의 행정구획과 동명칭이 새로 제정되어 북부 효곡과 백구동,동곡,육상궁동,장동,온정동,신교 각 일부를 합쳐 효자동(孝子洞)을 신설하였다. 1936년 4월1일 경성부 효자정(孝子町)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종로구 효자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효자동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의 마을로는 효자로 이름이 났던 선조 때 학자인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가 살았던 효곡에서부터 비롯된다. 효자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곳에는 더운우물이 있어서 더운우물골 혹은 온정동으로 불렀다. 효자동과 궁정동 사이를 지나는 도로 한가운데쯤 되는 곳인데 겨울에도 우물물에서 더운 김이 올라 왔고 물의 온도가 따뜻하였으므로 더운우물이라 하였다. 효자동,창성동,통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창의동(彰義洞)이라 하다가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이 되고 다시 장동(壯洞)으로 줄여서 불렀다. 지금의 효자로를 따라 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흰갯골 혹은 백구동(白狗洞)으로 불렀다. 경복궁 가까이에 있던 이 동네에서는 흰털을 가진 개를 많이 길렀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효자동의 동명은 환관의 집단 취락촌으로 고자의 별칭인 화자(火者)의 음이 전화하여 효자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들 환관은 모시던 임금이 병으로 퇴위하면 같이 물러나 궁궐 밖에서 살았으며 왕이 서거했을 때에도 관직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소복을 하였다. 이들 환관은 죽어서도 집단적으로 묻혔는데 조선말까지는 지금의 도봉구 쌍문동과 파주군 교하면, 양주군 장흥면 등지에 묘지군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의 거주지였던 효자동 일대에는 경복궁내에 조선총독부청사가 세워지면서 총독부 관사가 이곳에 세워졌고 일본인 거류집단지였던 원효로~효자동간을 잇는 전차노선이 지금의 효자로에 개설되면서부터 1968년 서울시 전역에서 전차궤도가 철거되기까지 시민,학생들이 세검정계곡의 맑은 물과 능금,자두 등의 꽃구경 또는 과일을 맛보기 위해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서 걸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효자동을 통과하였다. |
유래 : ① 이곳에 父王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던 조선 효종의 潛邸(於義宮)가 있었던 데서 연유. |
유래 : 원래 지금의 종묘 앞 시민공원 안의 훈정동 66-5번지에 더운 우물골이 있었으므로 이를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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