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中區)

광희동1가(光熙洞1街)  광희동2가(光熙洞2街)  남대문로1가(南大門路1街)  남대문로2가(南大門路2街)  남대문로3가(南大門路3街) 
남대문로4가(南大門路4街)  남대문로5가(南大門路5街)  남산동1가(南山洞1街)  남산동2가(南山洞2街)  남산동3가(南山洞3街) 
남창동(南倉洞)  남학동(南學洞)  다동(茶洞)  만리동1가(萬里洞1街)  만리동2가(萬里洞2街)  명동1가(明洞1街)  명동2가(明洞2街) 
무교동(武橋洞)  무학동(舞鶴洞)  묵정동(墨井洞)  방산동(芳山洞)  봉래동1가(蓬萊洞1街)  봉래동2가(蓬萊洞2街)  북창동(北倉洞) 
산림동(山林洞)  삼각동(三角洞)  서소문동(西小門洞)  소공동(小公洞)  수표동(水標洞)  수하동(水下洞)  순화동(巡和洞)  신당동(新堂洞) 
쌍림동(雙林洞)  예관동(藝館洞)  예장동(藝場洞)  오장동(五壯洞)  을지로1가(乙支路1街)  을지로2가(乙支路2街)  을지로3가(乙支路3街) 
을지로4가(乙支路4街)  을지로5가(乙支路5街)  을지로6가(乙支路6街)  을지로7가(乙支路7街)  의주로1가(義州路1街)  의주로2가(義州路2街) 
인현동1가(仁峴洞1街)  인현동2가(仁峴洞2街)  입정동(笠井洞)  장교동(長橋洞)  장충동1가(奬忠洞1街)  장충동2가(奬忠洞2街) 
저동1가(苧洞1街)  저동2가(苧洞2街)  정동(貞洞)  주교동(舟橋洞)  주자동(鑄字洞)  중림동(中林洞)  초동(草洞)  충정로1가(忠正路1街) 
충무로1가(忠武路1街)  충무로2가(忠武路2街)  충무로3가(忠武路3街)  충무로4가(忠武路4街)  충무로5가(忠武路5街) 
태평로1가(太平路1街)  태평로2가(太平路2街)  필동1가(筆洞1街)  필동2가(筆洞2街)  필동3가(筆洞3街)  황학동(黃鶴洞) 
회현동1가(會賢洞1街)  회현동2가(會賢洞2街)  회현동3가(會賢洞3街)  흥인동(興仁洞)  





 

광희동1가(光熙洞1街)

유래 : 도성 8문 가운데 하나인 光熙門이 있던 것에서 유래

  지번이 부여된 이래 주택지로 많은 사람들이 군거한 이 일대는 도성문인 광희문과 흥인지문 중간에 위치했던 까닭에 두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여각이 발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880년대 이래로 대거 진출한 일본인들이 충무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집단거주지를 형성하고 또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박문사(博文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면서부터 점차 일본인 중심 주거지로 바뀌어졌다. 반면 외곽지대인 성벽을 중심으로 해서는 한국인 빈민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광희동1가를 이룬 자연부락으로는 남소문동, 남정동, 석교동, 어교동, 쌍이문동이 있고,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오간수교 쪽을 향해 흐르며 개울을 형성했으므로 군데군데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漁橋洞은 광희동1가와 을지로5가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어청다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광희동1가 296번지와 오장동 193번지 경계에 있는 언청다리에서 유래된다. 이 다리가 놓인 곳의 지형이 언청이와 같이 생겼으므로 언청다리라 부르던 것을 음이 변하여 어청다리로 되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옮겨 於淸橋라 하다가 줄여서 於橋로 하였고 다시 漁橋로 되었다. 어교로 된 것은 붕어입과 언청이의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광희동1가와 광희동2가에 걸쳐 있던 石橋洞 역시 이곳에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하여 유래되었는데 이 돌ㅇ다리를 한자로 고친 것이 석교이고 다리 주변의 마을을 석교동 혹은 돌다릿골이라 하였다.
  광희동1가 194,195번지와 광희동2가 351번지를 연결하는 곳의 다리를 무당다리로 불렀다.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 흔적을 찾아볼수 없지만 장충동2가 부근에서 발원한 이 냇물은 제법 폭이 넓었으므로 다리 길이도 길었다.
  광희동1가는 190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집단거류민지역으로 바뀌면서 쌍림동과 묵정동 일대에 신정유곽단지를 만들어서 서울에서 최초로 매음을 시작하면서 그 동쪽지역인 이곳으로 한국인 중심의 유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1925년 10월1일 실시된 제1회 국세조사가 있다. 이에 의하면 광희동1가의 일본인수는 386명이고 한국인이 1,919명이었다.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雙門里洞契, 靑寧尉契, 水口門內契, 南小洞契
1867 : 南部 明哲坊 雙門里洞契, 靑寧尉契, 水口門內里契,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藍井洞 · 漁橋洞 · 南小洞, 水口川內契 石橋洞, 雙林洞契 雙林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漁橋洞 · 雙林洞 · 藍井洞 · 南小洞 · 石橋洞
1914 : 光熙町1丁目
1943 : 中區 光熙町1丁目
1946 : 中區 光熙洞1街




광희동2가(光熙洞2街)

유래 : 도성 8문 가운데 하나인 光熙門이 있던 것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 水口門內契 · 南小洞契
1867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水口門內里契 ·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水口川內契 石橋洞 · 裵洞 · 東山里洞 · 知禮洞 · 南城底洞 · 兄弟洞 · 谷井洞, 靑寧尉契 南小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石橋洞 · 裵洞 · 東山里洞 · 知禮洞 · 南小洞 · 兄弟洞 · 谷井洞 · 南城底洞
1914 : 光熙町2丁目
1943 : 中區 光熙町2丁目
1946 : 中區 光熙洞2街




남대문로1가(南大門路1街)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廣通坊 · 好賢坊 · 大平坊, 中部 長通坊 · 瑞麟坊
1751 : 南部 廣通坊 小多坊南邊契 · 好賢坊 小公洞契 · 大平坊 仇里峴契, 中部 長通坊 丁萬石契
1867 : 南部 廣通坊 小多坊南邊契 · 會賢坊 小公洞契 · 大平坊 九里介契, 中部 長通坊 丁萬石契
1895 : 中署 瑞麟坊 白木廛契 白木廛後洞 · 富井洞契 富井洞, 長通坊 丁萬石契 靑布後洞, 南署 廣通坊 茶洞契 下茶洞 · 美洞契 美洞, 會賢坊 美洞契 美洞 · 小公洞契 銅峴, 明禮坊 銅峴契 銅峴, 大平坊 大廣橋契 廣橋洞 · 寫字廳洞 · 席洞契 席洞 · 小廣橋契 小廣橋洞
1911 : 京城府 中部 瑞麟坊 富井洞 · 白木廛洞, 長通坊 靑布後洞, 南部 廣通坊 美洞 · 下茶洞, 太平坊 廣橋洞 · 大廣橋洞 · 小廣橋洞 · 席洞 · 寫字廳洞, 明禮坊 銅峴洞
1914 : 南大門通1丁目
1943 : 中區 南大門通1丁目
1946 : 中區 南大門路1街




남대문로2가(南大門路2街)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1751 : 南部 好賢坊 長興洞契 · 松峴契 · 小公洞契
1867 : 南部 會賢坊 長興洞契 · 松峴契 · 小公洞契
1895 : 南署 會賢坊 小公洞契 小公洞 · 銅峴洞, 松峴契 松峴洞, 大龍洞契 大龍洞, 小龍洞契 小龍洞, 長興洞契 長興洞, 明禮坊 銅峴契 銅峴洞, 小龍洞契 小龍洞, 大龍洞契 大龍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小龍洞 · 大龍洞 · 長洞 · 銅峴洞 · 松峴洞 · 小公洞
1914 : 南大門通2丁目
1943 : 中區 南大門通2丁目
1946 : 中區 南大門路2街




남대문로3가(南大門路3街)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西部 養生坊
1751 : 南部 好賢坊 長興洞契 · 松峴契, 西部 養生坊 倉洞契 · 太平洞契
1867 : 南部 會賢坊 長興洞契 · 松峴契, 西部 養生坊 倉洞契 · 太平洞契
1895 : 南署 會賢坊 水橋契 水橋洞 · 松峴契 松峴洞 · 會洞契 會洞 · 長興洞契 長興洞, 西署 養生坊 尙洞契 尙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水橋洞 · 松峴洞 · 長洞 · 會洞, 西部 養生坊 尙洞
1914 : 南大門通3丁目
1943 : 中區 南大門通3丁目
1946 : 中區 南大門路3街




남대문로4가(南大門路4街)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西部 養生坊 · 盤石坊
1751 : 南部 好賢坊, 西部 養生坊 太平館契 · 倉洞契, 盤石坊 蓮池契
1867 : 南部 會賢坊, 西部 養生坊 太平館契 · 倉洞契, 盤石坊 蓮池契
1895 : 南署 會賢坊 水橋契 水橋洞, 西署 養生坊 大平洞契 大平洞 · 生祠洞, 倉洞契 倉洞, 盤石坊 蓮池契 蓮池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水橋洞, 西部 養生坊 太平洞 · 生祠洞 · 倉洞, 盤石坊 蓮池洞
1914 : 南大門通4丁目
1943 : 中區 南大門通4丁目
1946 : 中區 南大門路4街




남대문로5가(南大門路5街)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蓮池契 · 桃楮洞契
1895 : 西署 盤石坊 蓮池契 陽洞 · 小里門洞 · 大里門洞 · 蓮池洞 · 藍井洞 · 盆洞 · 桃楮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蓮池洞 · 陽洞 · 大里門洞 · 小里門洞 · 盆洞 · 藍井洞 · 池下洞 · 桃楮洞
1914 : 南大門通5丁目 · 御成町
1943 : 中區 南大門通5丁目 · 御成町
1946 : 中區 南大門路5街 · 陽洞
1980 : 中區 南大門路5街 (陽洞 폐지,통합)




남산동1가(南山洞1街)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1751 : 南部 明禮坊 掌樂內契
1867 : 南部 明禮坊 掌樂院內契
1895 : 南署 明禮坊 南山洞契 南山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南山洞
1914 : 南山町1丁目
1943 : 中區 南山町1丁目
1946 : 中區 南山洞1街




남산동2가(南山洞2街)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1751 : 南部 明禮坊 掌樂內契
1867 : 南部 明禮坊 掌樂院內契
1895 : 南署 明禮坊 南山洞契 南山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南山洞
1914 : 南山町2丁目
1943 : 中區 南山町2丁目
1946 : 中區 南山洞2街




남산동3가(南山洞3街)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1751 : 南部 明禮坊 掌樂內契
1867 : 南部 明禮坊 掌樂院內契
1895 : 南署 明禮坊 南山洞契 南山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南山洞
1914 : 南山町3丁目
1943 : 中區 南山町3丁目
1946 : 中區 南山洞3街





남창동(南倉洞)

유래 : 조선 宣祖 때 大同米와 布錢의 출납을 위해 설치된 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곳의 남쪽이라고 한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養生坊
1751 : 西部 養生坊 倉洞契
1895 : 西署 養生坊 倉洞契 倉洞 · 尙洞契 尙洞
1911 : 京城府 西部 養生坊 倉洞 · 尙洞
1914 : 南米倉町
1943 : 中區 南米倉町
1946 : 中區 南倉洞





남학동(南學洞)

유래 : 조선 초 四部學堂의 하나인 南部學堂 즉 南學이 있었던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誠明坊 ·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鑄字洞契
1895 : 南署 薰陶坊 鑄洞契 鑄洞, 誠明坊 鑄洞契 南學洞 · 鑄洞
1911 : 京城府 薰陶坊 鑄洞, 誠明坊 南學洞
1914 : 日之出町
1943 : 中區 日之出町
1946 : 中區 南學洞





다동(茶洞)

  茶洞은 옛날 이 지역에서 차를 마시는 공식 예절(茶道)과 茶禮를 주관하던 司甕院(사옹원: 궁중에 음식 식품을 조달하던 관청)에 속한 茶房이 있었기 때문에 다방골이라 불렀던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 다방골을 한자로 고친 것이 茶洞이다.
  조선 태조(太祖) 3년(1394)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는데 이때 다동 일대는 광통방의 일부였다. 1914년 4월 南部 중다동과 모교 上茶洞 下茶洞 각 일부를 합쳐 다옥정(茶屋町)으로 하였고 1943년 새로 시행된 區制度에 의해 신설된 中區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고유의 우리말 명칭이나 관청, 선현의 이름, 아호에서 인용 변경한다는 원칙에 따라 茶洞으로 개칭되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곳 다동의 지형은 거북이 모양으로 옛날부터 전쟁 중에도 재해를 입거나 파괴, 화재 등이 일어난 적이 없으며 변란도 피해가는 지형이라 한다.

1396 : 漢城府 南部 廣通坊
1751 : 南部 廣通坊 大多坊北邊契 小多坊南邊契 毛廛契
1895 : 南署 廣通坊 茶洞契 上茶洞· 中茶洞 ·下茶洞, 中署 瑞麟坊 蛤洞契 毛橋
1911 : 京城府 南部 廣通坊 上茶洞 · 中茶洞 · 下茶洞, 中部 瑞麟坊 毛橋
1914 : 茶屋町
1943 : 中區 茶屋町
1946 : 中區 茶洞




만리동1가(萬里洞1街)

유래 : 萬里峴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되었으며, 만리재는 세종 때 文臣 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임.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藥田契 · 租田契
1895 : 西署 盤石坊 藥田契 中洞 · 租田契 東山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藥田中洞 · 東山洞
1914 : 蓬萊町3丁目
1943 : 西大門區 蓬萊町3丁目
1946 : 西大門區 萬里洞1街
1975 : 中區 萬里洞1街





만리동2가(萬里洞2街)

유래 : 萬里峴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되었으며, 만리재는 세종 때 文臣 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임.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租田契
1895 : 西署 盤石坊 租田契 東山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東山洞
1914 : 蓬萊町4丁目
1943 : 西大門區 蓬萊町4丁目
1946 : 西大門區 萬里洞2街
1975 : 中區 萬里洞2街





명동1가(明洞1街)

  明洞의 동명 유래는 조선초 한성부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南部 明禮坊의 ‘明’자를 딴 것으로 원래 明禮坊 또는 明禮坊골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하였다.
  명동은 조선 초에는 南部 明禮坊이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발간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南部 明禮坊 掌樂內契 · 明禮洞契 · 部契, 薰陶坊 苧廛洞契였고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南部 明禮坊 掌樂院內契 · 明禮洞契 · 部契, 薰陶坊 苧廛洞契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南署 明禮坊 明洞契 明洞 · 掌樂院契 掌樂院洞 · 小龍洞契 小龍洞 · 大龍洞契 大龍洞 · 鍾峴契 鍾峴洞 · 苧洞契 苧洞과 會賢坊 舊南部契 舊南部洞 · 小龍洞契 小龍洞 · 大龍洞契 大龍洞으로 되었다.
  1913년 京城府 南部 明禮坊 掌樂院洞 · 明洞 · 小龍洞 · 大龍洞 · 鍾峴洞 · 苧洞, 會賢坊 舊南部洞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한성부의 坊, 契, 洞의 제도를 폐지하고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洞, 丁目, 町의 명칭으로 새로 제정하고 경성부가 직할하면서 明治町1丁目이라고 하였다.
  1943년 6월 10일 區제도를 실시하면서 明治町1丁目은 中區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으로 된 동명을 모두 우리말 동명으로 개정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명치정1정목은 明洞1街로 변경되었다.

  명동을 이룬 舊南部洞은 구남붓골이라고도 하는데 명동1가, 명동2가, 충무로1가, 을지로2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5部의 하나인 남부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당피동(唐皮洞)은 물감과 중국과실을 파는 가게로 당엽피(唐燁皮)로 물건을 싸주는 집이 있다하여 불렀던 이름으로 혹은 당피골이라고도 하였다. 대룡동은 큰용골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생김새가 용처럼 생겼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작은용골은 소룡동으로도 불렀는데 작은 용처럼 생겨서 붙여진 명칭이다.

  종현은 명동성당부근 고개마루에 원각사에 있던 종을 갖다가 걸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모시전골은 저동1가와 명동1가에 걸쳐 모시를 파는 모시전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조선시대에는 종로에, 일제 때는 충무로에 눌려 기세를 펴지 못하고 주택가를 이루었던 명동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이다. 남대문과 충무로 일대에 일본인 상가가 자리잡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으로 한국인을 끌어들일 장소가 필요하였으므로 거의 뒷골목이나 다를 바 없었던 퇴계로를 큰 길로 닦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명동은 서서히 상가지구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중 폭격으로 폐허로 변한 명동은 1952년 정부가 전재복구재건을 위한 토지계획정리 추가지구로 고시하면서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피란하였던 사람들도 명동으로 다시나왔다. 서점이나 극장이 한 곳 두곳 생김에 따라 시인이나 소설가, 연극학도는 물론 영화감독 등 글깨나 읽고 쓸 줄 안다는 사람들은 모두 모여 들었다. 오늘날은 번화가의 중심 위치가 점차 강남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명동은 번화가로서 손색없는 위치를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적ㄴ국에서 가장 높은 지가가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 바로 명동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명동1가의 가장 한복판에는 오랫동안 예술극장이 자리 잡아 예술의 거리라는 면모를 자랑해 왔었는데, 1930년대에 明治座(메이지좌)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세워진 건물로 같은 무렵에 세워진 스카라극장의 전신인 若草劇場(와까구사게끼조)과 더불어 서울의 일류극장의 구실을 하였다. 명치좌는 광복이 된 이후 뒤에 이름이 명동극장으로 바뀌었다가 관계기관에서 운영하는 시민관과 국립극장으로서의 역할을 두루 거친 다음에 예술극장으로 사용되었다.

  명동1가 1번지에는 YWCA(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있다. 기독교여자청년회인데 1855년에 창립되어 YMCA와 쌍벽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22년 한국여성의 계몽을 위해 외국인 원조없이 세운 자생조직이다.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1751 : 南部 明禮坊 掌樂內契 · 明禮洞契 · 部契, 薰陶坊 苧廛洞契
1867 : 南部 明禮坊 掌樂院內契 · 明禮洞契 · 部契, 薰陶坊 苧廛洞契
1895 : 南署 明禮坊 明洞契 明洞 · 掌樂院契 掌樂院洞 · 小龍洞契 小龍洞 ·大龍洞契 大龍洞 · 鍾峴契 鍾峴洞 · 苧洞契 苧洞, 會賢坊 舊南部契 舊南部洞 · 小龍洞契 小龍洞 · 大龍洞契 大龍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掌樂院洞 · 明洞 · 小龍洞 · 大龍洞 · 鍾峴洞 · 苧洞, 會賢坊 舊南部洞
1914 : 明治町1丁目
1943 : 中區 明治町1丁目
1946 : 中區 明洞1街





명동2가(明洞2街)

  明洞의 동명 유래는 일찍이 조선초 漢城府 南部 明禮坊의 ‘明’자를 따서 명례방골 또는 명례방이라고 하였다가 이를 줄여서 명동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명동2가 1-8번지에는 사적 258호인 명동성당이 위치한다. 명동성당은 1892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898년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순수한 고딕식 구조로 지어졌다. 명동성당이 서 있는 자리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진을 치고 남대문에 있던 북을 옮겨 달았던 고개였으므로 북고개 또는 북달재라고 부럴ㅆ던 곳이며 대원군의 끈지기고 모진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집까지 기꺼이 내놓아 이 나라의 첫 천주교회당으로 삼았다가 끝내 죽임을 당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터이기도 하다. 1887년 한불수호조약이 비준됨에 따라 프랑스 성직자들의 행동이 자유로와지게 되니 이미 몇해 전에 사두었던 종현의 넓고 전망좋은 곳에 무엇보다도 먼저 성당과 천주교관을 세우는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1885년 입국한 고신부(Eugene Joan Gorge Cost)의 설계로 1892년 5월 8일에 정초식을 거행한 종현의 성당은 워낙 힘이 드는 큰 공사인 데다가 공사도중 청일전쟁이 터졌으므로 전후 6년에 걸쳐 1898년 5월 29일에 드디어 마리아의 이름으로 축성하게 된 것이다.

  북달재라는 명칭은 조선 초에 간고(諫鼓)라는 북을 달아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나 조정에 알릴 일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북을 치고 하소연하게 했다 하여 북고개 혹은 북달재로 불렀던 것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이곳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걸어 놓았던 종을 옮겨 달은 이후부터 鐘峴이라 하였다.

  명동성당보다 남쪽인 명동2가 1번지에는 성종이 가장 신뢰하고 아꼈던 칠휴거사(七休居士) 손순효(孫舜孝)가 살았다.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는 갑신정변 후 청나라군대가 조선에 주둔했을 때 주력부대인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대총통은 원세개(遠世凱)였는데 그가 주둔했던 본진 앞인 충무로 입구에서 명동~을지로 입구까지를 원대인진전(袁大人陳前)이라고 불렀다. 이 길에서 청병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던지 길 입구에서 조선 병사들이 길을 막고 조선 사람들의 통행을 막기까지도 하였다. 이 집은 대원군 때 가혹하기 그지없던 천주교 박해를 도맡아 했던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살던 낙동(駱洞) 집이었다. 원세개는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포도대장을 지냈던 이경하의 저택이 있던 중국대사관자리(2002년 이전)인 명동2가 83번지에 머물게 되자 명동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원세개가 이경하의 낙동집에 주둔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집이 청나라공사관이 되었고 2차세계대전후에는 중화민국(대만)대사관이 되었고 중국과의 수교후에는 중국대사관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동은 4대문 안에 해당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 등 궁궐을 중심으로 발전하거나 종로 방면으로 비중을 두고 커 나갔으므로 별다른 발전이 없었던 南村 지역이었다. 남산의 북쪽 기슭인데다가 청계천을 건너야 왕궁으로 통할 수 있었던 만큼 남촌에는 벼슬이 낮은 양반계층이나 군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런 중에도 명동쪽은 비교적 높은 벼슬에 있는 권문세가들의 저택이 많이 모여 있는 주택가를 형성하였다.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1751 : 南部 明禮坊 明禮洞契 · 薰陶坊 苧廛洞契
1895 : 南署 明禮坊 明洞契 明洞 · 小龍洞契 小龍洞 · 大龍洞契 大龍洞 · 鍾峴契 鍾峴洞 · 苧洞契 苧洞, 會賢坊 駱洞契 駱洞
1913 : 京城府 南部 明禮坊 明洞 · 大龍洞 · 鍾峴洞 · 苧洞, 會賢坊 駱洞
1914 : 明治町2丁目
1943 : 中區 明治町2丁目
1946 : 中區 明洞2街




무교동(武橋洞)

  武橋洞의 동명은 시청 뒤쪽에서 무교동으로 통하던 모교(毛橋)라는 토산 과일을 팔던 모전(毛廛)다리에서 유래한다. 여기에 무교(武橋)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은 옛날 이 부근에 무기의 제조 관리를 맡아 보던 군기사(軍器寺)라는 관청이 있어 모전다리 부근에 있던 모교동(毛橋洞)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교동(武橋洞)이라 하였다. 이 毛橋와 武橋의 발음이 비슷하므로 민간에서 그대로 武橋로 불렀던 것 같다.
  조선 太祖 3년(1394) 한양으로 천도한 후에 漢城府로 고치고 지금의 무교동 일대는 西部 여경방, 황화방지역과 南部 광통방과 中部 서린방이 설치되었던 곳이었다.
  1914년 4월 경기도의 각 면과 경성부 각동의 명칭과 관할구역을 새로 제정하면서 각 동 일부를 합하여 武橋町이라 하였다. 1943년 시행된 구제도에 따라 中區가 설치되면서 중구의 관할 구역으로 되었다가 1946년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에 따라 武橋洞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무교동 지역에 있었던 옛 마을들을 살펴보면 국수집이 많았다는 국숫골(麵洞)이 있었고 팥죽골이라 해서 팥죽을 팔던 두죽동(豆粥洞) 등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 대중음식점이 밀집되어 있는 까닭은 옛날부터의 전통이 아닌가 한다.

1396 : 漢城府 西部 餘慶坊 皇華坊, 中部 瑞麟坊, 南部 廣通坊
1751 : 西部 皇華坊 小貞洞契, 餘慶坊 毛廛契 刀子洞契, 南部 廣通坊 毛廛契 · 大多坊北邊契 小多坊南邊契, 小多坊北邊契
1895 : 西署 餘慶坊 毛廛契 篩洞 · 豆粥洞 · 麵洞, 武橋契 刀子洞, 皇華坊 軍器寺契 大貞洞, 南署 廣通坊 茶洞契 上茶洞 武橋契 武橋洞, 中署 蛤洞契 毛橋
1911 : 京城府 西部 餘慶坊 刀子洞 · 豆粥洞 · 篩洞 麵洞, 皇華坊 大貞洞, 南部 廣通坊 武橋洞 · 上茶洞, 中部 瑞麟坊 毛橋
1914 : 武橋町
1943 : 中區 武橋町
1946 : 中區 武橋洞




무학동(舞鶴洞)

  舞鶴洞은 舞鶴峰(표고 92m)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으로 학이 이곳 봉우리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무학봉이 되었다. 舞鶴이라는 명칭이 호칭된 것은 무학봉 남쪽 기슭에 있던 동네를 무학골이라 한 데서 시작된다.
  무학동은 조선 초기부터 한성부 관할구역 내에 속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될 때 漢城府 南署 豆毛坊(城外) 왕십리契 무학동이 되었다. 1936년 下往十里町으로 편입되었으며 1943년 6월 성동구 하왕십리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원칙에 따라 성동구 하왕십리동이 되었으며 1966년 7월 성동구 무학동이 되었다가 1975년 중구 무학동으로 구역변경이 되었다.
  무학동 동쪽으로는 개천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복개되어 찾을 수가 없다. 이 하천은 신당동 남쪽에서 시작되어 茶山路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 무학동을 지나 광희초등학교 앞을 거쳐 청계천으로 들어갔다. 이 개울이름을 巫堂개울이라 했는데 개울 좌우편에 무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이다.




묵정동(墨井洞)

유래 : 먹절 혹은 墨寺로 부르던 절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먹절골이라는 마을에 매우 깊어 늘 시커멓게 보이므로 감정우물이라 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바로 이 '먹절골의 감정우물'이라는 뜻에서 동명이 연유됨.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墨井洞契, 明哲坊 雙里門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雙林洞契 雙林洞 · 冶峴契 冶峴洞, 樂善坊 墨洞契 墨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雙林洞 · 冶峴洞, 樂善坊 墨洞
1914 : 新町
1943 : 中區 新町
1946 : 中區 墨井洞




방산동(芳山洞)

유래 : 부근에 청계천 준설로 쌓인 흙이 마치 산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假山 또는 造山이라 부르던 곳에 심어져 있던 무궁화꽃의 향기가 매우 아름답다하여 동명이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午橋南邊 · 蓮坊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午橋洞 · 蓮坊洞
1914 : 芳山町
1943 : 中區 芳山町
1946 : 中區 芳山洞





봉래동1가(蓬萊洞1街)

유래 : 蓬萊橋의 다리 이름에서 연유함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古巡廳契 · 蓮池契
1895 : 西署 盤石坊 古巡廳契 · 蓮池契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巡洞 · 紫岩洞 · 盆洞 · 蓮池洞 · 藍井洞 · 銀杏洞 · 梅月洞
1914 : 蓬萊町1丁目
1943 : 中區 蓬萊町1丁目
1946 : 中區 蓬萊洞1街





봉래동2가(蓬萊洞2街)

유래 : 蓬萊橋의 다리 이름에서 연유함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藥田契
1895 : 西署 盤石坊 藥田契 中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藥田中洞
1914 : 蓬萊町2丁目
1943 : 中區 蓬萊町2丁目
1946 : 中區 蓬萊洞2街





북창동(北倉洞)

  北倉洞의 동명 유래는 조선시대 宣惠廳의 북쪽 창고가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 南倉洞에 대칭하여 남창동을 南米倉町이라 한데 대해 북창동을 北米倉町으로 하였다가 광복후 北倉洞이라 하였다.
  북창동의 조선시대 지연마을의 명칭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빈텃골은 禮賓寺가 이 마을에 있다가 南別宮으로 옮기자 예빈시가 있던 터만 비어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일명 空垈洞이라고 하였다. 짐승 치는 일을 맡은 司畜署가 있던 마을이므로 사축섯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일명 司畜洞 또는 畜洞이라고 하였다.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西部 養生坊
1751 : 南部 好賢坊 松峴契·小公洞契, 西部 養生坊 太平館契·倉洞契·松峴契
1867 : 南部 會賢坊 小公洞契·松峴契, 西部 養生坊 太平館契·倉洞契·松峴契
1895 : 南署 會賢坊 小公洞契 小公洞·司畜洞, 陽洞契 錢橋洞, 禮賓洞契 禮賓洞, 松峴契 松峴洞, 西署 養生坊 倉洞契 倉洞, 尙洞契 尙洞, 太平洞契 太平洞·陽洞·錢橋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司畜洞·松峴洞, 西部 養生坊 空垈洞·太平洞·陽洞
1914 : 北米倉町
1943 : 中區 北米倉町
1946 : 中區 北倉洞




산림동(山林洞)

유래 : 옛 지명인 살리뭇골을 한자로 표기해서 붙인 이름.
1396 : 漢城府 南部 誠明坊
1751 : 南部 誠明坊 蓮城尉契
1895 : 南署 誠明坊 山林洞契 小山林洞 · 大山林洞契 大山林洞, 蓮城尉契 鍊井洞 · 三臺洞 · 後洞 · 石井洞
1911 : 京城府 南部 誠明坊 山林洞 · 後洞 · 三臺洞 · 石井洞 · 鍊井洞
1914 : 林町
1943 : 中區 林町
1946 : 中區 山林洞




삼각동(三角洞)

유래 :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1396 : 漢城府 南部 大平坊
1751 : 南部 大平坊 下紅門契
1895 : 南署 大平坊 大廣橋契 廣橋洞 · 寫字廳洞, 廣橋契 東川邊洞, 弘門洞契 弘門洞, 曲橋契 曲橋洞, 小廣橋契 小廣橋洞
1911 : 京城府 南部 太平坊 大廣橋洞 · 寫字廳洞 · 小廣橋洞 · 弘門洞 · 曲橋洞
1914 : 三角町
1943 : 中區 三角町
1946 : 中區 三角洞




서소문동(西小門洞)

유래 : 도성 8門의 하나인 西小門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1396 : 漢城府 西部 皇華坊 · 養生坊
1751 : 西部 皇華坊 西小門契 · 小貞洞契, 養生坊 太平館契 · 倉洞契
1895 : 西署 皇華坊 西小門內契 倭松洞 · 鶴橋 · 內泉洞 · 館井洞 · 司倉洞, 軍器寺契 小貞洞, 養生坊 太平洞契 太平洞 · 館井洞 · 生祠洞
1911 : 京城府 西部 皇華坊 小貞洞 · 館井洞 · 西小門內洞 · 倭松洞 · 鶴橋洞 · 內泉洞 · 司倉洞, 養生坊 太平洞 · 生祠洞
1914 : 西小門町
1943 : 西大門區 西小門町
1946 : 西大門區 西小門洞
1975 : 中區 西小門洞




소공동(小公洞)

유래 : 太宗의 둘째 딸인 慶貞公主의 宮이 있었으므로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小公主洞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 小公洞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1751 : 南部 好賢坊 松峴契 · 小公洞契 · 本宮內契
1867 : 南部 會賢坊 小公洞契 · 儲慶宮契 · 松峴契
1895 : 南署 會賢坊 小公洞契 小公洞 · 松峴契 松峴洞 · 儲慶宮契 儲慶宮洞 · 美洞契 石井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小公洞 · 松峴洞 · 石井洞 · 儲慶宮洞
1914 : 長谷川町
1943 : 中區 長谷川町
1946 : 中區 小公洞




수표동(水標洞)

유래 : 淸溪川의 水位를 측정하는 水標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朴井契 · 墨井洞契 · 竹廛洞契 · 惠民署契 · 政丞契
1895 : 南署 薰陶坊 竹洞契 冷井洞?竹洞, 惠民署契 惠民署洞, 梧泉契 墨井洞, 政丞契 水標橋洞 · 詩洞 · 標南橋洞, 朴井契 甲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惠民洞 · 墨井洞 · 水標橋洞 · 竹洞 · 詩洞 · 甲洞
1914 : 水標町
1943 : 中區 水標町
1946 : 中區 水標洞




수하동(水下洞)

유래 : 남산에서 발원한 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마을이 있어 ‘물아랫골’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
1396 : 漢城府 南部 大平坊
1751 : 南部 大平坊 甫十內契 · 甫十外契 · 水下洞契
1895 : 南署 大平坊 水下洞契 水下洞 · 甫十契 上犁洞 · 下犁洞 · 席洞契 席洞
1911 : 京城府 南部 太平坊 上犁洞 · 下犁洞 · 席洞 · 水下洞
1914 : 水下町
1943 : 中區 水下町
1946 : 中區 水下洞




순화동(巡和洞)

유래 :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변경할 때 巡廳洞의 '巡'자와 和泉町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함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蓮池契 · 古巡廳契 · 米廛下契
1895 : 西署 盤石坊 米廛下契 車洞 · 冶洞, 蓮池契 簡洞, 舊巡廳契 巡洞 · 紫岩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米廛下車洞 · 冶洞 · 巡洞 · 紫岩洞 · 舊巡廳洞 · 簡洞
1914 : 和泉町
1943 : 西大門區 和泉町
1946 : 西大門區 巡和洞
1975 : 中區 巡和洞




신당동(新堂洞)

  新堂洞은 신당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명으로 神堂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갑오개혁 때 神堂과 발음이 같은 新堂으로 바뀌었다.
  光熙門(水口門)밖에 위치한 이곳의 신당을 중심으로 많은 무당들이 모여 살아 무당촌을 이루었으므로 神堂 혹은 新堂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신당동은 朝鮮 太祖 3년 한양으로 천도한 후 漢城府로 개칭하고 太祖 5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部 52坊으로 나눌 때 한성부 城底十里에 포함되었다. 1910년에는 新堂里洞이라 칭하고 1936년 京城府 新堂町이 되었다가 1943년 새로 區制度를 실시하게 되자 신당정은 성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 때의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하면서 성동구 新堂洞이 되었으나 1975년 중구 신당동으로 행정관할이 변경되었다.   지금의 신당제1동 북서쪽 모퉁이인 신평화상가 서쪽에서 종로구 창신동과 연결되는 곳에는 예전에 청계천의 수위를 조절하던 五間水門이 있었으나 일제때 철거되었다.
  水口門은 속칭 시구문이로 부르기도 하는데 西小門과 함께 도성안의 상여를 밖으로 통과시키던 문으로 水口門 밖 신당동 일대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高宗 말년에 성안에 사는 사람 중에 병이나 사고로 죽어 가게 될 때 집안에서 죽으면 그 악령이 집안에 남아서 해를 끼친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기 전에 수구문 밖 피막에 옮겨 죽게 하는 습속이 있었다.  그래서 도성 안에 유행병이나 전염병이 번지면 수구문 밖 피막에 버려진 아직 죽지 않은 어린애들의 울음바다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이루었으므로 이를 일컬어 '수구문 밖 반송장'이란 말이 유행하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묘지가 겹겹이 있었고 일본인의 전용 화장터인 신당리화장장도 있었다.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높고 큰 고개를 버티고개라고 한다. 옛날에는 길이 좁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둑이 많았으므로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 하면서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番峙), 버티, 버터 또는 한자명으로 扶於峙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한성부의 진산인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서쪽의 무악과 떡고개를 두어서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그 애를 달래서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그 아이를 못 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인데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버티고개의 약수는 유명하였는데 藥水洞이란 동명도 이 약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쌍림동(雙林洞)

유래 : 마을 입구에 문을 세우고 지켜 도적을 경비하던 里門 한 쌍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 원래 雙里門洞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 쌍림동으로 됨.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雙里門洞契 · 靑寧尉契 · 南小洞契
1867 : 南部 明哲坊 雙里門契 · 靑寧尉契 ·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南小洞 · 雙林洞契 雙林洞 · 冶峴契 冶峴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南小洞 · 雙林洞
1914 : 竝町
1943 : 中區 竝木町
1946 : 中區 雙林洞





예관동(藝館洞)

유래 : ① 조선시대에 이곳에 藝館(인쇄소인 校書館)이 있었기 때문에 예관골,예동이라 한데서 유래.
② 倭館洞으로 부르던 마을로 이곳에 일본 사신이 유숙하는 倭館인 東平館이 있음으로 해서 연유된 것. 이것이 후일 음이 변하여 藝館洞이 됨.
1396 : 漢城府 南部 樂善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 眞梳里契
1895 : 南署 樂善坊 日館洞契 藝洞, 瓦有豆里契 沈橋洞 · 五宮洞 · 擁甕井洞, 大仁峴契 仁峴洞, 直梳里契 舟橋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藝洞 · 仁峴洞 · 舟橋洞 · 甕井洞 · 沈橋洞 · 五宮洞
1914 : 花園町
1943 : 中區 花園町
1946 : 中區 藝館洞





예장동(藝場洞)

유래 : 조선시대 5軍營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藝場이 있었던 것이 유래가 됨. 武藝場이 줄어 藝場이 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 誠明坊
1751 : 南部 薰陶坊 鑄字洞契
1895 : 南署 薰陶坊 鑄洞契 鑄洞, 誠明坊 鑄洞契 南學洞
1911 : 京城府 南部 誠明坊 南學洞, 薰陶坊 鑄洞
1914 : 倭城臺町
1943 : 中區 倭城臺町
1946 : 中區 藝場洞





오장동(五壯洞)

유래 : 옛날 이곳에 다섯 장사가 살았던 데서 '오장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 五壯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南部 樂善坊 · 明哲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 直梳里契, 明哲坊 雙里門契 · 靑寧尉契
1895 : 南署 樂善坊 瓦有豆里契 沈橋洞 · 五壯洞, 直梳里契 舟橋洞, 明哲坊 五壯洞契 五壯洞, 雙林洞契 雙林洞, 日館洞契 沈橋洞, 靑寧尉契 帶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舟橋洞 · 沈橋洞 · 五壯洞, 明哲坊 雙林洞 · 帶洞
1914 : 初音町
1943 : 中區 初音町
1946 : 中區 五壯洞





을지로1가(乙支路1街)

  을지로는 1946년 10월 서울의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세종로, 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의 명장으로 고구려에 수나라가 침입했을 때 군사를 지휘하여 살수에서 수의 대군을 격파했고, 침착하며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이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조선 초에는 한성 부 남부 광통방(廣通坊)과 호현방(好賢坊) 일부 지역이었고 영조 27년(1751)에 만든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남부(南部) 광통방(廣通坊) 군기사월변계(軍器寺越邊契)·소다방남변계(小多坊南邊契)·소천계(소천계)와 호현방(호현방) 본궁내계(본궁내계)·소공동계(소공동계)였고 고종 4년(1867)에 반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남부 광통방(廣通坊) 소천변계(小川邊契)·소다방남변계(小多坊南邊契)·군기사월변계(軍器寺越邊契)와 회현방(會賢坊) 소공동계(小公洞契)였다. 갑오개혁 때 전국의 행정구역과 아울러 한성부의 구역 개편 및 지명 변경이 있을 때 한성부 남서(南署) 광통방(廣通坊) 소천변계(小川邊契) 견정동(堅井洞), 무교계(武橋契) 무교동(武橋洞), 미동계(美洞契) 미동(美洞), 유동계(油洞契) 유동(油洞), 남천변계(南川邊契) 남천변동(南川邊洞)과 회현방(會賢坊) 미동계(美洞契) 휴지동(休紙洞) 숙수방동(熟手房洞) 미동(美洞) 석정동(石井洞), 소공동계(小公洞契) 소공동(小公洞)이 되었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귀면서 경기도에 예속되었으며 1914년 근방에 있던 진흙으로 된 고개인 구리개의 한자음 동현(銅峴)의 銅과 뜻이 통하는 황금정(黃金町)으로 하고 그 첫 번째가 된다 하여 황금정1정목(黃金町1丁目)이라 하였다. 1943년 경성부의 구제도 실시로 중구 황금정1정목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 원칙에 따라 을지로1가(乙支路1街)로 바뀌었다.
  북악 방향에서 흘러내린 물이 중학천으로 유입되고 그 지류가 무교쪽으로 흐르고 나머지는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때문에 청계천의 남쪽에 위치한 이 지역의 지하로 수맥이 통과하여 관내 곳곳에 우물이 많이 있었다.
  견정동(堅井洞)은 굿우물골이라고도 하였는데 마을 한가운데 우물이 있고 이 우물가에서 굿을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 하여 굿우물이라 불렀고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굿우물골이라 하였다. 궁내정동(宮內井洞)은 궁안우물골이라 불렀는데 남별궁(현 조선호텔 일대)안에 있었던 우물을 궁내정(宮內井)이라 하였으며 그 주변의 마을을 궁내정동이라 하였다. 태평로2가와 을지로1가에 걸쳐 잇는 마을을 석정동(石井洞) 혹은 돌우물골이라 불렀는데 돌틈에서 나오는 우물이 있기 때문에 돌우물 또는 석정(石井)이라 하고 주변의 마을을 석정동으로 불렀다. 기름전이 있던 마을은 기름전골 혹은 유동(油洞)이라 불렀는데 음이 같은 由洞으로도 불렀다. 남천변동(南川邊洞)은 무교의 남쪽 개천가에 있는 마을인데 을지로1가와 다동의 경계지점 근방이다. 남편내께라고도 하는데 다동에 기방이 많이 있고 기방(妓房)에 얹혀 사는 기둥서방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라 하여 다방기생 남편집회소라는 뜻이 함축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향목동(香木洞)은 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동네 전체의 향기가 그윽하였는데 향나뭇골이라고도 불렀고 향나무의 사투리인 상나뭇골로도 불렀다. 소공동(小公洞)은 작은공줏골 혹은 소공주동(小公主洞)으로도 불렀는데 지금의 프레지던트호텔, 롯데호텔, 반도조선호텔 일원이다.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사위 조대임(趙大臨)이 살던 집이 있었으므로 작은공주골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수지전골은 휴지전(休紙廛)이 있던 마을로 휴지전골, 휴지동(休紙洞), 휴지전동(休紙廛洞)으로도 불렀다. 숙수방동(熟手房洞)은 요리사인 숙수(熟手)를 관장하는 숙수방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며 숙수방골이라고도 하였다.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하고 부근에 러시아, 미국, 영국공사관 등 외국공관이 들어서면서부터 서양요리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1396 : 漢城府 南部 廣通坊 · 好賢坊
1751 : 南部 廣通坊 軍器寺越邊契·小多坊南邊契·小川契, 好賢坊 本宮內契·小公洞契
1867 : 南部 廣通坊 小川邊契·小多坊南邊契·軍器寺越邊契, 會賢坊 小公洞契
1895 : 南署 廣通坊 小川邊契 堅井洞·武橋契 武橋洞·美洞契 美洞·油洞契 油洞·南川邊契 南川邊洞, 會賢坊 美洞契 休紙洞·熟手房洞·美洞·石井洞, 小公洞契 小公洞
1911 : 京城府 南部 廣通坊 油洞·南川邊洞·堅井洞·武橋洞·會賢坊 熟手房洞·休紙洞·香木洞·宮內井洞·石井洞, 美洞, 小公洞
1914 : 黃金町1丁目
1943 : 中區 黃金町1丁目
1946 : 中區 乙支路1街




을지로2가(乙支路2街)

  조선초기에 한성부 남부 호현방(好賢坊), 대평방(大平坊), 훈도방(薰陶坊), 명례방(明禮坊) 일원이었고,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에 예속되었고 1914년 동현(銅峴)의 이름을 따서 황금정(黃金町) 2정목(丁目)이라 하였다. 1943년 경성부의 구제도 실시로 중구 황금정 2정목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꿈에 따라 을지로 2가가 되었다.
  을지로 2가를 구성하고 있는 구남부동(舊南部洞)은 명동1가·충무로1가·을지로2가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한성부 5부 중 하나인 남부(南部)의 청사가 있었으므로 지명이 유래되었고 구남부골이라고도 불렀다. 체부청동(體府廳洞)은 체부청골로도 불렀는데 체부청(體府廳)이 있었기 때문인데 체찰사부(體察使府)가 있는 곳을 체부청이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에는 체찰사부는 선조 때 설치되었는데 봉명대신(奉命大臣)으로 왕의 뜻을 받들어 장병을 시찰 독려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혜민섯골은 을지로2가·수표동·장교동에 걸쳐 있었는데 을지로2가 192번지에 의약과 일반 서민들의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혜민서(惠民署)가 있었으므로 지명이 유래되었다. 혜민동이라고도 하였다.

  장악원골은 을지로2가 195번지에 음악을 가르치며 악공을 배출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므로 지명이 유래되었고 장악원동이라고도 하였으며 199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은 골목모양이 포졸이 차고 다니는 육모방망이와 비슷하므로 방망잇골 혹은 추동(椎洞)으로 불렀다.

  동현동(銅峴洞)은 을지로2가·명동1가·명동2가·충무로1가·남대문로2가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로 을지로2가 부근에 진흙으로 된 얕으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매우 질었다. 『도성삼군문분계총록』이나 『육전조례』에는 구리개(仇里介)라고 표현하였으며 갑오개혁 무렵에 동현(銅峴)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구리개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동현인데 운현(雲峴)이라고도 하였다.
  대추나뭇골은 을지로2가와 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대추나무가 유난히 많이 있으므로 마을이름이 연유되었는데 한자로는 대조동(大棗洞), 조동(棗洞)이라 하였다.

  대전골은 수표동·을지로2가·장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대나무와 대그릇을 판매하는 죽전이 있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한자명으로는 죽동이라 불렀고 모시전골은 저동1가·충무로2가·명동1가와 명동2가·을지로2가 및 장교동에 걸쳐 잇던 마을로 모시전이 있어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는데 한자로는 저동(苧洞)이라 하였다.

  먹우물골은 수표동·장교동·을지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깊은 우물이 있어 먹우물이라 했는데 한자로는 묵정동(墨井洞)이라고 불렀으며 냉정동(冷井洞)은 저동2가와 을지로2가에 걸쳐 있었는데 물맛이 매우 차서 찬우물이라 불렀던 우물이 있었으므로 찬우물골 혹은 냉정동이라 하였다.

  물아랫골은 수하동과 을지로 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창동천(倉洞川)의 아래쪽이 되므로 물아랫골 또는 한자명으로 수하동이라 하였다.
  아래보습곶이는 수하동·장교동·을지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보습곶이( 洞;이동)의 아래쪽이 되어 아래보습곶이, 한자로는 하이동(下犁洞)이라 하였으며 웃보습곶이는 보습곶이의 윗쪽이 되므로 웃보습곶이 또는 한자명으로 상이동(上 洞)이라 불렀다.

  을지로2가 181번지에는 장악원(掌樂院)이 있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데 조선 개국 직후부터 65년 동안은 궁중음악과 무용의 교육 및 연주활동을 상설 음악기관인 전악서·아악서·관습도감 등에서 관장했는데, 1466년부터는 장악서에서 궁중의 음악과 무용의 행정 및 연주활동 일체를 관장하여 1470년에는 장악원으로 개칭되었다. 1907년에는 장악과(掌樂課)로 바뀌었고 1910년 직후에는 장악과 소속의 음악인들이 아악대(雅樂隊)라는 명칭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아악대는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칭되었고 광복과 함께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가 되었으며 1951년 국립국악원이 설립되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에 의해 당분간 장악원 자리는 일본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었는데 이 자리에 1909년 한국토지의 수탈에 목적을 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토지약탈이 목적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38년 만선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자 그 기능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광복 때까지 업무는 지속되었다. 광복과 함께 미군정에 의해 적산(敵産)으로 접수되었던 이 건물은 신한공사·국방부·보건부·내무부에서 사용했으며 1977년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섰다.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 大平坊 · 薰陶坊 · 明禮坊
1751 : 南部 好賢坊 小公洞契, 明禮坊 掌樂內契·明禮洞契·部契, 大平坊 甫十內契·甫十外契·水下洞契·仇里峴契, 薰陶坊 墨井洞契·竹廛洞契·惠民署契·苧廛洞契, 誠明坊 達城尉契
1867 : 南部 會賢坊 小公洞契, 明禮坊 掌樂院內契·明禮洞契·部契, 大平坊 甫十內契·甫十外契·水下洞契·九里介契, 薰陶坊 墨井洞契·竹廛洞契·惠民署契·苧廛洞契, 誠明坊 達城尉契
1895 : 南署 會賢坊 舊南部洞契 舊南部洞·小龍契 小龍洞·小公洞契 銅峴洞, 明禮坊 銅峴契 棗洞·明洞契 明洞·掌樂院契 掌樂院洞·小龍契 小龍洞·苧洞契 苧洞, 薰陶坊 竹洞契 冷井洞 竹洞·惠民署契 惠民署洞·梧泉契 墨井洞, 大平坊 甫十契 上犁洞 下犁洞·棗洞契 棗洞·水下洞契 水下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舊南部洞·小龍洞·銅峴洞, 明禮坊 棗洞·明洞·掌樂院洞·苧洞, 薰陶坊 竹洞·惠民洞·墨井洞·冷井洞, 大平坊 上犁洞·下犁洞·水下洞
1914 : 黃金町2丁目
1943 : 中區 黃金町2丁目
1946 : 中區 乙支路2街




을지로3가(乙支路3街)

  을지로 3가의 동명은 세종로나 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역사적 위인의 한분인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을지로3가에는 시궁골, 신전골, 쳇골 등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시궁골은 을지로3가와 입정동, 수표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수헌거사(樹軒居士)가 썼다고 알려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이 마을은 수표교 동쪽 수십보에 위치한 곳으로 영조 때 학자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벗을 모아 시금(詩琴)으로써 즐겼다 하여 시금골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시궁골이 되었고 한자로는 시금동(詩琴洞) 혹은 시동(詩洞)이라고 한다.
  삼연 김창흡의 시는 앞 시대 선배 문인들의 문학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영,정조시대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실학파 및 여항문인(閭巷文人)들에게 지도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그가 살았던 시기가 대부분 노론 집권기였던 관계로 다른 문인들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언론과 문학사상이 보장되었다. 삼연은 사후에 명성이 더욱 높아져 정조 임금도 높이 평가하였는데 철종 때부터 구한말까지 지속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해 그의 명성은 확고히 굳어져서 세인들의 숭앙을 한 몸에 받았다.

  신전골은 을지로3가, 저동2가, 초동에 걸쳐 있는 마을인데 신전이 있었으므로 신전골이라 하였고 한자이름으로는 이동(履洞)이라고 한다.
  쳇골은 을지로3가와 입정동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체를 만드는 집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연유되었으며 한자로는 사동이라고 한다.

  ‘해방기념 서울안내’에 의하면 광복 직후 을지로3가에는 고물사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을지로3가를 지나다 보면 길 양쪽에 있는 상점이 거의 시멘트 대리점, 타일이나 목욕실용 자재를 진열하고 있는 건축자재 취급상가와 철물상, 가구상임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건축자재상이 밀집되어 있는 것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을지로는 특히 서울의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전쟁의 피해를 많이 받아 완전히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지역으로써 전쟁이 끝난 후 그만큼 활발한 재건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서 재건의 현장에 건축자재상이 모여들게 되어 그들의 밀집 지역이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후 196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도시개발과 건축바람은 건축자재상들이 발판을 굳히는데 많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제 때의 을지로3가는 대부분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업지대였다. 일본인들은 당시 공업지대인 용산과 상업지대인 중구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1917년의 을지로3가 거주 일본인의 영업세 납부상황을 보면 납세자 188명이 1,223.88원을 부담하여 한국인 납세자에 비해 1인당 납세액이 두배가 넘었다.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 誠明坊
1751 : 南部 薰陶坊 朴井契 · 政丞契
1895 : 南署 薰陶坊 竹洞契 竹洞 · 政丞契 詩洞 · 笠井契 笠井洞 · 朴井契 椒洞 草洞 · 履洞契 履洞, 誠明坊 草洞契 草洞 篩洞 · 山林洞契 小山林洞 · 大山林洞契 大山林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椒洞 · 竹洞 · 笠井洞 · 詩洞 · 履洞, 誠明坊 山林洞 · 草洞 · 篩洞
1914 : 黃金町3丁目
1943 : 中區 黃金町3丁目
1946 : 中區 乙支路3街




을지로4가(乙支路4街)

  을지로4가의 동명은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비롯된다.

  을지로4가에는 우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인현동2가와 을지로4가에 걸쳐 있는 널우물골은 우물뚜껑을 넓은 판자로 씌워놓았기 때문에 널우물이라 불렀으며 그 주변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독우물골도 인현동2가와 을지로4가에 걸쳐있던 마을로 마치 우물 속의 모양이 돌절구처럼 생긴 우물이 있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곧은우물골은 직정동(直井洞)으로도 불렀으며 깊은 우물이 곧바로 파내려져 있는 우물이 있어서 동네 명칭이 유래되었다. 그런가하면 은방(銀房)이 있는 마을은 은방골 혹은 은동(銀洞)이라 하였다.
  을지로4가 156번지와 을지로5가 269번지를 이어주는 곳에는 청령교(靑寧橋)가 있어서 청녕교동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청녕위다리 혹은 청교동(靑橋洞)으로 불렀다. 성종의 셋째 사위인 청녕위 한경침(靑寧尉 韓景琛)이 살았으므로 다리를 놓고 청녕위다리라 했으므로 그 마을 이름도 청녕위다리라 하였다.
  을지로4가 310번지에는 국도극장이 있었다(1999년 폐관). 국도극장은 1946년 10월 15일에 설립되었는데 서울 중심가 개봉관 가운데서 방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1396 : 漢城府 南部 誠明坊 · 樂善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誠明坊 蓮城尉契
1895 : 南署 樂善坊 瓦有豆里契 靑寧尉洞 · 甕井洞 · 園井洞 · 銀洞, 大仁峴契 仁峴洞, 誠明坊 山林洞契 小山林洞, 大山林洞契 大山林洞, 蓮城尉契 大仁峴洞 · 小仁峴洞 · 板井洞 · 直井洞 · 園井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靑寧橋洞 · 甕井洞 · 園井洞 · 銀洞, 誠明坊 板井洞 · 大仁峴洞 · 山林洞 · 直井洞
1914 : 黃金町4丁目
1943 : 中區 黃金町4丁目
1946 : 中區 乙支路4街





을지로5가(乙支路5街)

  을지로5가의 동명은 살수대첩의 영웅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연유한다.

  미나릿골과 청짜다리골은 을지로5가에 있던 옛 마을이다. 미나릿골은 오장동과 을지로5가 사이에 있는 핏골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이 곳에는 미나리를 재배하던 넓은 밭이 있었으므로 미나릿골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근동(芹洞)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을지로5가는 남촌이라 불렀던 지역인데 장인은 물론 상인이나 하급관리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농사를 짓는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남촌의 한복판이 되는 이곳에서 재배되던 미나리는 상업작물로 소비되고 있었던 듯 하다.
  청짜다리골은 청짜다리 부근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청교동이라고도 한다. 이 다리에 ‘靑’字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청짜다리 또는 청자교(靑字橋)라고 한다.

  일감정(一鑑亭)은 명철방 청교동에 있던 정자터이다. 이 정자는 조선 인조, 효종 때 문신인 좌참찬(左參贊) 조형(趙珩)의 소유였는데 근처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청녕위다리 조씨 혹은 청녕교 조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감정은 광복 이후에 헐려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午橋南邊 · 靑橋洞 · 芹洞 · 帶洞 · 魚橋洞 · 蓮坊洞, 五壯洞契 五壯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蓮坊洞 · 午橋洞 · 魚橋洞 · 帶洞 · 芹洞 · 靑橋洞 · 五壯洞
1914 : 黃金町5丁目
1943 : 中區 黃金町5丁目
1946 : 中區 乙支路5街





을지로6가(乙支路6街)

유래 : 1946년에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乙支文德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붙인 것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藍井洞 · 蓮坊洞 · 南小洞, 南小洞契 訓練院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訓練院洞 · 南小門洞 · 藍井洞 · 蓮坊洞
1914 : 黃金町6丁目
1943 : 中區 黃金町6丁目
1946 : 中區 乙支路6街





을지로7가(乙支路7街)

유래 : 1946년에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乙支文德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붙인 것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水口門內契, 豆毛坊(城外) 神堂里契
1895 : 南署 明哲坊 水口川內契 裵洞 · 下都監洞 · 東山里洞, 豆毛坊(城外) 往十里契 新堂里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東山里洞 · 裵洞 · 下都監洞, 豆毛面 新堂里
1914 : 黃金町7丁目
1943 : 中區 黃金町7丁目
1946 : 中區 乙支路7街





의주로1가(義州路1街)

유래 : 1914년 日帝에 의해 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 盤松坊
1751 : 西部 盤石坊 石橋契 · 蓮池契 · 米廛上契 · 米廛下契 · 西小門外契 · 四巨里契, 盤松坊(城外) 京營庫契 · 菌匠里契 · 盧僉正契 · 水芹沓契 · 靑城君契
1867 : 西部 盤石坊 米廛上契 · 米廛下契 · 四巨里契 · 石橋契 · 西小門外契, 盤松坊(城外) 京營口契 · 菌匠里契 · 盧僉正契 · 水芹沓契 · 靑城君契
1895 : 西署 盤石坊 米廛下契 車洞?四巨里, 米廛上契 新橋 · ?臺洞 · 西醬洞, 蓮池契 四巨里, 盤松坊, 京口契 京橋 · 菌匠里契 雇馬洞 · 盧僉正契 尾洞 · 水芹沓契 芹洞 · 靑城君契 新橋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車洞 · 西醬洞 · ?臺洞 · 新橋 · 新洞 四巨里, 盤松坊 雇馬洞 · 尾洞 · 芹洞 · 京橋
1914 : 義州通1丁目
1943 : 西大門區 義州通1丁目
1946 : 西大門區 義州路1街
1975 : 中區 義州路1街





의주로2가(義州路2街)

유래 : 1914년 日帝에 의해 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1396 : 漢城府 西部 盤石坊
1751 : 西部 盤石坊 古巡廳契 · 米廛下契 · 四巨里契
1895 : 西署 盤石坊 米廛下契 蓋井洞 · 冶洞 · 四巨里 · 蛤洞 · 汗洞 · 帶洞 · 布洞 · 半泉洞, 舊巡廳契 紫岩洞 · 亭子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石坊 冶洞 · 四巨里 · 紫岩洞 · 蛤洞, 亭子洞 · 半泉洞 · 蓋井洞 · 布洞 · 帶洞 · 汗洞
1914 : 義州通2丁目
1943 : 西大門區 義州通2丁目
1946 : 西大門區 義州路2街
1975 : 中區 義州路2街





인현동1가(仁峴洞1街)

유래 : 인현동1가와 2가에 걸쳐 있던 '인성붓재'라는 고개 이름에서 취한 동명. 인성붓재는 이 고개 밑에 조선 선조의 7남 仁城君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서 仁峴이라 함.
1396 : 漢城府 南部 誠明坊
1751 : 南部 誠明坊 蓮城尉契
1895 : 南署 誠明坊 筆洞契 筆洞 · 小筆洞契 小筆洞 · 山林洞契 小山林洞 · 大山林洞契 大山林洞 · 晦洞契 晦洞 · 桑洞契 桑洞, 樂善坊 蓮城尉契 晦洞 · 筆洞契 筆洞 · 大仁峴契 仁峴洞
1911 : 京城府 南部 誠明坊 筆洞 · 山林洞 · 桑洞, 樂善坊 晦洞 · 大仁峴洞
1914 : 櫻井町1丁目
1943 : 中區 櫻井町1丁目
1946 : 中區 仁峴洞1街





인현동2가(仁峴洞2街)

유래 : 인현동1가와 2가에 걸쳐 있던 '인성붓재'라는 고개 이름에서 취한 동명. 인성붓재는 이 고개 밑에 조선 선조의 7남 仁城君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서 仁峴이라 함.
1396 : 漢城府 南部 誠明坊 · 樂善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 倭館洞契, 誠明坊 蓮城尉契
1895 : 南署 誠明坊 晦洞契 晦洞 · 瓦有豆里契 藝洞 · 蓮城尉契 小仁峴洞 大仁峴洞 板井洞, 樂善坊 蓮城尉契 晦洞 · 瓦有豆里契 甕井洞 · 大仁峴契 仁峴洞
1911 : 京城府 南部 誠明坊 晦洞 · 藝洞 · 小仁峴洞 · 大仁峴洞 · 板井洞, 樂善坊 仁峴洞 · 甕井洞
1914 : 櫻井町2丁目
1943 : 中區 櫻井町2丁目
1946 : 中區 仁峴洞2街





입정동(笠井洞)

유래 : 갓방 즉 갓을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으므로 동리 이름을 '갓방우물골'이라고 한 데서 연유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誠明坊
1751 : 南部 薰陶坊 朴井契 · 政丞契
1895 : 南署 薰陶坊 政丞契 詩洞 · 朴井契 甲洞 河橋洞 馬契洞 草洞?笠井契 笠井洞, 誠明坊 草洞契 舊造山洞 草洞 篩洞 · 山林洞契 小山林洞 · 大山林洞契 大山林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詩洞 · 甲洞 · 笠井洞 · 草洞 · 河橋洞 · 馬契洞, 誠明坊 篩洞 · 山林洞 · 舊造山洞
1914 : 笠井町
1943 : 中區 笠井町
1946 : 中區 笠井洞





장교동(長橋洞)

유래 : 淸溪川 위의 다리인 長橋의 이름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大平坊, 薰陶坊
1751 : 南部 大平坊 甫十內契?甫十外契, 薰陶坊 墨井洞契 · 惠民署契 · 苧廛洞契 · 政丞契
1895 : 南署 大平坊 甫十契 上犁洞 下犁洞 · 棗洞契 棗洞, 薰陶坊 苧洞契 苧洞 · 惠民署契 惠民署洞 · 梧泉契 墨井洞 · 政丞契 長橋洞
1911 : 京城府 南部 大平坊 下犁洞?棗洞, 薰陶坊 長橋洞 · 苧洞 · 惠民洞 · 墨井洞
1914 : 長橋町
1943 : 中區 長橋町
1946 : 中區 長橋洞





장충동1가(奬忠洞1街)

유래 : 부근에 있는 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동명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 水口門內契 ·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靑寧尉契 南小洞, 水口川內契 知禮洞 · 藪坪里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南小門洞 · 知禮洞 · 藪坪里
1914 : 東四軒町
1943 : 中區 東四軒町
1946 : 中區 奬忠洞1街





장충동2가(奬忠洞2街)

유래 : 부근에 있는 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동명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1751 : 南部 明哲坊 靑寧尉契 · 南小洞契
1895 : 南署 明哲坊 冶峴契 冶峴洞, 靑寧尉契 南小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南小門洞, 冶峴洞
1914 : 西四軒町
1943 : 中區 西四軒町
1946 : 中區 奬忠洞2街





저동1가(苧洞1街)

유래 :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苧廛洞契
1895 : 南署 薰陶坊 苧洞契 苧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苧洞
1914 : 永樂町1丁目
1943 : 中區 永樂町1丁目
1946 : 中區 苧洞1街





저동2가(苧洞1街)

유래 :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竹廛洞契
1895 : 南署 薰陶坊 竹洞契 冷井洞 竹洞, 履洞契 履洞, 宮基洞契 宮基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竹洞 · 冷井洞 · 履洞 · 宮基洞
1914 : 永樂町2丁目
1943 : 中區 永樂町2丁目
1946 : 中區 苧洞2街





정동(貞洞)

  貞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 太祖 李成桂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은 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초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로 나누어 관할할 때 西部 황화방(皇華坊)과 취현방(聚賢坊) 일부지역이었고 영조 27년(1751)에 만들어진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西部 황화방(皇華坊) 소정동계(小貞洞契)로 되어 있고, 1867년에 반포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 소정동계(小貞洞契) ·경운궁계(慶雲宮契)로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의 개혁과 함께 정동은 서부(西署) 황화방(皇華坊) 군기사계(軍器寺契) 대정동(大貞洞)·소정동(小貞洞)으로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한성부는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관할지역이 되었으며 1914년 서부 대정동과 소정동을 합체 정릉이 있던 동이라는 뜻에서 貞洞이라 하였다. 1936년 4월 1일에는 貞洞町으로 개칭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 西大門區 貞洞町이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개정 원칙에 따라 貞洞으로 바뀌었으며 1975년 10월 1일 중구 정동으로 되었다.

  대정동은 정동, 태평로1가, 태평로2가, 무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큰정동이라고도 하였고, 소정동은 정동과 서소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정동의 작은 마을이 되므로 작은 정동이라고도 하였다.

  정동의 동명은 신덕왕후 강씨(康氏)의 능인 정릉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신덕왕후는 상산부원군(象産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로 태조 즉위년(1392)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으며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의안대군(宜安大君;방석,(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았다. 태조의 사랑을 받았으나 태조 5년(1396) 8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상심하여 10일간이나 조회와 시전을 폐지하였으며 강씨의 능지를 찾다가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현 정동 4번지 영국대사관 터 일부를 선정하였다. 당시 한성 내에는 묘지를 둘 수 없었는데도 법을 위배하면서까지 강행한 점으로 보아 태조가 강씨를 얼마나 총애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태조는 친히 능침(陵寢) 공사를 감독하며 한편으로는 원당으로 흥천사(興川寺)를 동쪽에 건립하게 한다. 흥천사는 태조 5년(1396)에 태조의 명에 의하여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동쪽에 세웠는데 선종 계통이었으며 세조 7년(1461)에 종을 주조해서 달았다.

  정동 5번지의 덕수궁은 경운궁(慶運宮), 서궁(西宮), 명례궁(明禮宮)이라고도 부른다. 궁궐로서는 규모가 작은편이며 건물들은 광무 9년(1905)에 중건된 것이 많다. 이곳은 본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정(?)의 사저였는데 선조 26년 4월 임진왜란으로 국왕이 의주까지 몽진하였다가 환도하자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오직 이 집만 남아 있으므로 이를 수리하고 이웃에 있던 계림군가(桂林君家)까지도 포함하여 행궁으로 삼았다. 광해군이 행궁 서청(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 후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가 다시 12월에 경운궁으로 이어하여 7년 4월까지 임어하면서 경운궁의 수리를 명령하였다. 선조, 광해군 두 왕이 1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으며 그로부터 이곳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인조가 즉조당에서 왕위에 등극한 후 명례궁(明禮宮)이라고 개칭하였다. 고종 33년 2월 11일에 을미사변의 발생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왕태후와 태자비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까운 경운궁으로 옮기게 하고 16일에는 경운궁의 수리를 명령하였으며 공사가 끝날 무렵인 9월 4일에 경복궁 집옥재에 있던 열성묘(列聖廟)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기고 민비의 빈전(殯殿)을 이곳 즉조당으로 옮겼다.
1년간을 러시아공사관에서 지낸 고종은 경복궁으로 환어하지 않고 이듬해 2월 20일 명례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개칭하고 그 규모를 넓혔다. 광무11년(1907) 6월 헤이그특사사건의 문책으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도 고종은 계속 이곳에 머물렀다. 순종황제는 제위에 오른뒤 창덕궁으로 옮겼고 태상황인 고종의 장수를 축원하는 뜻에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하였다. 고종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간을 덕수궁에서 기거하였으며 그 뒤에는 이곳이 주로 빈객의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14일 덕수궁에서 화재가 일어나 궁궐 안 건물이 모두 타버렸으나 다시 옛 모습대로 재건에 착수하여 2년 뒤에 낙성하였다.

정동34번지에는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898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이 교회의 종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들이 징발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으며 1987년3월8일 화재로 건물 내부 일부가 소실된 것을 보수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로서 교회사업으로 의료, 교육, 사회사업을 벌여 우리나라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1396 : 漢城府 西部 皇華坊, 聚賢坊
1751 : 西部 皇華坊 小貞洞契
1867 : 西部 皇華坊 小貞洞契 · 慶雲宮契
1895 : 西署 皇華坊 軍器寺契 大貞洞 ·小貞洞
1911 : 京城府 西部 皇華坊 大貞洞 ·小貞洞
1914 : 京城府 貞洞
1936 : 貞洞町
1943 : 西大門區 貞洞町
1946 : 西大門區 貞洞
1975 : 中區 貞洞





주교동(舟橋洞)

유래 : 배다리(舟橋)가 있으므로 해서 연유한 동명. 舟橋는 이 곳에 조선시대 임금이 거둥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보던 舟橋司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고도 함.
1396 : 漢城府 南部 樂善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 直梳里契
1895 : 南署 瓦有豆里契 後洞, 直梳里契 坪井洞 · 舟橋洞 · 孝橋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後洞 · 坪井洞 · 孝橋洞 · 昌廛洞
1914 : 舟橋町
1943 : 中區 舟橋町
1946 : 中區 舟橋洞





주자동(鑄字洞)

유래 : 이곳에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던 鑄字所가 있어 주잣골 · 주자동이라 불리운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鑄字洞契
1895 : 南署 薰陶坊 鑄洞契 鑄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鑄洞
1914 : 壽町
1943 : 中區 鑄町
1946 : 中區 鑄字洞




중림동(中林洞)

  中林洞이란 동명은 이곳을 이루고 있는 西部 盤石坊 藥田中洞과 翰林洞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따온 데서 비롯된다.
  중림동은 朝鮮 초 漢城府를 5부 52방의 행정구역으로 나눌 때 서부에 속하였다. 1910년 10월 한성부는 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에 예속되었고 1914년 4월 중림정이라 칭하였다. 1943년 6월 구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서대문구 중림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고유의 명칭으로 바꿈에 따라 중림정은 중림동이 되었으며 1975년 중구 중림동으로 구역변경이 있었다.
  중림동에 있는 마을로는 가운뎃말, 한림골, 형제우물골을 들 수 있다.
  藥田峴 또는 약고개라 부르던 곳은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3가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長安에 약을 공급하였다 하여 붙여진 洞名이며, 이 근방에서 약밥을 만들어 파는 노파가 있었다 해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근래에는 「이명래고약」으로 유명해 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역 뒤 고가도로가 있는 지점에서 아현삼거리로 가는 언덕길로 나서면 중림동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 길게 뻗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옛 藥峴이다.
  중림동 149-2번지에는 사적 제252호로 지정된 1893년 지어진 藥峴聖堂이 있다.





초동(草洞)

  초동(草洞)은 초전동(草廛洞)의 약칭으로 지금도 초전골로 전해오며, 개초(蓋草), 마(麻), 갈(葛) 등을 가공하지 않고 재료 그대로 파는 초물전(草物廛)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동명이다.
  초동은 조선 초 한성부의 행정구역이 5부(部) 52방(坊)으로 정해질 때 남부(南部) 훈도방(薰陶坊)지역에 속하였다. 「훈도(薰陶)」라는 이름은 인물을 훈화 도야함을 의미한다.  영조(英祖) 27년(1751)에 작성된「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초동은 남부 훈도방 박정계(朴井契)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남서(南署) 박정계(朴井契) 초전동(草廛洞), 이동계(履洞契) 이동(履洞), 궁기동계(宮基洞契) 궁기동(宮基洞)이 되었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1914년 남부 훈도방(薰陶坊) 궁기동(宮基洞), 초동(椒洞), 초동(草洞), 이동(履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약초정(若草町)이라고 하였다. 1943년 중구 약초정(若草町)이 되었다가 1946년 중구 초동(草洞)으로 되었다.
  초동에는 궁기동(宮基洞), 전주묵(全周墨)골, 초전(草廛)골, 초정(椒井)골 등 4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궁기동(宮基洞)은 현재 초동, 충무로3가, 저동2가에 걸쳐 있는 마을인데 저동2가에 영희전(永禧殿)이 있었으므로 궁텃골이라고도 하였다. 또 전주묵(全周墨)골은 초전골에 있던 마을로서 밭 가운데 매운 물맛으로 이름난 초정이 있었으므로 전초우물골 또는 전주묵골이라고 하였고, 초전골은 초동, 충무로3가, 입정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초정이 있었으므로 초정ㄷ골이라고 하였는데 그후 음이 변하여 초전골 또는 초동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초정골은 초동, 충무로3가, 을지로3가에 걸쳐 있던 마을인데 후추우물인 초정이 있으므로 초정골 또는 초동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초동은 초전이 있었던 시전거리였다. 서울의 시전은 수도 건설 때 같이 만들어졌다.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고 즉위 3년에 한양을 서울로 정하고 옮긴 후 궁궐을 세우고 성곽을 쌓으면서 정종 원년(1399)에 시전 건물을 세울 계획을 하였으나 이해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여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지 5년 후인 태종 10년(1410)에 시전 건물을 세우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서울의 시전 건물은 1412년부터 다음해 5월가지 4차에 걸쳐 모두 이루어졌다. 정부는 시전 건물을 세운후 일반 상인에게 빌려주고 일정한 상세(商稅)를 징수하였는데 그 금액은 점차 증가하였다.
  시전의 기능은 대체로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울 주민의 생활품을 조달하는 기능이고, 둘째 정부가 필요로 하는 관수품을 조달하는 기능이며, 셋째 잉여품이나 외국사신 일행이 가져오는 물품 중 정부가 처리하지 못하는 분량을 정부의 위촉으로 처리하는 기능이다. 조선 초기의 시전은 국가에 상세를 내는 대신 국가로부터 금난전권(禁難廛權)을 부여받아 독점권을 행사했으나 점차 난전이라 하는 민간상인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갖고 있던 독점권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충정로1가(忠正路1街)

유래 : 을사조약을 순국 자결함으로써 반대한 忠正公 閔永煥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동명
1396 : 漢城府 西部 盤松坊
1751 :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 京營庫契 · 菌匠里契
1867 : 西部 盤松坊(城外) 池下契 · 京營口契 · 菌匠里契
1895 : 西署 盤松坊(城外) 池下契 平洞, 京口契 京橋 · 新門外, 菌匠里契 雇馬洞
1911 : 京城府 西部 盤松坊 平洞 · 京口 · 雇馬洞 · 京橋 · 新門外
1914 : 竹添町1丁目
1943 : 西大門區 竹添町1丁目
1946 : 西大門區 忠正路1街
1975 : 中區 忠正路1街




충무로1가(忠武路1街)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 好賢坊
1751 : 南部 明禮坊 明禮洞契, 好賢坊 好賢洞契 · 長興洞契
1867 : 南部 明禮坊 明禮洞契, 會賢坊 會賢洞契 · 長興洞契
1895 : 南署 明禮坊 明洞契 明洞 · 大龍洞契 大龍洞, 會賢坊 會洞契 會同 · 大龍洞契 大龍洞 · 長洞契 駱洞 · 長興洞契 長興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明洞 · 大龍洞, 會賢坊 駱洞 · 長洞 · 會洞
1914 : 本町1丁目
1943 : 中區 本町1丁目




충무로2가(忠武路2街)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禮坊 · 薰陶坊
1751 : 南部 明禮坊 明禮洞契, 薰陶坊 鑄字洞契 · 苧廛洞契
1895 : 南署 明禮坊 明洞契 明洞 · 鍾峴契 鍾峴洞 · 苧洞契 苧洞, 薰陶坊 鑄洞契 鑄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禮坊 苧洞 · 明洞 · 鍾峴洞, 薰陶坊 鑄洞
1914 : 本町2丁目
1943 : 中區 本町2丁目
1946 : 中區 忠武路2街




충무로3가(忠武路3街)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鑄字洞契 · 朴井契
1895 : 南署 薰陶坊 朴井契 草洞 · 椒洞, 宮基洞契 宮基洞, 鑄洞契 鑄洞, 筆洞契 筆洞, 誠明坊 筆洞契 筆洞, 草洞契 草洞, 鑄洞契 鑄洞
1911 : 京城府 南部 薰陶坊 草洞 · 鑄洞 · 宮基洞 · 椒洞, 薰陶坊 筆洞
1914 : 本町3丁目
1943 : 中區 本町3丁目
1946 : 中區 忠武路3街




충무로4가(忠武路4街)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樂善坊 · 誠明坊
1751 : 南部 樂善坊 瓦有豆里契, 誠明坊 蓮城尉契
1895 : 南署 樂善坊 墨洞契 墨洞 · 筆洞契 筆洞 · 蓮城尉契 晦洞 · 日館洞契 生民洞 藝洞 · 瓦有豆里契 五宮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五宮洞 · 藝洞 · 筆洞 · 晦洞 · 墨洞 · 生民洞
1914 : 本町4丁目
1943 : 中區 本町4丁目
1946 : 中區 忠武路4街




충무로5가(忠武路5街)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南部 明哲坊 · 樂善坊
1751 : 南部 明哲坊 雙林洞契, 樂善坊 瓦有豆里契
1895 : 南署 明哲坊 雙林洞契 雙林洞 · 五壯洞契 五壯洞 · 日館洞契 沈橋洞 · 冶峴洞契 冶峴洞, 樂善坊 瓦有豆里契 沈橋洞 五壯洞 · 墨洞契 墨洞
1911 : 京城府 南部 明哲坊 雙林洞 · 五壯洞 · 冶峴洞, 樂善坊 沈橋洞 · 墨洞
1914 : 本町5丁目
1943 : 中區 本町5丁目
1946 : 中區 忠武路5街




태평로1가(太平路1街)

유래 : 인근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太平館의 이름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餘慶坊 · 皇華坊
1751 : 西部 餘慶坊 西學內契 · 西學洞契 · 毛廛契, 皇華坊 小貞洞契
1895 : 西部 餘慶坊 西學峴契 西學洞 · 廣濟橋契 舊西部洞 · 毛橋契 篩洞, 皇華坊 軍器寺契 大貞洞
1911 : 京城府 西部 餘慶坊 西學洞 · 舊西部洞 · 西學峴 · 篩洞, 皇華坊 大貞洞 · 軍器寺
1914 : 太平通1丁目
1943 : 中區 太平通1丁目
1946 : 中區 太平路1街




태평로2가(太平路2街)

유래 : 인근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太平館의 이름에서 유래
1396 : 漢城府 西部 皇華坊 · 養生坊 · 盤石坊, 南部 好賢坊
1751 : 西部 皇華坊 西小門契 小貞洞契, 養生坊 太平館契, 盤石坊 蓮池契
1895 : 西署 皇華坊 西小門內契 人車橋 館井洞?軍器寺契 大貞洞, 養生坊 太平洞契 太平洞 生祠洞 七間洞, 尙洞契 尙洞, 盤石坊 蓮池契 陽洞, 南署 會賢坊 美洞契 美洞
1911 : 京城府 西部 皇華坊 大貞洞 · 館井洞 · 卜車橋洞, 養生坊 生祠洞 · 尙洞 · 太平洞 · 七間洞, 盤石坊 陽洞, 南部 會賢坊 石井洞
1914 : 太平通2丁目
1943 : 中區 太平通2丁目
1946 : 中區 太平路2街




필동1가(筆洞1街)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鑄字洞契
1895 : 南署 誠明坊 筆洞契 筆洞, 鑄洞契 鑄洞 · 南學洞
1911 : 京城府 南部 誠明坊 筆洞 · 鑄洞 · 南學洞
1914 : 大和町1丁目
1943 : 中區 大和町1丁目
1946 : 中區 筆洞1街




필동2가(筆洞2街)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墨井契
1895 : 南署 樂善坊 筆洞契 筆洞 · 墨洞契 墨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墨洞 · 筆洞
1914 : 大和町2丁目
1943 : 中區 大和町2丁目
1946 : 中區 筆洞2街




필동3가(筆洞3街)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1396 : 漢城府 南部 薰陶坊
1751 : 南部 薰陶坊 墨井洞契
1895 : 南署 樂善坊 墨洞契 墨洞
1911 : 京城府 南部 樂善坊 墨洞
1914 : 大和町3丁目
1943 : 中區 大和町3丁目
1946 : 中區 筆洞3街




황학동(黃鶴洞)

  黃鶴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6년에 만든 「大京城精圖」에만 해도 이곳이 대부분 논밭이었는데 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신당5동 관내에 옛날 자연부락의 하나인 白鶴洞이 있기 때문에 대비한 黃鶴洞의 동명유래를 가능하게 한다.
  조선초 한성부를 5部 52坊으로 나눌 때 한성부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英祖 27년(1751)에 반포된 「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한성부 南部 豆毛坊(城外) 神堂里契였으며 갑오개혁 때는 新堂洞으로 이듬해에는 新堂里町이 되었다. 1943년 6월에는 성동구 신당정이 되었다. 1946년 신당정은 신당동으로 개칭되었는데 1966년 흥인동, 무학동과 함께 황학동이 법정동으로 分洞되었다.
  청계천7가와 청계천8가 중간 즉 황학동에서 숭인동 숭신초등학교와 東廟로 나가는 교차로에 조선시대 때 가설된 永渡橋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지고 말았다.
  황학동 일대는 일제중기까지 거의 논밭이었으나 현재는 중앙시장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청계천이 복개된 길은 청계천로라 하는데 길옆에는 3·1상가아파트가 길게 늘어서 있고 3·1아파트 뒤편에는 황학동중고품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회현동1가(會賢洞1街)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1751 : 南部 好賢坊 好賢洞契 · 長興洞契
1867 : 南部 會賢坊 會賢洞契 · 長興洞契
1895 : 南署 會賢坊 會洞 · 長興洞契 長洞, 西署 養生坊 倉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會洞 · 琥珀洞, 西部 養生坊 倉洞
1914 : 旭町1丁目
1943 : 中區 旭町1丁目
1946 : 中區 會賢洞1街




회현동2가(會賢洞2街)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 明禮坊
1751 : 南部 好賢坊 好賢洞契 · 長興洞契, 明禮坊 掌樂院內契
1867 : 南部 會賢坊 會賢洞契 · 長興洞契, 明禮坊 掌樂院內契 南山洞
1895 : 南署 會賢坊 會洞契 會洞 · 長興洞契 長興洞, 明禮坊 南山洞契 南山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會洞 · 長洞, 明禮坊 南山洞
1914 : 旭町2丁目
1943 : 中區 旭町2丁目
1946 : 中區 會賢洞2街




회현동3가(會賢洞3街)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1396 : 漢城府 南部 好賢坊
1751 : 南部 好賢坊 好賢洞契 · 長興洞契
1867 : 南部 會賢坊 會賢洞契 · 長興洞契, 明禮坊 掌樂院內契 南山洞
1895 : 南署 會賢坊 會洞契 會洞 · 長洞契 長洞, 明禮坊 南山洞契 南山洞
1911 : 京城府 南部 會賢坊 駱洞, 明禮坊 南山洞
1914 : 旭町3丁目
1943 : 中區 旭町3丁目
1946 : 中區 會賢洞3街




흥인동(興仁洞)

  興仁洞의 동명은 동대문의 이름인 '興仁之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966년 7월 6일에 신당동에서 분동되었다.
  흥인동의 동명을 있게 한 興仁門은 속칭 동대문이라고도 하는데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조선 太祖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1396년에 건설한 문이다.
  흥인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관할구역에 속했고 1910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南部 豆毛坊(城外) 왕십리契 신당리동있었는데 이듬해 新堂里로 되었다. 1936년 신당리는 경성부 新堂町으로 편입되었고 1943년 성동구 신당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의 우리말 변경 원칙에 따라 성동구 신당동이 되었으며 1966년 성동구 興仁洞이 되었다가 1975년 중구 흥인동으로 구역변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