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中區)
광희동1가(光熙洞1街)
광희동2가(光熙洞2街)
남대문로1가(南大門路1街)
남대문로2가(南大門路2街)
남대문로3가(南大門路3街)
남대문로4가(南大門路4街)
남대문로5가(南大門路5街)
남산동1가(南山洞1街)
남산동2가(南山洞2街)
남산동3가(南山洞3街)
남창동(南倉洞)
남학동(南學洞)
다동(茶洞)
만리동1가(萬里洞1街)
만리동2가(萬里洞2街)
명동1가(明洞1街)
명동2가(明洞2街)
무교동(武橋洞)
무학동(舞鶴洞)
묵정동(墨井洞)
방산동(芳山洞)
봉래동1가(蓬萊洞1街)
봉래동2가(蓬萊洞2街)
북창동(北倉洞)
산림동(山林洞)
삼각동(三角洞)
서소문동(西小門洞)
소공동(小公洞)
수표동(水標洞)
수하동(水下洞)
순화동(巡和洞)
신당동(新堂洞)
쌍림동(雙林洞)
예관동(藝館洞)
예장동(藝場洞)
오장동(五壯洞)
을지로1가(乙支路1街)
을지로2가(乙支路2街)
을지로3가(乙支路3街)
을지로4가(乙支路4街)
을지로5가(乙支路5街)
을지로6가(乙支路6街)
을지로7가(乙支路7街)
의주로1가(義州路1街)
의주로2가(義州路2街)
인현동1가(仁峴洞1街)
인현동2가(仁峴洞2街)
입정동(笠井洞)
장교동(長橋洞)
장충동1가(奬忠洞1街)
장충동2가(奬忠洞2街)
저동1가(苧洞1街)
저동2가(苧洞2街)
정동(貞洞)
주교동(舟橋洞)
주자동(鑄字洞)
중림동(中林洞)
초동(草洞)
충정로1가(忠正路1街)
충무로1가(忠武路1街)
충무로2가(忠武路2街)
충무로3가(忠武路3街)
충무로4가(忠武路4街)
충무로5가(忠武路5街)
태평로1가(太平路1街)
태평로2가(太平路2街)
필동1가(筆洞1街)
필동2가(筆洞2街)
필동3가(筆洞3街)
황학동(黃鶴洞)
회현동1가(會賢洞1街)
회현동2가(會賢洞2街)
회현동3가(會賢洞3街)
흥인동(興仁洞)
유래 : 도성 8문 가운데 하나인 光熙門이 있던 것에서 유래 |
유래 : 도성 8문 가운데 하나인 光熙門이 있던 것에서 유래 |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
유래 : 南大門이 있는 데서 유래 |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
유래 : 남산 북쪽 기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산골이라고 불리던 동명에서 유래 |
유래 : 조선 宣祖 때 大同米와 布錢의 출납을 위해 설치된 宣惠廳의 창고가 있던 곳의 남쪽이라고 한 데서 유래 |
유래 : 조선 초 四部學堂의 하나인 南部學堂 즉 南學이 있었던 데서 유래 |
茶洞은 옛날 이 지역에서 차를 마시는 공식 예절(茶道)과 茶禮를 주관하던 司甕院(사옹원: 궁중에 음식 식품을 조달하던 관청)에 속한 茶房이 있었기 때문에 다방골이라 불렀던 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이 다방골을 한자로 고친 것이 茶洞이다. |
유래 : 萬里峴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되었으며, 만리재는 세종 때 文臣 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임. |
유래 : 萬里峴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되었으며, 만리재는 세종 때 文臣 崔萬里가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임. |
明洞의 동명 유래는 조선초 한성부의 행정구역 설정 당시 南部 明禮坊의 ‘明’자를 딴 것으로 원래 明禮坊 또는 明禮坊골이라고 하다가 줄여서 명동이라고 하였다. |
明洞의 동명 유래는 일찍이 조선초 漢城府 南部 明禮坊의 ‘明’자를 따서 명례방골 또는 명례방이라고 하였다가 이를 줄여서 명동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
武橋洞의 동명은 시청 뒤쪽에서 무교동으로 통하던 모교(毛橋)라는 토산 과일을 팔던 모전(毛廛)다리에서 유래한다. 여기에 무교(武橋)라는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은 옛날 이 부근에 무기의 제조 관리를 맡아 보던 군기사(軍器寺)라는 관청이 있어 모전다리 부근에 있던 모교동(毛橋洞)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교동(武橋洞)이라 하였다. 이 毛橋와 武橋의 발음이 비슷하므로 민간에서 그대로 武橋로 불렀던 것 같다. |
舞鶴洞은 舞鶴峰(표고 92m)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으로 학이 이곳 봉우리에 와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무학봉이 되었다. 舞鶴이라는 명칭이 호칭된 것은 무학봉 남쪽 기슭에 있던 동네를 무학골이라 한 데서 시작된다. |
유래 : 먹절 혹은 墨寺로 부르던 절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먹절골이라는 마을에 매우 깊어 늘 시커멓게 보이므로 감정우물이라 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바로 이 '먹절골의 감정우물'이라는 뜻에서 동명이 연유됨. |
유래 : 부근에 청계천 준설로 쌓인 흙이 마치 산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假山 또는 造山이라 부르던 곳에 심어져 있던 무궁화꽃의 향기가 매우 아름답다하여 동명이 유래 |
유래 : 蓬萊橋의 다리 이름에서 연유함 |
유래 : 蓬萊橋의 다리 이름에서 연유함 |
北倉洞의 동명 유래는 조선시대 宣惠廳의 북쪽 창고가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 南倉洞에 대칭하여 남창동을 南米倉町이라 한데 대해 북창동을 北米倉町으로 하였다가 광복후 北倉洞이라 하였다. |
유래 : 옛 지명인 살리뭇골을 한자로 표기해서 붙인 이름. |
유래 : 지형이 서쪽은 넓고 동쪽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삼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유래 : 도성 8門의 하나인 西小門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
유래 : 太宗의 둘째 딸인 慶貞公主의 宮이 있었으므로 '작은공주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小公主洞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 小公洞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 |
유래 : 淸溪川의 水位를 측정하는 水標의 이름을 딴 데서 비롯됨 |
유래 : 남산에서 발원한 倉洞川이 흘러가는 물 아래쪽에 마을이 있어 ‘물아랫골’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 |
유래 :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변경할 때 巡廳洞의 '巡'자와 和泉町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함 |
新堂洞은 신당을 모신 동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동명으로 神堂이란
무당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령을 모신 집을 말하며 갑오개혁 때 神堂과 발음이 같은
新堂으로 바뀌었다. |
유래 : 마을 입구에 문을 세우고 지켜 도적을 경비하던 里門 한 쌍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 원래 雙里門洞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 쌍림동으로 됨. |
유래 : ① 조선시대에 이곳에 藝館(인쇄소인 校書館)이 있었기 때문에 예관골,예동이라 한데서 유래. |
유래 : 조선시대 5軍營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藝場이 있었던 것이 유래가 됨. 武藝場이 줄어 藝場이 됨. |
유래 : 옛날 이곳에 다섯 장사가 살았던 데서 '오장삿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 五壯洞이라 함. |
을지로는 1946년 10월 서울의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세종로, 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조선초기에 한성부 남부 호현방(好賢坊), 대평방(大平坊), 훈도방(薰陶坊), 명례방(明禮坊) 일원이었고,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에 예속되었고 1914년 동현(銅峴)의 이름을 따서 황금정(黃金町) 2정목(丁目)이라 하였다. 1943년 경성부의 구제도 실시로 중구 황금정 2정목이 되었다. |
을지로 3가의 동명은 세종로나 충무로 등과 같이 우리나라 역사적 위인의 한분인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
을지로4가의 동명은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비롯된다. |
을지로5가의 동명은 살수대첩의 영웅인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에서 연유한다. |
유래 : 1946년에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乙支文德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붙인 것 |
유래 : 1946년에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한 분인 乙支文德 장군의 성을 동명으로 붙인 것 |
유래 : 1914년 日帝에 의해 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
유래 : 1914년 日帝에 의해 義州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
유래 : 인현동1가와 2가에 걸쳐 있던 '인성붓재'라는 고개 이름에서 취한 동명. 인성붓재는 이 고개 밑에 조선 선조의 7남 仁城君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서 仁峴이라 함. |
유래 : 인현동1가와 2가에 걸쳐 있던 '인성붓재'라는 고개 이름에서 취한 동명. 인성붓재는 이 고개 밑에 조선 선조의 7남 仁城君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줄여서 仁峴이라 함. |
유래 : 갓방 즉 갓을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으므로 동리 이름을 '갓방우물골'이라고 한 데서 연유함 |
유래 : 淸溪川 위의 다리인 長橋의 이름에서 유래 |
유래 : 부근에 있는 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동명 |
유래 : 부근에 있는 奬忠壇의 이름을 따서 생겨난 동명 |
유래 :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 |
유래 : 모시를 취급하는 상점인 苧布廛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 |
貞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 太祖 李成桂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은 데서 '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유래 : 배다리(舟橋)가 있으므로 해서 연유한 동명. 舟橋는 이 곳에 조선시대 임금이 거둥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보던 舟橋司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고도 함. |
유래 : 이곳에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던 鑄字所가 있어 주잣골 · 주자동이라 불리운데서 유래 |
中林洞이란 동명은 이곳을 이루고 있는 西部 盤石坊 藥田中洞과 翰林洞의 글자를 각각 한 자씩 따온 데서 비롯된다. |
초동(草洞)은 초전동(草廛洞)의 약칭으로 지금도 초전골로 전해오며,
개초(蓋草), 마(麻), 갈(葛) 등을 가공하지 않고 재료 그대로 파는 초물전(草物廛)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동명이다. |
유래 : 을사조약을 순국 자결함으로써 반대한 忠正公 閔永煥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동명 |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
유래 : 忠武公 李舜臣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 |
유래 : 인근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太平館의 이름에서 유래 |
유래 : 인근 서소문동에 있던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太平館의 이름에서 유래 |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
유래 : 이 마을에 조선시대 漢城府 5部 중 하나인 南部의 部事務所가 있어 部洞이라 하였는데 部洞이 와전되어 붓골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筆洞이 됨 |
黃鶴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1936년에 만든 「大京城精圖」에만 해도 이곳이 대부분 논밭이었는데 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신당5동 관내에 옛날 자연부락의
하나인 白鶴洞이 있기 때문에 대비한 黃鶴洞의 동명유래를 가능하게 한다. |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
유래 : 이 일대에 어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데서 유래되었으며 會賢,會洞으로 약칭되기도 하였음 |
興仁洞의 동명은 동대문의 이름인 '興仁之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1966년 7월 6일에 신당동에서 분동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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