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龍山區)        다른구 보기

 

 후암동(厚岩洞)  남영동(南營洞)  도동(桃洞)  갈월동(葛月洞)  동자동(東子洞)  용산동(龍山洞)

 

후암동(厚岩洞)

  후암이라는 동명은 동중에 후암(厚岩) 즉 「두텁바위」라 불리우는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고, 그 두텁바위가 있는 마을 이름을 바위 이름 그대로 「두텁바위」라 부르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두텁바위」의 마을 이름은「정성세」로도 불려지는데, 그것은 지금 후암동 370번지에 조선 초기부터 전생서(典牲署)라는 관청이 있어 그 부근을 전생서 마을로 부르던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생서가 변하여「정성세」로 된 것이다.

  전생서(典牲暑)는 이름 그대로 희생 즉 국가제사용 소, 돼지, 양 등을 맡아 기르던 관청으로서 판관(判官) 주부(主簿) 직장(直長) 봉사(奉事) 부봉사(副奉事) 참봉(參奉) 등의 관원이 잇어 일을 맡아하였으며 후에는 사축서(司畜署)를 병합하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영조(英祖)때 기록에 의하면 남부(南部) 둔지방(屯芝坊)(城外) 전생서(典牲暑) 내계(內契)와 외계(外契)에 속하였다 그 후 高宗朝 초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남부 둔지방(城外)에 전생서내외계가 있고, 갑오개혁 당시 문서 중에는 남부 둔지방 전생서내계에 전생동(典牲洞)이 속해 있었다. 따라서 본동의 옛날 공식 명칭은 전생서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전생서동(典牲暑洞) 또는 전생동으로 통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 전생동을 종래의 한강방(漢江坊)과 둔지(屯芝坊)을 합한 한지면(漢芝面)에 속하게 하였으며 1914년 이곳을 경성부 서부(西部)에 편입하고 다시 종전의 전생동 일원과 갈월리(葛月里)의 일부를 합하여 일제식 명칭 삼판통(三坂通)(町)으로 하였다.

  1943년 구제도를 시행할 때 용산구의 삼판통(三坂通)이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 삼판통(町)을 이곳 고유의 오랜 동명 중 두텁바위의 명칭을 취하여 후암동으로 고쳐 지금에 이르렀다.

  동중에는 지금도 계묵재 약수터, 고산절터, 구경바위, 냉정골짜기, 두텁사절터, 사정(射亭)터, 서낭당고개, 소꼽당버덩, 청학(靑鶴)정이 터, 청학정 폭포, 치마바위, 도락다리(石鶴洞), 쇠경재(孝峴), 양짓말, 어수(御水) 우물, 임당(林塘)말 등 예전 지명 물명 등이 많이 전해진다.

 

남영동(南營洞)

  남영동의 동명은 서울 남쪽에 군영(軍營)이 있었던 것에서부터 연유된다.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 한강변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아울러 병영을 설치하였다고 하지만, 문서상이나 유적으로써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또 갑오개혁 당시의 문서에는 이 부근이 남서(南署) 둔지방내(屯芝坊內) 전생동(典牲洞) 갈월동(葛月洞) 와서동(瓦署洞) 이태원동(梨泰院洞) 등의 동명으로 보이지만 군영과 관계되는 동명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남영동의 동명은 일제의 침략세력이 들어오면서부터 부근에 군영 연병장이 설치되고 그 후 일제식 동명 연병정(練兵町)이 생긴 것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식 동명 연병정이 남영동으로 고쳐진 것은 1946년의 일이다.

  남영동은 조선초에 성저십리(城底十里)에 속하였고 조선중기때에 둔지방(城外)이 두어지면서 이태원계(梨泰院契)의 일부였던 것 같다. 1911년 경기도 한지면(漢芝面)으로 되었으나 1913년 다시 원흥동(元興洞)으로서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한강통(漢江通)이라고 불리었으나 1941년부터는 연병정이라고 하였다.

 

도동(桃洞)

  도동은 글자 그대로 「복숭아골」의 한자이름으로서 지금의 도동 1가 2가 및 동자동(東子洞)에 걸쳐 있는 마을 부근에 복숭아나무가 많음으로 하여 복숭아골로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및 명칭의 개정이 있었을 때는 도동의 일부를 일제식 동명의 길야정(吉野町) 1정목(丁目)으로 하고, 우수현(牛首峴)과 도동 대리문동(大里門洞)의 일부를 합하여 길야정(吉野町) 2정목(丁目)으로 하였다. 1943년 구제도가 실시되면서 서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고유의 명칭으로 고치면서 일제식 동명의 길야정 1,2정목을 도동(桃洞) 1, 2가(街)로 고쳐 중구에 속하게 하였다.

  1975년 서울의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도동 1, 2가의 대부분이 용산구로 편입되었다.

  도동에서 후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우수재 즉 우수현(牛首峴)이라 하고 부근의 마을이름도 고개이름 그대로 우수재 또는 우수현으로 불려오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우수선생(牛首先生)이라는 학자가 살았던 것에서 연유된 이름이라 한다. 이 우수재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이면 남문 안과 남문 밖의 젊은이들이 이 우수재로 모여 들어 서로 공격하는 편싸움을 하여 마포의 만리재, 종로의 비파정, 도대문 밖 안감내, 신당동의 무당내와 함께 서울의 편 싸움터로 유명하였다. 또 도동과 동자동의 경계가 되는 고개를 송경재 즉「誦經峴(송경현)」이라 하는데 그것은 선조(宣祖)朝의 문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부근에 살면서 경전을  낭송하던 것에서 계기(繼起)된 이름이다.

  도동에는 사축섯골, 큰이뭇골, 작은 이뭇골, 남관왕문, 도리동 등 유래가 오래된 마을이름들이 지금도 전해진다. 도동1가에는「남묘(南廟)」로 통칭하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는데 관왕은 중국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關羽)를 말하는 것이다.

도동1가 관왕묘 맞은 편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 지덕사(至德祠)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사당은 영등포구 상도동(上道洞) 대군의 묘소 밑으로 옮겨진후 지금도 필적, 유물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갈월동(葛月洞)

  갈월동의 동명은 부근에 칡이 많았기 때문이라 하고 혹은 갈월도사(葛月道師)가 살았다는 것에서부터 연유되어 전해오지만 확실한 고증자료는 없다. 고종(高宗)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서울 5부(部)의 방(坊), 계(契)명 가운데 남부(南部) 둔지방(屯芝坊)이나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에도 갈월동의 이름은 없었고 다만 갑오개혁 당시의 문서에 비로소 남서(南署) 둔지방성외(屯芝坊城外)에 갈월리계 갈월리동의 명칭이 보인다. 1914년 전의 갈월동을 나누어 그 일부를 망기정(罔崎町)으로 하고 일부는 전생동(典牲洞)과 합하여 삼판통(三坂通)으로 하였다. 그 후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의 명칭으로 바꿀 때, 망기정을 바꾸어 다시 갈월동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당시 일제가 본래의 갈월동(리)을 망기정으로 고친 이유는 러일전쟁(露日戰爭)후 서울에 주둔하였던 일본군 사단장 罔崎生三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갈월동을 옛날에는 「부륵배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 갈월동 14번지 옛마을 부근에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온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또 갈월동에는 옛날 어수(御水)를 봉하였다는 「어수우물」과 근처에 큰 회나무가 있음으로 하여「회나무 우물」로 부르던 우물이 있어 유명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옛 일로 전할 뿐 그 모습을 찾아 볼 길이 없다.

 

동자동(東子洞)

  육전조례와 갑오개혁 당시 문서 중에서도 동자동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데 이러한 여러마을로 멀리 또는 가깝게 둘러 싸여 있던 까닭에, 처음에는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었던 것 같다. 1914년 경성부의 고시정(古市町)으로 개편되었을 때에도 동자동은 일제식 동명인 고시정으로 되어있을 뿐이고 동자동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다시 도동 신촌동(新村洞) 석교동 주교동(舟橋洞) 갈월리(葛月里)의 일부를 편입하여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3년 동자동은 한때 서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동자동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1975년 용산구 동자동으로 개편하게 된 것이다.

  지형적으로 동자동은 옛날 여러 마을들을 포함 내지는 분할한 상태에 있었던 만큼 많은 동명이 전해진다. 「돌다릿골」은 지금 동자동과 서계동(西界洞)에 걸쳐있는 마을로서 옛날 서부(西部) 반석방(盤石坊) 석교계(石橋契)에 속했던 석교동(石橋洞)으로 마을에 돌다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서계동과 동자동 사이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배다릿골」이 있는데 이 역시 반석방 석교계에 속했던 주교동(舟橋洞)이다. 동명의 유래는 지금 서울역 부근에 배다리라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진다.

  동자동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서울역이다. 현재는 서울역사가 중구 봉래동 2가 12번지에 있지만 서울역은 우리나라 교통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개화사측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처음 서울역이 이루어진 것은 광무(光武) 4년 (1900)의 일이었다. 이 당시 서울역의 명칭을 「남대문역」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종래의 이 지역을 숭례문 또는 남대문 밖이라 부르던 것에서부터 연유되었다. 서울역의 건물은 처음 남대문역 시절에는 단층 목조의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이 세워진 것은 경성역(京城驛)으로 이름이 바뀌고 난 뒤인 1925년 9월에 준공한 것이다.

 

용산동(龍山洞)

  지금의 용산동 일대는 남산의 연맥이 후암동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내려간 구릉지대로서 조선시대 고종(高宗)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하여 인가가 희소하던 곳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일본인들이 거류하면서 차츰 부락의 형태를 갖추어 1940년대에는 이미 용산정(龍山町) 1,2,3,4,5,6정목(丁目)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46년 일제식 명칭을 우리동명으로 바꾸면서 그에 다라 종전의 용산정 1,2,3,4,5,6정목을 용산동(龍山洞) 1,2,3,4,5,6가(街)로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용산동 1,2가를 일반적으로 해방촌(解放村)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8.15해방과 더불어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월남동포들이 이 부근 산기슭에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고 많이 살게된 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용산동 또는 용산동의 명칭이 되기도 한 서울의 용산(龍山)은 도성 서쪽 모악(母嶽)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을 지나서 서쪽으로 한강변을 향하여 꾸불꾸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틀어나아간 것 같고 또 한강변 지금 용산구와 마포구의 경계에서는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한 것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또 그 아래에 흘러가는 강류를 옛날에는 용산강(龍山江)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 용산을 중심으로 하여 남대문 밖 청파(靑坡)에서 마포강변에 이르는 지역에 도성밖의 한 방(坊)으로 용산방(龍山坊)이 설치되었으며 그 용산방의 대부분은 후에 다시 경성부의 용산면 및 용산출장소로 되었다가 1943년 구(區)제도가 신설됨에 따라 용산구로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