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廣津區)

 

 

 광장동(廣壯洞)
 
구의동(九宜洞)
 
군자동(君子洞)
 노유동
 
능동(陵洞)
 
모진동(毛陳洞)
 
자양동(紫陽洞)
 
중곡동(中谷洞)
 
화양동(華陽洞)

 

 

 

 

 

 

광장동(廣壯洞)

  광장동(廣壯洞)의 동명은 원래 조선시대에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의 광진리(廣津里 ; 일명 광나루)와 장의동(壯儀洞)이 통합되었으므로 광진동의 「廣」자와 장의동의 「壯」자를 따서 광장동(廣壯洞)이 된 것이다. 광장동 지역은 광진리 장의동 외에 산의동(山宜洞) 일부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여 광장리(廣壯里)로 칭하였다. 그 후 광장리는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이때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전부를 서울시에 편입시키면서 독도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이에 따라 이 洞도 성동구 광진리(廣津里)라 칭하였다가 1950년 광진리는 광장동으로 고쳐져 현재에 이른다.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광장동에 있는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 하여 얻어진 이름인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卷3 한성부(漢城府) 산천조(山川條)를 보면
「한강 물이 광주(廣州) 지경에 와서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진(廣津)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된다.」
고 하여 광진의 위치가 광주(廣州) 땅 도미진의 하류, 삼전도의 상류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同書 卷11 경기도 양주목조(楊州牧條)를 보면,
「광진은 州 남쪽 67里에 있는데 일명 광진(廣津)이며 도미진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春川府)의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의 금탄(金灘)이 합하여 이 나루가 된다. 」고 하였다.
  따라서 광진의 일명은 양진(楊津)임을 알 수 있다. 또 광나루 서쪽의 용당산(龍堂山)에 있는 신라 때 부터의 제단을 양진사(楊津祠)로 이름하였음을 보면 광진의 전 이름이 양진임을 알 수 있다.

  광장동 뒤에 있는 아차산(峨嵯山)은 일명 아차산(阿且山)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하던 싸움터로 알려졌다. 아차산위에는 고찰 대성암(大成菴)이 있고, 산아래 절골로 불리어지는 곳에는 영화사(永華寺)라는 절이 있다.
  1962년에는 아차산 중턱,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현대식 건물 「워커힐」이 세워졌다. 이 워커힐은 UN군의 주말 휴양을 위하여 세워진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휴양시설이었으며 건물의 이름도 6.25전쟁중 서울북방에서 전사한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장군의 이름을 취하였다.

 

 

구의동(九宜洞)

  구의동(九宜洞)의 동명은 일제초 1914년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의 구정동(九井洞)과 산의동(山宜洞)이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으로 편입될 때 구정동의 「九」字와 산의동의 「宜」字를 따서 구의리(九宜里)가 된 것이다. 1949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전부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구의리가 되었고 1950년 구의동(九宜洞)으로 개칭되었다. 그후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구의동에 통합되기 전의 구정동(九井洞)은 9개의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구정동으로 불리어 졌으며 구정동내에도 주막거리, 웃말, 아랫말이 각각 있었다. 산의동(山宜洞)은 산비탈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한다.

 

군자동(君子洞)

 군자동(君子洞)의 동명은 1914년 장내능동(場內陵洞)이라고 부르던 이곳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에 편입시키면서 군자리(君子里)로 하였다 그런데 군자리의 동명은 백제(百濟)때 부터 있었다고 하나 믿기는 어렵고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동하다가 마침 이곳 東二路邊(남일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임금의 아들을 낳은 곳이라 하여 이곳을 군자동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 부른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高楊州面)에 속하였으며 갑오개혁(1894)때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 전관계(箭串契)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場內陵洞)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1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군자리(君子里)가 되었다. 1949년 고양군 독도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군자리로 되었으며 1950년 군자동(君子洞)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군자동의 한 가운데로는 멀리 의정부 방면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中浪川)이 있는데, 이 중랑천은 옛날부터 중량천(中良川), 중량천(中梁川) 등으로 기록되어 왔으며, 또 하류는 하천폭이 넓어 중량포(中良浦), 중량포(中梁浦)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중랑천의 中浪, 中梁, 中良 등의 명칭은 한자의 良, 梁, 浪과 함께 우리말 음의 량, 랑이 그 글자이나 음이 서로 유사한데에서 온 변전(變轉)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능동(陵洞)

  능동(陵洞)의 동명은 광무(光武)8년(1904)에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閔氏)의 유능(裕陵)을 모셨으므로 陵말, 능리(陵里)라 했고, 또 마장(馬場)의 안쪽에 있었으므로 장안말, 안말 도는 한자명으로 장내리(場內里)·내리(內里)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의 일부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이후 한성부 5서(署)에 편입되어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 전관계(箭串契) 능동(陵洞)이 되었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능동(陵洞)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편입되어 능리(陵里)가 되었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능리가 되었다. 이후 1950년 능동(陵洞)으로 고쳐졌다가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어린이대공원이 유능(裕陵)터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의 비(妃)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閔氏)의 능터이다.
 능동은 왕족의 능이 있던 까닭으로 능지기인 참봉이 거주했으며 이 참봉의 세도는 대단하였다. 현재 대공원 입구에는 「동구다리」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은 살곶이 개천까지 연결되어 한강으로 흘러갔다고 하난 지금은 왕복 8차선의 도로로 변했다.

 

모진동(毛陳洞)

  모진동(毛陳洞)의 동명(洞名)은 일제초 1914년에 장내능동(場內陵洞)을 고양군 둑도면에 편입시킬 때 모진리(毛陳里)라고 처음 제정하였다. 모진동의 유래는 신빙성은 적지만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 온다. 조선시대 전관평(箭串坪)의 양마장(陽馬場)이 이 근처까지 있었는데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 곳 여인들이 수렁위에 널빤지를 띄워 놓고 들어가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한다. 이에 인근주민들이 이 동네의 여인들을 보고 모진女人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 한다.

  모진동은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있었으나 갑오개혁때 한성부(漢城府)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말엽에는 두모방(豆毛坊)(城外) 전관계(箭串契) 장내능동(場內陵洞)이라고 하였으며 한일합병후 1911년 일제는 이곳을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1914년 모진동은 경기도에 속해 고양군 둑도면 모진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모진리는 경기도로부터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고 1950년 3월 15일 모진동(毛陳洞)으로 개칭되었다.

 

자양동(紫陽洞)

 자양동(紫陽洞)의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이곳에 암말을 길러 자마장리(雌馬場里)로 호칭되던 것이 일제 때 전음되어 자양동(紫陽洞)으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 자마장리(雌馬場里) 율동(栗洞)의일부로 되었는데 1914년 자마장리와 율동 일부를 통합해서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纛島面) 자마장리(雌馬場里)가 되었다. 자마장리는 자양리(紫陽里)로 고쳐졌으며 해방후 1949년 독도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에도 자양리의 명칭은 변함이 없었다가 1950년 자양동(紫陽洞)이 되었다.

  이곳은 조선초 나라에서 말 1,000마리를 기르면 용마(龍馬)가 난다 하여 암말 즉 자마(雌馬)를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雌馬場)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곡동(中谷洞)

  중곡동(中谷洞)의 동명이 있게된 것은 이 洞이 능말(陵洞)과 면목동(面牧洞)의 가운데 있으므로 가운데말,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리(中谷里)라 하였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했는데 갑오개혁(1894)때 문서를 보면 이때부터 한성부에 편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초까지 경성부(京城府) 두모면(豆毛面) 장내중곡리(場內中谷里)라고 부르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중곡리(中谷里)로 되었다. 1949년 고양군 독도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성동구 중곡리로 되었고 1950년 중곡리는 중곡동(中谷洞)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중곡동은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

  중곡동에는 사적이 거의 없으나 옛마을 이름으로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골」, 골짜기가 길므로 「긴골」또는「진골」, 골짜기에 있는「군장골」또는「군정골」이란 명칭이 남아있다.

 

화양동(華陽洞)

  화양동(華陽洞)의 동명(洞名)은 70年 前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華陽亭)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또 일설에는 이 곳을 회행리(回行里)라고 하였다. 즉 조선왕조 단종(端宗)이 숙부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 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부인과 이별하면서 부인이 꼭 回行하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회행리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해 있었으며 갑오개혁때 한성부(漢城府)에 편입되었다. 한일합병후 일제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고 경성부 두모면 場內陵洞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화양리가 되었으며 1950년 3월 15일 화양동으로 고쳐졌다.

  화양정(華陽亭)은 건국대학교 부속병원(민중병원) 서쪽언덕 화양동 110번지 32호에 있었으나 1911년 7월 21일 낙뇌로 내려앉아 그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자가 세워진 때는 世宗 14년(1432)인데 주서(周書)에 「歸馬于華山之陽(귀마우화산지양)」이란 말이 있으므로 이 뜻을 따서 華陽亭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