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東大門區)
답십리동(踏十里洞)
신설동(新設洞)
용두동(龍頭洞)
이문동(里門洞)
장안동(長安洞)
전농동(典農洞)
제기동(祭基洞)
청량리동(淸凉里洞)
회기동(回基洞)
휘경동(徽慶洞)
유래 : ① 조선초 無學大師가 王都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동명을 踏尋里라 했다는 口傳이 전해짐.
② 都城 즉 東大門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往十里와 같이 踏十里라는 동명이 붙여짐. |
신설동은 조선중기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城外)에 대호 설치된 마을이므로 신설계(新設契)라 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즉 영조(英祖) 27년(1751)의 기록에 처음으로 신설계가 나타나고 있다. |
용두동의 동명은 이 동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리라고 조선말에 붙인 것이다. |
유래 : 마을에 도둑을 지키는 里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우리 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里門洞’이라 함. |
유래 : 조선시대 牧馬場으로 유명했던 '장안벌', 즉 長安坪에서 유래됨. 1975년 中谷洞 · 陵洞 · 君子洞이 성동구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됨에 따라 그 일부를 통합하여 신설한 마을로 서울시 洞名沿革으로서는 연륜이 짧은 마을임. |
전농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의 친경지였던 적전(籍田;일명 典農)이 있었기 때문에 전농리(典農里)라고 명명되었다. |
제기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풍농(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이 마을에 친경대(親耕臺)(先農壇)를 만들고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는 데에 동명의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조선 6대왕인 성종(成宗)이 자신의 친경지인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친제(親祭)를 거행한 뒤부터 동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나, 민간에 불려지기는 자연부락 명칭인 방아다리, 계터(제터) 등으로 통칭되었으며 조선시대 5백년간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되었다. |
유래 : 현재 청량 1동 2번지에 淸凉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 淸凉寺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청량사가 있는 곳은 바리산의 푸른 樹林과 맑은 샘물이 흘러 여름철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아 옛날 피서지역으로 유명하였다함. |
유래 : 산 5번지에 연산군의 生母인 廢妃 尹氏의 묘소인 懷廟(懷陵 : 현 西三陵 경내 이장)가 있었던 데서 유래. 연산군 10년(1504)에 능으로 승격되어 懷陵이라했으며, 이 마을을 懷陵洞이라 하였다. 그 뒤 능이 다시 묘로 됨과 함께 懷墓洞으로 불렀으며, '懷'자가 다시 음이 같은 '回'자로 바뀌어 回墓洞 回墓里로 되었다가 回基里로 바뀜. |
유래 : 조선 純祖의 생모 緩嬪 박씨의 묘소 徽慶園이 있은 데서 유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