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東大門區)

 

 

  답십리동(踏十里洞)
신설동(新設洞)
용두동(龍頭洞)
이문동(里門洞)
장안동(長安洞)
전농동(典農洞)
제기동(祭基洞)
청량리동(淸凉里洞)
회기동(回基洞)
휘경동(徽慶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유래 : ① 조선초 無學大師가 王都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동명을 踏尋里라 했다는 口傳이 전해짐. ② 都城 즉 東大門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往十里와 같이 踏十里라는 동명이 붙여짐.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
1751 : 東部 仁昌坊(城外) 踏十里契
1895 :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踏十里契
1911 : 京城府 仁昌面
1914 :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1936 : 京城府 踏十里町
1943 : 東大門區 踏十里町
1946 : 東大門區 踏十里洞



신설동(新設洞)

  신설동은 조선중기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城外)에 대호 설치된 마을이므로 신설계(新設契)라 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즉 영조(英祖) 27년(1751)의 기록에 처음으로 신설계가 나타나고 있다.
 갑오개혁때에 다시 숭신방(城外) 東門外契의 신설동이 되었다. 신설동은 1914년 경성부의 5부(部) 8면(面)에 속하였다가 1943년 구(區)제의 실시에 따라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지면서 신설동 외 13개동이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시킴에 따라 신설정(新設町)은 신설동이라 하고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를 분리 신설할때에 신설동의 일부 지역은 성북구 보문동(普門洞)으로 편입되었다.
  신설동은 새말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새로 마을이 만들어 졌다는 뜻으로서 「新設」의 한자음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새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新里」이다.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에 설쳐 있는 타원형 모양의 지역을「우산골각」이라고 부른다.



용두동(龍頭洞)

  용두동의 동명은 이 동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용머리 또는 용두리라고 조선말에 붙인 것이다.
  용두동은 고종(高宗) 때 만든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처음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城外)의 제기리계(祭基里契)와 마장리계(馬場里契)에 속했는데 1894년 갑오개혁때 종래 한성부의 5부(部)를 5서(署)로 고침과 동시에 계(契)와 동(洞)을 늘릴 때에 제기리계와 마장리계에서 분리되어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의 용두리(龍頭里)로 되었다.
  1914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용두리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으로부터 경성부(京城府)에 편입되어 용두정(龍頭町)이라 하였다. 1943년 구(區)제가 처음 실시됨에 따라 용두정은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일제식 동명의 변경에 따라 용두정은 용두동(龍頭洞)으로 되었다.
  뚝방 사람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정릉천(貞陵川) 주변 사람들의 영구(靈柩;시체를 넣는 관)가 용두1동을 바로 뚫고 나가면 동네가 부정을 탄다해서 지금도 이 동을 우회하여 나가는데 그 까닭은 이 동네가 용의 허리부분에 해당되므로 이 지역을 밟으면 용이 화가 나서 꿈틀거려 재난(災難)을 가져오기 때문이라 한다.
  홍릉(洪陵) 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던 홍릉천(洪陵川)이 있어서 문 밖 사람들의 빨래터였던 「홍능내 빨래터」는 121번지의 오스카극장자리이고, 「정능내 빨래터」가 지금 미도파백화점 청량리지점 바로 옆이었다고 한다. 성북천(城北川), 정릉천 및 홍릉천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줄기가 용두동을 지나가고 있어 이 동은 물맛이 좋기로도 유명하였다.




이문동(里門洞)

유래 : 마을에 도둑을 지키는 里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 우리 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里門洞’이라 함.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1751 : 東部 仁昌坊
1895 :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里門洞
1911 : 京城府 仁昌面 里門洞
1914 :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1936 : 京城府 里門町
1943 : 東大門區 里門町
1946 : 東大門區 里門洞




장안동(長安洞)

유래 : 조선시대 牧馬場으로 유명했던 '장안벌', 즉 長安坪에서 유래됨. 1975년 中谷洞 · 陵洞 · 君子洞이 성동구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됨에 따라 그 일부를 통합하여 신설한 마을로 서울시 洞名沿革으로서는 연륜이 짧은 마을임.

조선시대 : 京畿 楊州郡 古楊州面
1895 : 漢城府 南署 豆毛坊(城外) 箭串契
1911 : 京城府 豆毛面 場內陵洞 · 場內中谷里
1914 : 京畿道 高陽郡 纛島面 陵里 · 君子里 · 中谷里
1949 : 城東區 陵里 · 君子里 · 中谷里
1950 : 城東區 陵洞 · 君子洞 · 中谷洞
1975 : 東大門區 長安洞




전농동(典農洞)

  전농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왕의 친경지였던 적전(籍田;일명 典農)이 있었기 때문에 전농리(典農里)라고 명명되었다.
이 마을도 도성 밖 10여리 거리에 있었지만 조선시대 500년간 한성부에 속하였다.
  전농리라는 동명은 조선초기부터 불리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태조 5년 (1396)에 도성 및 성저(城底)를 동서남북중의 5부(部) 52방(坊)의 방명(坊名)을 붙일 때 동부 12방 중 인창방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英祖) 27년(1751)에 도성수비를 위한 「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에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城外) 전농리계(典農里契)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仁昌坊)(城外)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의 전농리(典農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켰다가, 1936년 경성부 구역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숭인면 일부지역을 경성부에 편입시켰는데 이 때 전농리는 일제식 명칭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전농정(典農町)으로 개칭되었고, 1943년 동대문구의 관할내에 속하였다. 1946년 전농동으로 개명했다.
  조선시대 전농동의 자연부락과 그 명칭을 살펴보면 샛말, 활터말, 창방재, 창촌(倉村), 텃골, 월촌(越村), 성외동(城外洞) 등 7개 부락으로 구성되었다. 샛말은 작은 답십리(踏十里)와 구답십리(舊踏十里)의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사잇마을 또는 간촌(間村), 샛말이 와전되어 「샘말」등으로 불리어졌으며, 현재 전농1동에 속해있다. 활터마을은 궁촌(弓村)으로도 불리어졌는데 옛날 주위가 송림(松林)으로 풍치를 이루어 조선시대 활쏘는 장소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창마을은 조선시대 동적전(東籍田)에서 소출 되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창촌(倉村) 또는 창동(倉洞)이라고도 했는데 텃골과 접하고 있으며 현재 전농4동이다.




제기동(祭基洞)

  제기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풍농(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이 마을에 친경대(親耕臺)(先農壇)를 만들고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는 데에 동명의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조선 6대왕인 성종(成宗)이 자신의 친경지인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친제(親祭)를 거행한 뒤부터 동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나, 민간에 불려지기는 자연부락 명칭인 방아다리, 계터(제터) 등으로 통칭되었으며 조선시대 5백년간 한성부(漢城府)에 소속되었다.
  태조(太祖) 5년(1396) 도성 및 성저(城底)를 5部(東西南北中) 52방(坊)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할 때 인창방(仁昌坊)(城外)에 속했으며 영조(英祖) 27년(1751)에 반포된「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을 보면 한성부 동부(東部) 인창방(仁昌坊)(城外) 제기리계(祭基里契)로 나타난다.
  1914년 제기리는 성외라는 이유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켰다가 1936년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숭인면 일부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됨에 따라 제기동은 일제식 명칭에 따라 강제로 제기정(祭基町)이라 개칭되었다. 1943년 구(區)제가 실시됨에 따라 제기동은 동대문구 관할내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제기동의 자연부락과 그 명칭을 살펴보면 계터(제터)마을, 북제기, 방아다리, 보인계(保隣契)인, 용머리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계터란 제터의 구개음화의 변화로서 제기를 말하며 이곳에서 해마다 춘분과 추분에 왕이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선농단(先農壇)을 쌓고 친제(親祭)를 행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현재의 동명으로 되었으며 현제 제기2동에 해당된다 선농단에서 약 50m정도 떨어진 지점에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향나무는 조선 태조(太祖)가 이 나무아래에서 고붕(高朋)과 함께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는 것으로 보면 향나무의 연륜도 5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천연기념물 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렁탕에 대한 유래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조(太祖) 이성계는 등극한 다음해에 가뭄이 극심해서 기우제를 이곳에서 지냈는데 이 때 각도에서 참석한 백성들을 위하여 소를 잡아 끓여 뚝배기에 한 그릇씩 담고 깍두기를 넣어 먹게 한 것이 지금의 설렁탕인데 선농단(先農壇)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본디 음은 선농탕(先農湯)이나 와전되어 설렁탕으로 되었다고 한다.



청량리동(淸凉里洞)

유래 : 현재 청량 1동 2번지에 淸凉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 淸凉寺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청량사가 있는 곳은 바리산의 푸른 樹林과 맑은 샘물이 흘러 여름철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아 옛날 피서지역으로 유명하였다함.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1751 : 東部 仁昌坊(城外) 淸凉里契
1895 :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淸凉里
1911 : 京城府 仁昌面
1914 :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1936 : 京城府 淸凉里町
1943 : 東大門區 淸凉里町
1946 : 東大門區 淸凉里洞



회기동(回基洞)

유래 : 산 5번지에 연산군의 生母인 廢妃 尹氏의 묘소인 懷廟(懷陵 : 현 西三陵 경내 이장)가 있었던 데서 유래. 연산군 10년(1504)에 능으로 승격되어 懷陵이라했으며, 이 마을을 懷陵洞이라 하였다. 그 뒤 능이 다시 묘로 됨과 함께 懷墓洞으로 불렀으며, '懷'자가 다시 음이 같은 '回'자로 바뀌어 回墓洞 回墓里로 되었다가 回基里로 바뀜.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1895 :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回基里
1911 : 京城府 仁昌面 回基洞?餠店里
1914 :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回基里
1936 : 京城府 回基町
1943 : 東大門區 回基町
1946 : 東大門區 回基洞




휘경동(徽慶洞)

유래 : 조선 純祖의 생모 緩嬪 박씨의 묘소 徽慶園이 있은 데서 유래.

1396 : 漢城府 東部 仁昌坊(城外)
1895 : 東署 仁昌坊(城外) 東小門外契 徽慶園
1911 : 京城府 仁昌面 徽慶園
1914 : 京畿道 高陽郡 崇仁面 徽慶里
1936 : 京城府 徽慶町
1943 : 東大門區 徽慶町
1946 : 東大門區 徽慶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