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中浪區)       다른구 보기

1988년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분리 신설

 

 중화동(中和洞)
 
묵동(墨洞)
 신내동
 
상봉동(上鳳洞)
 면목동(面牧洞)
 망우동

 

 

 

 

 

 

 

 

 

면목동(面牧洞)

  면목동의 동명은 관내의 전관평(箭串坪)을 중심으로 한 목마장(牧馬場)과 관계가 있다. 그 중에도 면목동에는 「구문계」「고문계」「문계」「곰계」로 불리어지던 들판이 있었는데 이러한 우리말 이름들은 옛날 말을 먹이던 성(城)의 문이 있었음으로 하여 구문(舊門)계. 고문(古門)계로 불리어지고, 그것이 다시 변천하여 곰계, 문계로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란 우리말의 어떤 때나 곳의 중심 부분을 말하는 것인즉 여기의 계는 목장의 문이 있던 곳을 가리킨다. 그러면 「면목」이라는 지명은 말목장 또는 목문(牧門)의 소재지를 의미하는 지명으로 마목(馬牧) 또는 목문(牧門), 문목(門牧)의 의미와 유사하고, 또 목장을 앞에 두었다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는 면목으로 바뀌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면목동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고양주면(古楊州面)에 속했고 갑오개혁 때에는
    남서(南署)
       두모방(城外)  (豆毛坊)
             전관중,하계 면목리동 (箭串中, 下契 面牧里洞)
  으로 되었다. 1914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에 속하게 된다.        1949년 고양군에서 서울시로 편입되어 면목동으로 개칭되었다.

  면목2동과 휘경동(徽慶洞) 사이 중랑천(中浪川)에는 중랑교가 놓여있는데 지금의 다리는 1934년에 가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다리가 놓여진 것은 오랜 옛날부터였으며, 조선초기에는 태종(太宗) 8년(1408)에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을 양주(楊州) 검암산(黔岩山 ; 지금 東九陵)에 모시게 되면서부터 이 다리는 더욱 중요시되었고 석축(石築)으로 완전히 하게 되었다.

 

상봉동(上鳳洞)

  상봉동은 조선시대부터 상리(上里), 봉황동(鳳凰洞) 등의 자연부락을 통합하여 일제가 자의로 상리의 「上」자와 봉황동의 「鳳」자를 따서 상봉리(上鳳里)라고 붙인 데에서 연유된다. 이 동은 중화동(中和洞), 묵동(墨洞), 신내동(新內洞)과 같이 봉화산(烽火山)을 끼고 있으며 대한제국 시대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해 있었다.

  1914년 경기도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 망우리면의 상리, 봉황동, 중리(中里), 봉현리(烽峴里) 등의 각 마을 일부를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상봉리로 하였다. 그 후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자연부락 이름중 상봉동과 중화동 일대를 통칭하는「上里」는 위쪽에 있고 지대가 높은 마을이라 하여 웃마을이라고도 부르며, 상리는 현재 상봉동-중화동 일대를 통칭하기도 한다. 이 상리 안에는 약 500년 전부터 황씨가 처음 자리를 잡아 마을을 이룬 일종의 집성부락이 있었다. 상리 동쪽에는 약 400년 전부터 서씨가 처음 마을을 이루고 모여 살게 되었다 하여 「서촌」이라고 불렀다. 「방죽마을」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이것은 마을 앞에 방축(防築)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또 「內川」마을은 현재 중화극장 뒤쪽에 있는 마을로서 중랑천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중화동(中和洞)

  중화동의 동명은 예부터 봉화산(烽火山) 아래 자연부락인 가운데마을(中里)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中下里)로 칭하였는데 1963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중화동으로 고쳐졌다. 이때 중하리가 중화동으로 고쳐진 이유는 동민들의 의견이 「下」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로 「和」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하였기 때문에 중화동이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한 지명은 일제침략초까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망우리면(忘憂里面) 中里, 下里 일부지역이었다.  1914년 이곳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중하리(中下里)로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으로 인하여 중하리는 동대문구에 편입되고 그 동명도 중화동(中和洞)으로 개칭되었다.

「중리」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위치가 상리와 하리 사이에 있다하여 붙여진 것으로 서씨가 집단 거주하므로 「徐村」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하리라는 마을은 이름 그대로 다른 마을보다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해서 생긴 명칭인데 「舊동네」,「崔村」이라고도 부른다.

 

묵동(墨洞)

  묵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먹골」또는「먹굴」이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묵동은 옛날 이곳에서 먹(墨)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는 설과 문방사우의 하나인 먹을 이곳의 동명으로 붙여야 학문이 발달할 것이라는 비기설에 따라 묵동으로 정했다는 설이 남아 있다. 즉 현재 노원구에 있는 월계동(月溪洞)은 예전에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 모양이 마치 연적과 같아서 연촌(硯村) 또는 벼루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북역은 얼마전가지 연촌역(硯村驛)이라고 불렀다. 또한 하계동(下溪洞)은 필동(筆洞) 또는 붓골이라 불렀으므로 월계동, 하계동과 묵동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되므로, 이 감각형안에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송계원(松溪院)이 있었기 때문에 송계동(松溪洞)이라고 하였다. 그 후 조선말까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해 있었는데 일제가 1914년 경기도의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묵동리(墨洞里), 내동리(內洞里), 하리(下里)의 마을 각 일부를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묵동리(墨洞里)로 만들었다. 묵동은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나 196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중랑구가 신설되면서 중랑구관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