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江北區)

 

 

 미아동(彌阿洞)
 
번동(樊洞)
 
수유동(水踰洞)
 우이동

 

 

 

 

 

 

 

 

 

미아동(彌阿洞)

  미아동(彌阿洞)이란 이름은 조선말 고종(高宗)초의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敦岩峴)를 일명 미아리(彌阿里)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제7동에 있는 불당곡(佛堂谷)에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되너미고개에 대해 알아보면 18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씌어있고, 같은 시기에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와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적유현(狄逾峴), 적유현(狄踰峴)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우리말 되너미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이라 생각된다.
  원래 성북구의 돈암동이란 동명은 되너미고개에서 기원된 것인데 미아동 역시 이 고개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면 되너미고개에서 두개의 동명이 생긴 셈이다.

  한편 돈암동이 미아리고개라는 이름을 불리어진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일제 때 이곳 일대에 한국인전용공동묘지가 조성되었으므로 시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상여가 이 고개를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 미아리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이때부터 사람들이 미아리고개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 6.25동란 이후에는 이 고개로 많은 인사들이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갔으므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가 유행되기도 했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되너미고개의 명칭 유래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로 병자호란때 되놈(胡人)이 이 고개를 넘어 침입해 왔다고 하여 고개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현 돈암동 방면에서 길음동, 미아동을 경유하여 의정부로 나가는 길목인 이 고개가 끝나면 고개가 없으므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고 하였다. 또 다른 설로는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 쪽으로 오를 때에는 경사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지므로 다시 요기를 해야된다는 뜻, 즉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되너미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18세기경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에는 적유현(狄踰峴) 북쪽 바로 아래에 사아리(沙阿里)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미아리란 동명은 사아리에서 전음 된 것 같다. 즉 전에는 정릉동 지역을 사을한리(沙乙閑里)라고 칭하였으므로 사아리는 사을한리의 약칭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아리가 미아리로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말 고종(高宗) 2년(1865)에 편찬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城外) 미아리계(彌阿里契)라고 나타나 있다. 그 뒤 갑오개혁을 기해 정부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세분해서 계(契)와 동(洞)을 종전보다 3배나 증설했으므로 이에 따라 이 동의 공식명칭은 동서(東署) 숭신방(崇信坊)(城外)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의 미아리(彌阿里)로 칭했다.
1911년 일제는 서울의 행정구역을 5부(部) 8면제(面制)로 만들었으므로, 이곳은 경기도 경성부(京城府) 숭신면(崇信面) 미아리(彌阿里)로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미아리로 되었다가 1949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으로 성북구가 설치되면서 미아리는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했다가 1995년 강북구가 분리 신설되어 이에 편입되었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이 동의 지형은 야산과 계곡 및 평지로 되어 있던 과계로 주로 호박밭, 배밭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이후에는 삼양로 좌우편 야산과 미아제3,4동 일대에는 한국인 전용공동묘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미아리 하면 서울사람들에게 공동묘지를 연상시켰다. 6.25동란이후 서울시에서는 공동묘지를 교외로 이장시킬 계획을 추진하여 미아리 일대의 공동묘지는 주택지가 되었다.
  광복후의 서울의 인구집중현상은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와 38선의 분단으로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사람들의 정착으로 심각한 주택난을 초래해 해방촌등이 형성되었다. 미아동 지역은 1959년 초부터 서울시가 국공유지나 사유지의 무허가 판자집 철거민이나 수재민, 화재민을 이주시켜 조건부로 가건축을 세우게 한 「무허가 판자집의 장소적 이주정책」의 첫 계획 대상지였다.

  미아동에는 모두 12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그 중 큰말과 불당곡(佛堂谷)이 제일 컸다. 큰말은 미아제8동 성암여자중학교 부근 일대로서 일제 때까지 100여호가 있었으며 파평윤씨가 많이 살았다. 불당곡은 불당골의 한자음으로 전에 삼양동 지역인 미아 제7동 일대가 된다. 옛부터 미아사(彌阿寺)가 있었으므로 미아동이 유래된 마을이다.

 

번동(樊洞)

  고려시대에 씌어진 운관비기(雲觀秘記)라는 책에 「이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李王都漢陽)」는 비기설(秘記說)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고려말기의 역대왕 및 중신들이 이 설에 신경이 쓰여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三角山) 아래 이곳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씨가 흥할 징조라 여겨 오얏나무를 베는 벌리사(伐李使)를 보냈다. 이로부터 이곳을 벌이(伐李)라고 칭하다가 번리(樊里)가 되었다고 한다.

  번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일찍이 이 동은 조선초부터 한성부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城外)

 조선초의 공식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확인 할 수는 없으나 18세기 중엽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와 19세기경에 그린 「경성오부도(京城五部圖)」 및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는 벌리(伐里)가 표시되어 있고, 18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사산금표도」에는 상벌리(上伐里), 하벌리(下伐里)로 표기되고 있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전국이 23부로 정해져 이곳의 명칭은
동서(東署) 숭신방(崇信坊)(城外)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번리(樊里)로 되었다.
  1911년 일제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정해 5부(部) 38방(坊) 8면제(面制)를 실시하면서 이곳은 경기도 경성부(京城府) 숭신면(崇信面) 번리(樊里)라 하였다. 1914년 번동은 경성부에서 벗어나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신면(崇信面) 번리(樊里)로 되었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번리는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1950년 번리는 번동이 되었다. 1973년 도봉구가 분구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번동의 자연부락은 웃벌리, 가운데벌리, 아랫벌리가 있다.
  아랫벌리는 하번리(下樊里)로서 정자말이라고도 한다. 정자말은 조선시대의 인조(仁祖)때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申景 ;1575∼1642)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기 때문에 연유되었다 한다.
  번동과 미아동의 경계를 이루는 오패산은 「빡빡산」「벽오산(碧梧山)」「매봉짜」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운다. 빡빡산이란 명칭은 가운데벌리에서 미아동을 넘어가는 곳을 1960년대말경 교원택지로 조성하느라고 나무를 모두 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벌리 남쪽 일대 산은 비교적 수목이 울창하여 산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철종(哲宗)때부터 벽오산이라 불리어 왔다. 이 산이름은 이곳에 오현(梧峴)이란 고개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철종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 金汶根의 딸)가 손자되는 김석진(金奭鎭)에게 「벽오산」이란 글씨를 하액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오현은 이 동에서 미아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서 「머귀고개」또는 줄여서 「며고개」라고 칭했는데, 이는 오동나무의 일종인 머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유동(水踰洞)

  수유동(水踰洞) 동명의 유래는 두가지로 전해져 온다. 하나는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 마을을 넘쳤기 때문에 물「水」자와 넘칠 「踰」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 하여 「무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수유리와 인접해 있는 삼양동이라는 곳에 삼형제가 살았는데 맏형은 바보이고 둘째는 개구쟁이며, 셋째는 두형보다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이들 삼형제는 힘을 합쳐 자기 땅을 확보하고자 싸움을 일삼고 다니므로 이곳 주민들이 이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빨랫골의 개울을 경계로 막았는데 그 개울들이 넘쳐 흘러 슈유리라 했다고 하난 대부분 주민들은 동명의 유래에 대해 前者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이가 많다.

조선 태조(太祖) 5년(1396)에 도성 및 성저를 5부(部) 52방(坊)으로 구역을 획정할 때 동부(東部)에 속했으며, 그 뒤 영조(英祖) 27년 (1751)에 간행된 수성책자(守城冊字)「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城外) 가오리계(加五里契), 수유촌계(水踰村契), 우이계(牛耳契)로 되어 어영청(御營廳) 전영(前營)에 소속되어 도성방어에 일익이 되기도 하였다. 갑오개혁때 5부를 5서(署)로 하고 계(契)와 동(洞)을 늘리면서 동서(東署) 숭신방(崇信坊)(城外)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내에 대수유리(大水踰里), 가오리(加五里), 우이리(牛耳里)로 되었다. 1911년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정해 5부(部) 38방(坊) 8면제(面制)를 실시하면서 이곳을 경성부 숭신면(崇信面) 우이리(牛耳里)라 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신면(崇信面)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서울시에 편입 성북구 숭신출장소 관할하에 있게 되었으며 1973년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이에 편입되었고 다시 1995년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수유동 자연부락의 명칭을 살펴보면 무너미, 빨래골, 강리, 화계사 입구 또는 보등골, 소군네 등 5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이것이 합쳐 현재 수유동이 구성되었다.
  「무너미」는 수유의 풀이이며, 웃무너미와 아랫무너미로 나뉘어져 있었다. 웃무너미는 현재 수유1동 시장일대에 해당되며 아랫무너미(작은 무너미)는 현재 수유3동과 미아3동의 일부에 해당된다.
  「빨래골」은 물이 맑아 주민들의 빨래터로 이용된데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수유1동 시립유아원이 있는 일대이다.
  「가오리」는 현재 수유2동 우이초등학교, 중앙교육원 등이 있는 곳으로 옛날 미아리고개에서 장사를 지내는 소리가 임금에게까지 들리자 번잡스러우니 오리를 더가라고 하여 가오리(加五里)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현재 수유5동과 2동사이 가오교가 있다.
「소군네(소은네?)」는 현재 수유 4동 즉 우이동의 일부로 옛날 조선시대 시골에서 서울로 오는 소(牛)장사가 소를 몰고 이 내를 건너 시장을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하기도 하고 소군내라는 하천에 나무다리가 놓였는데 이 다리로 서울과 경기도를 왕래하여 이 이름을 따서 소군내라는 마을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수유1동과 5동의 경계구역인 수유동 487번지 산허리에 자리잡은 고찰 화계사(華溪寺)가 있다. 화계사는 조선 중종(中宗) 11년(1511)에 신월(信月)스님이 창건한 이후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불의의 화재로 인해 전소된 뒤 도월(道月)스님의 노력으로 전면 복구되었다. 그러나 그 뒤 24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우에 시달려 건물이 퇴락해지자 고종(高宗) 2년 (1865) 대원군(大院君)의 정성으로 용선(龍船) 초암 두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수유1동 89-2에 부군당(府君堂)이 있다. 조선시대 부군당은 현재 위치하고 있는 부근당 근방 삼선암(三仙岩)이라는 샘가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삼선암 옆에는 여섯사람이 둘러설 정도의 큰 괴목(槐木)이 있어 주민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겼는데 당시 世宗(世祖?)대왕이 북한산에 올라 서울근교를 둘러 보다가 물가운데 드러선 이 큰 괴목을 보고 나무를 보호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다. 이에 따라 사풍을 바라는 목적으로 동제를 지낸 다음 무당을 초치하여 굿을 행했다고 한다. 그 뒤 6.25동란이 발발하자 의정부에서 괴뢰군의 남하를 분쇄하고 서울을 수호하기 위해 창동, 쌍문동, 수유리에 국군을 배치했을 때 이 나무가 앞을 가려 전망이 보이지 않자 폭파해 버렸다. 그 뒤 주민들은 이 정신적인 지주가 없어졌음을 안타까워 하던중 이승만대통령의 87주년 기념 식수로 나온 어린 나무 한 그루를 얻어 정성껏 심어놓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