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道峰區)

도봉구청 홈페이지 http://www.tobong.seoul.kr/

도봉구 

  도봉동(道峰洞)
  방학동(放鶴洞)
  창동(倉洞)
  쌍문동(雙門洞)

 

 

 

 

 

 

 

 

 

 

도봉동(道峰洞)

  道峰洞의 동명은 마을이 서울 근교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에 있음으로 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도봉산은 태백산맥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광주산맥의 한 산으로, 강원도 철원에서부터 봉우리가 일어나서 기복을 반복하여 들어오다가 큰 줄기가 여기에 와서 멈추었는데 連峰이 지금 서울의 도봉구와 경기도 양주군의 의정부시, 장흥면에 걸쳐 있다.

  도봉산의 이름을 따서 도봉이라는 마을이름이 시작된 것은 일제 때인 1914년부터의 일로 보여진다. 일제가 양주군의 海等村面 지역인 이 부근과 蘆原面 지역을 합하여 蘆海面으로 고치고, 이 도봉산 아래의 다락원 , 서원안말, 무수울 등 마을을 합하여 도봉리로 하니, 이것이 道峰이라는 동리명의 출발이었다.
  1963년 이 지역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성북구 도봉동으로 되었다. 1973년에는 성북구에서 도봉구로 나뉘면서 도봉구 도봉동으로 되었다.

「다락원」, 「웃다락원」등의 마을이름은 지금 의정부시와의 인접지역에 옛날 公私旅客들이 留宿하던 院 즉, 원집이 있고 그 원집에 다락 즉 樓閣이 있어서 얻어진 마을이름이라 한다.
  조선 선조 6년(1573)에는 寧國寺 옛 터에 道峰書院을 짓고 유교계 정치가로 이름 높은 靜庵 趙光祖를 亨祀하게 된다.
  朝鮮 中宗 25년(1530)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봉산중에는 寧國寺 외에도 靑龍寺, 望月寺, 回龍寺, 圓通寺 등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 중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41)에 海浩祖師가 왕의 명을 받들어 창건하였으며, 신라의 서울 月城을 향하여 祈願사던 곳이므로 절 이름을 「望月」이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방학동(放鶴洞)

  放鶴洞의 동명에 대하여는 도봉동에 잇는 道峰書院의 창건과 관련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조선조의 왕이 도봉서원 터를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앉아 중다리를 내려다 보다 학이 평화스럽게 많이 앉아 놀므로 이곳을 방학굴(골)이라 하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또 이곳 지형이 鶴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지명을 「放鶴」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두 설이 모두 실제와 잘 맞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러한 학과 관련되는 전설은 아마도 한자는 放鶴里라는 지명이 이루어진 후에, 어느 好事家에 의하여 추후 발생된 이야기가 아닌가 보여진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예 즉, 한자로의 地名 또는 人名이 성립된 후에 그 한자명에 따르는 설화가 발생된 것은 고대사 이후에 우리 문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 그 한자명은 원래 우리 옛말로 된 이름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의미로 많이 바뀌었으며 그 본 뜻과 다른 한자 명칭에 따라 다시 새로운 설화가 생겨서 그럴듯하게 유포되어 본래 명칭의 의미를 아주 잊어버리게 한 예를 우리는 문헌에서 수없이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방학동은 처음 방아 즉,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굴)」로 부르던 것을 한자의 음이 비슷한 방학리로 고치면서 다시 학이 앉아 놀았다, 또는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 같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돌게 된 것은 아닌가고도 생각할 수 있다.

  조선중기에는 경기도 양주군 海等村面에 속하였다. 「放鶴」이라는 한자 洞里名이 불리어지게 된 것은 일제때인 1914년부터의 일이었다. 그 후 양주군의 蘆海面을 만들면서 방학리는 노해면에 속하게 되고 1962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관할하의 방학동이 되었다가 1973년도봉구의 분리, 신설에 따라 도봉구의 방학동으로 되었다.

  방학동 구역안에는 아직도 옛날부터의 우리말 이름 그대로 불리어지는 마을이 많이 있다. 방학동의 중심부를 이루어 오는 도당동은 도당말 또는 뒷말로도 불리어지는데, 도당굿 득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드리는 제단의 나무가 있으므로 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한자로는 陶唐洞으로 쓰여진다. 그리고 뒷말이라는 이름은 방학굴 뒤쪽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또 원당이는 지금 한자로 元唐里로 쓰는데 실은, 소원을 비는 神堂이 있으므로 하여 願堂이로 부르던 것이라 한다.
  방학동 546번지 소나무숲속에는 朝鮮王朝 제10代王 燕山君의 묘소가 있다.

 

쌍문동(雙門洞)

  雙門洞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온다. 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 아들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孝子門을 두 개 세운데서 雙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現 창동우체국 부근에 烈女門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 길에 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니」가 雙門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朝鮮중기까지 경기도 楊州牧 海等村面에 속하였는데 갑오경장 직후 양주군이 漢城府에 소속됨에 따라 한성부 양주군 해등존면에 속하였다가 1896년 양주군이 다시 경기도에 소속되어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이 되었다.
  일제가 1914년 蘆海面에 소속시켰다가 1963년 쌍문리를 성북구에 편입시키고 쌍문동이라 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쌍문동은 도봉구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쌍문동의 자연부락을 살펴보면 鷄聲洞,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자연 부락을 합쳐 쌍문동으로 형성되었다.
  쌍문동 일대에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친 磨製石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농경생활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창동(倉洞)

  倉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糧穀倉庫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는 오랜 옛날부터 石造里程標가 세워져 있다.

  조선 中期까지 경기도 楊州牧 海等村面에 속하였는데 갑오경장 직후 漢城府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하였다가 1896년 다시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이 되었다. 일제때인 1912년 해등촌면 倉洞里가 되었다가 1914년 蘆原面과 해등촌면을 합쳐 蘆海面이라 하고 그 관할 아래 두었다. 1963년 창동을 서울시 성북구내에 편입시켰다가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된다.

  조선시대 창동의 자연부락을 살펴보면 창골을 비롯하여 流滿, 말미, 모랫말 등이 있었다.
  창골은 조선시대 창고가 있은 데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그 앞 들을 바라기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바라기들은 水原이 적어 날씨가 가물면 하늘만 바라고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流滿은 글자 그대로 물이 가득함을 뜻하는 것으로 일명 한내(漢川) 또는 종자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7년을 가물어도 물이 있어 종자가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