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恩平區)

 

 

녹번동(碌磻洞)
불광동(佛光洞)
갈현동(葛峴洞)
구산동(龜山洞)
대조동(大棗洞)
응암동(鷹岩洞)
역촌동(驛村洞)
신사동(新寺洞)
증산동(繒山洞)
수색동(水色洞)
진관내동(津寬內洞)
진관외동(津寬外洞)
구파발동(舊擺撥洞)



녹번동(碌磻洞)

 녹번동(碌磻洞)이라는 지명은 녹번현(碌磻峴:녹번이 고개)라는 고개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녹번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청렴한 조정의 관리들이 설, 추석 등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라에서 받은 녹(祿)의 일부를 이 고개에다 남몰래 슬며시 놓아두었는데, 이를 당시 사람들이 관리들이 녹을 버린 것이라 생각하고 이 고개 이름을 ‘녹을 버린 고개’라 하여 ‘녹번이 고개’라 불렀다는 데서 연유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본래 이 고개 부근에서 자연동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띠는 광물질인 산골(山骨)이 많이 출토되었으므로 녹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산천조(山川條)에는 “녹반현은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산 동(銅)이 나온다. 뼈가 부러진 사람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당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만 사람이라도 이것을 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녹반현은 사현 북쪽에 있는데, 이 고개의 석벽(石壁)에는 지금 자연산 동(銅)이 나온다. 캐는 자가 철추(鐵錐)로 벽을 깨면 돌 사이에 은알갱이처럼 푸르게 빛나고 광채가 있는 물건이 나온다. 아픈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신기한 효험이 있는데, 먹는 방법은 미음(米飮)으로 가루를 삼키는 것인데, 삼킬 때 반드시 그 병이 낫기를 마음으로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 약은 골절에 좋은 것인데, 지금 다른 병에도 좋은 것은 역시 이것뿐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여기에는 녹번현(碌磻峴)이 아닌, 녹반현(祿礬峴 또는 碌礬峴)으로 되어 있어 속설과 차이가 난다.

 녹번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말흘산계(末屹山契)에 녹현동(碌峴洞)에 속하였는데, 이때 와산동(臥山洞), 응암동(鷹岩洞), 포반동(砲半洞) 등이 함께 말흘산계에 속하였다. 1911년 4월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전국의 부(府), 군(郡)을 통폐합하면서 은평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서대문구 관내(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녹번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4월 18일 동제(동제)가 실시되면서 녹번동은 주변의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과 함께 4개 법정동이 합하여 녹신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녹번동사무소로 독립되었다.
 녹번동은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당시 방어진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해 10월에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이어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점령하자 당시 양주목자 임한(林翰)이 이곳 녹번현에 진을 치고 15일 동안 도성을 수비하였던 곳이다.

옛지명
 양철리(梁哲里),양천리(兩千里:양철리,돌산리)- 녹번동 19번지 38호, 불광동 국립보건원의 서쪽 건너편 일대를, 이곳에서 남쪽으로 부산이 일천리(一千里), 북쪽으로 신의주가 일천리가 된다고 하여 양천리라 불렀다 한다.
『수선전도(首善全圖)』및『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도 양철리(梁哲里)라는 동리로 기록되어 있어 양철리라는 지명이 오랜 기간 동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돌과 바위가 많아 돌산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웃물골 - 녹번동4,5번지 일대는 예전 물이 맑은 지역이라 하여 웃물골로 불렀다.
 안정박골 - 녹번동21-286호 일대, 보현사 근처를 안정박골 또는 안쪽마을로 불렀다. 현 녹번동 동사무소 길 건너편 앞산의 큰 바위가 말안장 같이 넓적하다 하여 안장바위라고 불렀다.
 도살장터 - 녹번동 132번지 일대, 녹번동 새마을금고 본점 근처에는 일제시대부터 도살장이 있던 장터로 당시 많은 백정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파일재(패일재) - 녹번동 86번지 일대, 은평구청사 뒤쪽을 거치는 길이 예전 비가 오면 대단히 질고 질퍽하여 항상 사람의 발자국이나 도로가 패여 있었다고 하여 파일재 또는 패일재라 불렀다고 한다.
 산골고개 - 녹번동 산 1번지 일대는 예전부터 뽀의 접착, 골절응고에 효력이 뛰어난 산골(山骨)이 많이 채굴되어 산골고개로 불렀다고 한다. 이곳 산골이 유명하게 된 계기는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할 때 성을 쌓다가 뼈를 다친 인부들이 특효약으로 산골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부들우물 - 녹번동 80번지, 현대 2차 아파트 부근에 있던 우물의 옛 이름이다. 논 한가운데에서 솟아 나왔기 때문에 논과 같은 습지에서 자라는 부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석게다리 - 녹번이고개에서 무악재로 가는 길에 돌로 만든 긴 서석게다리(홍제천다리)가 있었다. 오래 전 이 돌다리가 홍수로 유실되어 모래 속에 오래 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려 할 때 마침 모래 속에 묻혀 잇던 서석게다리의 석재가 발굴되어 긴히 이용되었다고 한다.

해설:恩平區誌



불광동(佛光洞)

 불광동이라는 지명은 이 근처에 바위와 대소 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불광동 지역에는 북한산 자락을 중심으로 지금도 여러개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불광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불광리계(佛光里契)에 속한 불광리, 사정동(射亭洞), 관동(館洞), 전석동(?石洞)을 포함하였다. 영조때 작품인 겸재 정선(鄭?)의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나『조선장안지도(朝鮮長安地圖)』에 이미 불광리계라는 지명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이시기 이전에 불광리계라는 지명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4월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되었다. 이후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전국의 부(府), 군(郡)을 통폐합하면서 은평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불광동은 대광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불광1동, 물광2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옛지명
전석동(?石洞)-현 불광동 331번지 일대, 전석현(?石峴), 속칭 박석고개를 낀 마을이름이다. 통일로에서 갈현동과 불광동을 양편에 끼고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가 바로 예부터 박석고개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전석(?石)’ 즉 ‘박석’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는 고개 주변에 궁실(宮室)의 전답이 있었기 때문에 궁전(宮田)에 오가는 높은 사람이 땅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돌을 깔았던 것이 그대로 박혀 있어 박석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고, 둘째는 이 고개가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어지는 풍수지리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지맥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셋째는 예전 이 고개는 중국 사신의 내왕로였는데, 고갯길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통행에 불편을 겪게 되자, 조정에서 이 고개에 길을 닦고 상석(床石) 크기의 돌을 깔았기 때문에 박석고개가 되었다 한다. 고개 마루 왼편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중국 사신이 이곳을 지날 때 성황당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정동(射亭洞: 새장골) - 불광2동 연신내 세종예식장 부근의 옛 지명으로 예전 이곳에 활터가 있어 사정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연서로에 연서천이라는 내(川)가 있었으며, 연서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의 연천초등학교 근처에 활을 쏘는 과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관동(館洞) - 불광2동 은혜초등학교 부근 아미산 기슭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관동(館洞)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역(驛)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여겨진다. 벽제관(碧蹄館)의 경우처럼 관(館) 역시 예전에는 교통을 위한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용어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수물터(御手井) - 불광동331번지 일대, 현 은혜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우물의 이름이다. 조선시대 숙종이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갈 때 이곳 우물에서 물을 드셨다 하여 어수정(御手井)이라 전하여 왔으나, 이곳에 살던 처녀가 떠주는 물을 받아드실 때 처녀의 손을 잡았기 때문에 어수정이라 하였으며, 이 처녀가 바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기도 있다.
독바위골 - 불광동 산42번지, 280번지 일대에 예전에는 돌이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줄여서 독박골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조반정 당시 일등공신이었던 원두표 장군이 거사 직전까지 이곳에 있던 바위에 숨어 지냈는데, 이후 원두표 장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의 이름을 덕바위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돋노리 - 불광동 산 42번지 일대는 이곳 산봉우리에서 해가 제일 먼저 돋는다고 하여 돋노리라는 마을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수리봉 아래 이 마을은 뒷산이 높고 으슥하여 산돼지가 많이 내려왔으므로 돈(돼지)놀이터가 되어 ‘돈노리’한자로는 저서리(猪?里)라 불리다가 와전되어 ‘돋노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샛불광리-불광3동 55번지 일대, 현 연천중학교 부근의 옛지명으로 대불광리(지금의 불광2동)에 비해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마한 불광리라는 뜻에서 샛불광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군수모탱이 - 연신내에서 구파발 방향의 박석고개쪽으로 가다가 현 농협 뒤쪽(불광동484-70호 부근)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은 옛날 어느 군수(郡守)의 묘가 있었다 하여 군수모탱이라 불렀다고 한다.
차돌배기 - 불광동 484번지 부근, 군수모탱이에서 박석고개로 가는 중간, 후미길에 있던 지명인데, 산부리가 튀어나온 후미진 곳에 차돌이 많이 박혀 있어 차돌배기라 불렀다고 한다.
연신내- 불광동 1번지, 연신내는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연서역(延曙驛:혹은 迎曙驛) 주변을 흐르던 연천(혹은 연서천)이라는 개천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인조반정 당시 반정의 주도 인물 중의 하나인 장단부사 이서(李曙)가 미리 약조한 혁명군의 집결지인 홍제원에 도착이 늦어지자 인조가 몸소 연서역까지 가서 기다렸으나, 이서의 지원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조가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 하여 실망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서가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혁명군에 합류하였다. 이에 반정 성공 후 인저가 이서를 향하여 “너는 이서가 아니라 연서(延曙:지각한 李曙)”라고 놀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 하여 이 개천을 연신내(延臣川)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본래 연서역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영서역(迎曙驛)에서 인조가 친히 이서(李曙)를 맞이하게[迎] 되어 이름 그대로 ‘영서(迎曙)’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연서역은 현 인신내사거리 범서표핑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恩平區誌



갈현동(葛峴洞)

 갈현동(葛峴洞)은 갈현1동 동사무소 뒤편에 있는 일명 가루개고개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가루개 또는 ‘갈고개’, ‘칡고개(葛峴)’라 부르는 명칭을 한자로 표기하여 갈현동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동국여지비고』나『육전조례(六典條例)』등의 문헌에서도 이 지역은 북부(北部) 성외방(城外坊)에 속한 갈고개계(葛古介契)로 표기되어 있다. 이 일대에는 예전부터 ‘칡뿌리’가 많아서 ‘갓’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 왔기 때문에 칡고개 또는 칡넝쿨고개로 불리어 왔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가루개라는 순수한 우리말의 본래 뜻은 칡고개가 아니라, 물이 갈라진다는 분수령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실제 가루개고개는 못골과 효경굴 그리고 가루개 등 세 마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는 견해도 있다.
  갈현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갈현계(葛峴契)에 갈현, 궁동(宮洞), 좌월동(坐月洞), 효경동(孝敬洞), 전석동 등과 함께 속해 있었다. 대개 성외방에는 지역은 넓어도 계(契)안에 한 두개의 동(洞)이 속해 있는데 비해, 갈현계에는 비교적 많은 수의 동리가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비교적 많은 인가(人家)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가 되었다.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증산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갈현동은 이웃 불광동, 대조동, 구산동과 함께 4개 법정동이 합하여 대광동 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갈현동 동사무소가 독립되었다.

옛지명
갈곡리 - 갈곡리는 칡이 많이 나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오늘날 갈현동의 유래는 갈곡리의 지명이 변천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온수골 - 갈현동 7번지, 박속고개 부근의 옛지명이다. 겨울에도 이곳에는 더운 물이 나는 샘물이 있어 온수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온수골이 있는 산 부근에는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시조로서 고려시대 해동공자(海東孔子) 로 불린 최충(崔?)의 묘와 큰 재실(齋室)이 해방 후까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봉분, 비석 등을 모두 경기도 오산으로 이장하였다.
못골(갈현동 436번지 일대) - 지금의 갈현1동 동사무소 뒤편 일대에 있었던 자연촌락의 이름이다.
효경골(孝經谷) 갈현2동 산53의 1호 일대 - 현 대성고등학교 일대에 거주하던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에서 대대로 효자가 많이 태어났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에는 옛날에 유명한 서당이 하나 있었는데, ‘효경골 서당’이라 불렀다.
궁말 - 갈현동 선진운수 종점 일대는 궁궐에서 일하던 궁녀들이 나이가 들어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궁궐에서 10리 내에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많은 궁녀들이 서오릉(西五陵)과 가까운 이곳에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벌이고개(버리고개, 벌고개) 갈현동 308번지 일대 - 갈현동 서쪽 끝의 궁말에서 고양시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 이름이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별세하자 묘자리를 서오릉으로 정하여 이 고개를 넘어 하관을 하라고 지관샌님이 하관샌님에게 명하였으나 하관샌님이 이를 어기고 고개를 넘기 전에 하관을 하자 하늘이 노하여 천둥번개를 치고 무수한 벌떼가 나타나 하관샌님을 쏘아 죽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벌이고개 지명과 관련된 또 다른 설로는 한양에 오얏나무가 무성한 것은 이씨(李氏)가 나라를 세울 징조라 하여 고려시대 조정에서 벌리사(伐李司)라는 관청을 두어 오얏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고도 한다.
여우굴 - 못골에서 갈현2동 방향의 효결골로 넘어가던 좁은 고개의 이름으로 일명 ‘여우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 한 것은 여우가 늘 이 고개로 많이 다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데, 간혹 여우에게 홀려서 밤새도록 끌려 다녔다는 촌로들이 있었다고 한다.
고래논, 물타작논- 갈현동 450번지 일대에는 논에서 자연히 솟아나는 지하수가 있어 별도의 물관리가 필요없었던 고래논이 있었다. 지금 갈현초등학교 부근의 논을 물타작논이라고 불렀는데, 부근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이 논엣 생산된 조숙된 논벼를 베어 완전히 마르기 전에 타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효경봉(일명 앵봉)- 효경봉은 효경골의 가장 높은 곳 뒤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으로, 서오릉의 주산인 앵봉(鶯峰)을 말한다. 해발 235.7m이다.
길마둑 - 연신대 사거리에서, 예일여고 사거리 부근에 있는 여말비각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연신내 개천둑이 자연적으로 우뚝 솟아 넓은 마루터가 생긴 자리가 있는데, 이곳의 생긴 모양이 마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올려놓은 갈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명 ‘길마둑’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떡논- 갈현동 462-1호 근처에 있던 논의 이름이다. 예전 이곳에 7년동안 큰 가뭄이 들어 소작료 없이 거저 농사를 지으라고 해도 사람들이 농사를 안 지었는데, 결국 떡 한 시루를 내고 농사를 지었다고 하여 떡논이라고 하였다.
해설:恩平區誌



구산동(龜山洞)

 구산동 동명의 유래는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뒷산의 모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형상이 ‘거북이’ 같다고 하여 그 아랫마을을 구산동(龜山洞)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구산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사계(私契)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노지동과 구산동이 합쳐져 구산리가 되면서 현재의 구산동의 범위가 형성되었다.
 해방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구산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대광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구산동 동사무소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지명
봉산(峰山:봉령산) - 봉산은 수국사 뒤편에 위치한 산의 이름으로 해발 209.6m이다. 이곳에는 옛날 통신수단의 하나였던 봉화를 올리던 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 봉산의 봉화대에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봉화에 불을 피웠다고 전해진다.
노절 - 구산파출소 부근의 마을에 옛날 아주 오래된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920년에는 이 부근에 구산리의 대지주 김만주가 학교 부지를 희사하여 은평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초등학교였던 구산사립학교를 건립하였는데, 해방 후까지 명맥이 이어져 오다가 그 후 폐교되었다고 한다.
향고개(일명 상고개) - 서북병원(구 시립병원) 뒤에서 고양시 향동(香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좁고 험해서 다니기가 불편하여 사람들이 이 고개 대신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벌이고개를 주로 넘었는데, 풍수적으로 벌이고개가 서오릉 왕릉의 좌측어깨에 해당되므로 사람 왕래가 많아지면 고개턱이 낮아진다고 하여 조선 중기부터 벌이고개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이곳 향고개를 이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해설:恩平區誌



대조동(大棗洞)

 대조동 동명의 유래는 지금까지 이곳에 예전부터 대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은평구의 상징나무로 대추나무가 선택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최근 본래 이 지역은 대추나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대조동의 옛 지명인 대춘말도 대추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대촌(大村)마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조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사계(私契)에 속한 대조동(大棗洞)에 해당한다.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1911년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대조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대조동은 대광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독립하여 대조동이 되었다.

옛지명
새말 - 지금의 대조동사무소를 포함한 그 부근 지역을 부르던 옛 마을 이름이다. 이곳 새말은 ‘새로운 마을’ 즉 ‘신촌(新村)’의 의미가 아니라, 연신내와 대춘말 사이에 낀 사이마을(間村)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일제시대 경성부에 의하여 총 1,000평 규모의 거대한 비료 저장탱크가 지하에 건설되었는데, 사용되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그 후 이곳 지하탱크는 6.25사변 때 인근 주민들에게 공습을 피하는 방공호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고 한다.
술청거리 - 지금의 역촌동 5거리 부근 지역의 옛 지명이다. 이 부근 현재(2001년) 빨간 2층 벽돌집 대성각 식당이 있는 자리에 옛날 술과 안주를 잘 만들어서 유명해진 이광덕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왕족과 고위 관료들이 서오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다가 이곳 주막에 반드시 들러가곤 했다고 한다.
불광 우시장 - 현 대조동 14번지의 불광 대조시장은 1930년경에 시작되어 발전한 것인데, 당시 갈현동에 살고 있던 이낙순(李洛順)과 면장 조병제(趙炳濟)가 우시장(牛市場)을 개설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현대시장으로 발전되었다.

해설:恩平區誌



응암동(鷹岩洞)

 응암동은 마을 뒷산 자락에 있는 커다란 바위의 형상이 마치 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응암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말흘산계(末屹山契)에 응암동(鷹岩洞)이라는 동명(洞名)으로 포반동(砲半洞:일명 砲手洞), 와산동(臥山洞)과 함께 속하였다. 이들 3개 동리는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3개 동리가 합하여 응암리(鷹岩里)가 됨으로써 현재의 응암동의 범위가 형성되었다.
 해방 이후 이 지역은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응암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응암동은 주변의 녹번동, 역촌동, 신사동과 함께 4개 법정동이 합하여 녹신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응암동으로 분동되었다.

옛지명
포수마을(砲手洞)응암동 101번지,182번지 일대 - 해발 215m의 백련산(白蓮山) 기슭 바위 위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포수들이 기거했던 곳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포반동(砲半洞)이라고도 한다.
와산동(臥山洞:늘뫼동네)응암동 600-1호 일대 - 백련산 산줄기 끝자락의 모양새가 완만해서 마치 산이 누워 있는 것 같다 하여 와산(臥山) 혹은 눌뫼라고 하였는데, 현재 와산교 부근 일대를 말한다.
냉정골약수 (응암동 36번지 일대) - 현 녹신약수터를 예전에는 냉정 약수터라고 불렀으며, 이 일대 골짜기를 냉정골이라 불렀다. 약 150년 전인 조선 헌종때 다리를 다친 학이 이곳 샘물터로 날아와서 이레동안 상처를 물에 담그고 있다가 깨끗이 나아 가지고 하늘로 날아갔다는 소문 때문에 당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으며,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매바위(응암동 231-2호 일대)- 응암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유서 깊은 바위로 모양새가 큰 매가 날아와 앉은 듯하여 매바위라 하였다. 인근의 명소였으나 그 자리에 연립주택을 건축하면서 바위를 깨뜨려 없애 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다.
올무지고개 - 응암동 매바위 서남쪽 명지중,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삼거리 고개의 이름이다. 예전 이 고개 부근에서 올무(덫)을 이용하여 짐승사냥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데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해설:恩平區誌



역촌동(驛村洞)

 역촌동 동명의 유래는 지금의 예일여고 동쪽 너머 마을의 옛 지명인 역말(역마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경기도에 있던 6도(道) 중의 하나인 영서도(迎曙道)의 도찰방이 있던 곳으로, 인근에 있던 고양의 벽제역(碧蹄驛), 장단의 동파역(東坡驛), 개성의 청교역(靑郊驛), 풍덕의 중련역(中連驛) 등을 관할 하던 곳이었다.
 역촌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역계(驛契)의 역촌동(驛村洞)과 사계(私契)의 상정동(上井洞)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상정동과 역촌동이 합쳐져 역촌리가 되어 현재의 역촌동의 범위가 형성되었다.
 해방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역촌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녹신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역촌동 동사무소로 독립하였다.

옛지명
마방촌(역말) 역촌동 8-1호 일대 - 조선시대 장거리 여행시 지친 말이 쉬어갈 수 있었던 역을 만들었다 하여 마방촌(역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토정리(土井里) - 지금의 구산동 서북병원(구 시립병원) 부근, 역촌동 228-3호 부근에 뻘건 진흙땅에서 샘물이 솟아 올랐다하여 토우물이라 하였다고 한다. 우물 옆에는 400년 가량 된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1970년 병원이 건축되면서 우물은 폐정되고, 느티나무도 고사(枯死)했다.
장대곶산(감나무산) 역촌동 6-7호 부근 - 역말 비각뒤에 있는 역말의 주산에 해당하는 곳을 장대곶산이라 불렀다. 이곳 산마루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동리 사람들이 모두 올라와 횃불을 들고 삼각산에 떠오른 달을 맞이하였다. 이곳 달맞이산은 그 후에 긴 장대(솟대)를 꽂아 두었다 하여 장대곶산(‘곶다’는 ‘꽂다’의 옛말)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감나무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해설:恩平區誌



신사동(新寺洞)

 신사동(新寺洞)의 명칭은 신사동 200번지 부근에 있었다는 ‘새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현재 그 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고종 때 만든 『육전조례』나『동국여지비고』에 뿐만 아니라 영조 때 겸재 정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도 이미 신사동계(新寺洞契)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명칭의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사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은방(城外) 신사동계(新寺洞契)에 신사동(新寺洞)이라는 이름으로 속해 있었다. 1911년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가 되었다.
 해방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신사동으로 바뀌었다.
 1970년 역총동과 함께 역촌동 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신사동 동사무소로 분동되었다.

옛지명
풋나무골 - 봉산에는 여러 개의 골짜기가 있고, 그중 294번지 뒤편에 있는 골짜기를 풋나무골이라 하는데, 새롭고 싱그러운 나무들이 울창한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택골 - 지금의 숭실 중,고등학교 인근지역을 예전부터 고택골 이라고 불렀다. 예전 고씨(고씨) 성을 가진 장군이 나라에 공을 세워 지금의 신사동 지역에 땅을 하사받았는데, 자손이 없이 대가 끊기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이 이곳을 고택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일제시대 시립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 당시 서울과 경기도에는 ‘고택골 갈 놈’이라는 심한 욕설이 있었다고 한다. ‘고택골 갈 놈’이란 즉 죽어서 고택골에 묻힐 놈, 즉 ‘죽일 놈’의 무지무지한 욕설이 된다.
축등(築嶝) - 고택굴에 있는 언덕 이름인데, 예전에는 마을 앞이 훤히 트여 마을 복이 밖으로 나간다고 하여 동리 사람들이 앞들에서 돌멩이나 흙을 운반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흑 언덕이다. 이는 풍수에서 말하는 비보(裨補)행위로써 풍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인공적으로 메꾸는 방법이다.

해설:恩平區誌



증산동(繒山洞)

 증산동(繒山洞)은 이 지역에 있는 북한산 지맥의 산 모양이 시루(甑)처럼 생겼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한강물이 범람하여 온 마을에 가득 들어찬 물이 비만 그치면 마치 시루에서 물이 쭉 빠지듯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시루뫼라 하였다고도 한다. 당시 이곳 증산동을 두 곳으로 나누어 현재의 증산동 마을 부근을 위시루뫼, 증산초등학교 부근을 아랫시루뫼라고 불렀다.
 이곳 증산동은 1440년경부터 나주나씨(羅州羅氏) 토박이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재까지 5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나주나씨 문중에서 보관 중인 조선시대 중종 때 숙의 묘의 지석에는 城西十里 佛光里甑山이라고 쓰여 있어 16세기 초에 이미 ‘증산(繒山)’이란 지명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증산동은 ‘비단 증(繒)’이 아닌, ‘시루 증(甑)’을 사용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이 시루는 밑이 항상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고, 항상 가난하게 살게 된다 하여 고종에게 땅 이름을 ‘시루 증(甑)’ 대신 ‘비단 증(繒)’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쳐 달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때에 ‘비단증(繒)’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증산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희방(城外) 증산리계(繒山里契)에 증산상리(繒山上里)라는 이름으로 속해 있었다. 1911년 4월 경성부가 5부(部) 8면(面)으로 편제되면서 은평면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후 1914년 4월 1일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3월 15일 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증산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4월 18일 서울시 조례 제66호에 의해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 증산동은 서대문구에 속한 북가좌동,남가좌동과 함께 증가동(繒加洞)동사무소 관할하에 편입되었다. 1970년 남가좌동이 떨어져 나가면서 북가좌동과 함께 북가좌동 동사무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에는 증산동으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지명
개춘굴(開春谷:개춧굴) - 증산동 216, 218번지 주변 반흥산(시루봉) 남쪽에 있는 까치내 고개 앞쪽 동네의 이름인데, 남녘으로 해가 잘 들어 봄이 다른 곳보다 먼저 찾아온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까치내 고개(성황당 고개) 증산동 222번지 - 증산동에서 수색으로 넘어가는 좁은 고개를 성황당고개 또는 까치고개라고 부른다. 까치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하여 까치고개라 불려졌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여기서 ‘까치’라는 말은 새의 명칭이 아니라 ‘까치 까치설날’ 할 때의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이 고개는 일제시대 경의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평탄하게 깎여버렸다고 한다.
분토골(粉土谷) 증산동 1번지, 131번지 일대 - 옛 태봉터 윗 동리를 분토골이라 하였는데, 이 부근에서 고운 백토 흙이 많이 나와 유래된 지명이다. 예전 벼를 절구에다 찧을 때 이 백토 흙을 조금 섞어 절구질을 하면 쌀알이 많이 깎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분토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해설:恩平區誌



수색동(水色洞)

 수색동(水色洞)이라는 명칭은 이 일대가 한강 하류로서 예전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지명은 우리말로 일명‘물치’또는 ‘무르치’라고 하였는데, 장마철만 되면 물이 치어 올라 마을과 벌판 등이 온통 물 일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한자로는 ‘수생리(水生里)’, ‘수색리(水色里)’, ‘수암리(水岩里)’, ‘수상리(水上里)’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다. 1975년에 제작된 도성도(都城圖)에는 ‘수생리’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고종 초기에 만들어진 『육전조례』에 ‘수색리계(水色里契)’라는 지명이 보이나, 한일합방 무렵 일본인들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수상리계(水上里契)로 표기하고 있어, 그 명칭과 영역이 확실하지 않다.
 1917년에 발행된『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는 이전의 경성부 연희면 증산리 일부와 구룡동(九龍洞)이 합하여 고양군 연희면 수색리가 되고, 수상리계의 수상리는 상암동(上岩洞)이라는 신설 동리에 흡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1975년에는 동리간의 영역을 대폭적으로 조정하면서 한강가에 접해 있던 지역이 상암동 쪽으로 편입되면서 수색동은 그 명칭의 유래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륙의 땅으로 되고 말았다.
  수색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희방(城外) 증산리계(繒山里契)에 구룡동(九龍洞), 안양동(安陽洞) 및 증산리 일부로 편입되어 있었으며, 동명(洞名)의 유래를 이루는 수색리계(水色里契)는 현재 마포구 상암동 지역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으로 편입되어 은평면 신사리가 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서울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관내 은평출장소의 관할이 되었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동리이름을 개정하면서 수색동으로 바뀌었다. 1955년 지방자치법 동제(洞制)가 실시되면서부터 수색동 동사무소로 독립하였다.

옛 지명, 명소
구룡곶이(九龍串) - 수색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 한강쪽으로 비쭉 내민 반도의 낮은 산등성이가 아홉 마리의 용이 움직이는 듯한 지형이라고 하여 구룡곶이라 한다.
수색역 - 1908년 4월 1일 경의선(京義線)이 개통되고, 1938년에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군수물자와 병력 수송을 위하여 철도 복선과 더불어 수색동 205번지에 대규모의 조차장(操車場)과 철도관사를 건설하였다.

해설:恩平區誌



구파발동(舊擺撥洞)

 구파발동(舊擺撥洞)이라는 명칭은 글자 그대로 예전 이곳에 파발(擺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예부터 벽제관(碧蹄館)으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이곳에 있었던 역참(驛站)의 명칭이 ‘덕수원(德水院)’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언제 어느 지점에 역참이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구파발동은 1973년 이웃 진관내동, 진관외동과 함께 서울시에 편입된 지역으로, 그 이전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로서 신도면(神道面) 소재지였다.
 구파발동은 1973년 진관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었고, 1975년 진관내동과 함께 진관내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지명
물푸레골(구파발동 119번지 일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서오릉 방향의 서쪽 마을은 예전부터 물푸레나무가 많다고 하여 물푸레골이라 불렀다. 구파발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한양의 관문으로 각종 주막과 대장간이 있었으며, 특히 이곳에서는 장인이 운영하는 대장간에서 망치, 메, 낫 등의 농기구를 만들었다.
방아디리골 - 구파발동 125번지 일대 마을이 마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방아의 다리처럼 골짜기가 길게 뻗어 있다 하여 방아다리골이라고 불렀다.

해설:恩平區誌



진관내동(津寬內洞)

  진관내동(津寬內洞)이라는 명칭은 진관외동(津寬外洞)과 함께 이 지역 내에 진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고려사(高麗史)』에 다르면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을 죽이려는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음모를 피하려 진관사의 전신인 삼각산 실혈사(神穴寺)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현종이 머리를 깎고 이 절(神穴寺)에 머물렀는데, 천추태후가 사람을 보내 해치려 하였다. 절에 노승(老僧)이 방에 구멍을 파서 숨기고 그 위에 와탑(臥榻)을 놓아 불의의 사고를 방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종이 구해 준 노승의 이름이 바로 진관조사(津寬祖師)이며, 그 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이듬해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새로 절을 짓고 그 조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고 한다.
  진관동은 진관사를 경계로 뒤쪽을 내동(內洞), 앞쪽을 외동(外洞)이라 하였고, 이 때문에 두 동리의 이름은 현재 지도상으로 볼 때 서로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관내동은 197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었다가 1975 진관내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지명
못자리골(못절터) 舊 진관내동 산 68, 381, 345번지 일대 - 이 부근에 있던 절 경내에 커다란 연못이 있어 백성들이 ‘못절’이라 불러왔으나, 이후 절은 없어지고 연못만이 남아 ‘못절터’로 명명되어 내려오다가 ‘ 못자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옛날 절터임을 추측할 수 있는 기왓장이 간혹 출토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 및 유래는 알 수 없다.
탑골 (舊 진관내동 488번지 일대)-옛 부터 이 일대에 탑과 절이 많이 있어 불려진 이름인데, 지금도 몇 개 남아 있다. 이곳에 있는 한 석탑은 예부터 영험하여 아들을 바라는 부인들의 치성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탑골에서는 요즘에도 금줄을 치고 탑재를 지내고 있는데, 현재 ‘자씨각(慈氏閣)’이라는 전각이 세워져 있다. 여기소(여기소) 舊 진관내동 278번지 일대 - 예부터 북한산에는 전국의 많은 장정들이 성곽 축조 공사 노역에 동원되어 수년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공사에 종사하던 한 관리를 만나려고 어는 기생이 찾아와 면회를 요청하고 수일을 기다렸으나, 공사에 부정을 탄다고 거절, 끝내 만나주지 않자, 기생은 애통해 하면서 근처 연못에 빠져 주었다. 그 후 공사를 끝낸 그 관리가 기생이 연못에 빠져 죽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연못에 와서 “여기서 죽었는가” 하여 통탄했는데, 이후 이 연못을 ‘여기소(여기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연못은 사라지고 없다.
상골 - 진관내동 518번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진관내동 518번지 민가 마당 한구석에 수 백년 된 향나무를 상나무라고 불렀던 데에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이 향나무 옆에는 우물이 하나 있어 물맛에 늘 향내가 듬뿍 베인 유명한 우물이었다. 이 우물에 도술을 부린 금계(金鷄)가 알을 낳아 우물의 이름을 금계수탉우물이라고 불렀는데, 만병통치 약수라 하여 인근에 소문이 크게 났었다고 한다.

해설:恩平區誌



진관외동(津寬外洞)

  진관외동(津寬外洞)이라는 명칭은 진관내동(津寬內洞)과 함께 이 지역 내에 진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관동은 진관사를 경계로 뒤쪽을 내동(內洞), 앞쪽을 외동(外洞)이라 하였다.
  진관외동은 197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었고, 1975년 독립하여 진관외동 동사무소 관할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지명
기자촌 - 말그대로 기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다.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기자들의 내집 마련을 위해 땅을 내주면서 집단주거지를 조성하게 하면서 기자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9년 11월 입주를 시작하여 1974년 3월 분양이 완료되었는데, 입주 초기에는 모두 420여 가구였다.
마고정(진관외동 340, 302번지 일대) - 옛날 중국 사신들이 상소 등의 일로 중앙에 들어갈 때 조정에서 입궁해도 좋다는 전갈이 있을 때까지 구파발에 숙소를 정하고 말을 이 마을에 매어 두고 잠을 재웠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제각말(진관외동 144번지 일대) -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이 등극하여 조부 은현공의 묘를 이 마을에 이장시키고 제각을 많이 세워 마을 전체가 제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동(진관외동 185번지 일대) - 삼각산(북한산)에서 내려오는 폭포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선림사라는 사찰이 있다.

해설:恩平區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