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구(陽川區)

   양천구(陽川區)는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 신설된 구(區)이다. 「양천(陽川)」은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하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공암(孔岩)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과천)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양광도(楊廣道)로 속하여 수주(樹州)에 딸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공암(孔岩)을 양천(陽川)으로 고쳤으며,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경기좌도(京畿左道)로 편입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4년(1414)에 양천을 김포(金浦)와 병합하여 김양현(金陽縣)으로 하다가 동년에 다시 떼어내 금천(衿川)(시흥군)에 붙였다. 태종(太宗) 16년(1416)에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고종(高宗) 32년에 양천군(陽川郡)이 되었다.

  양천(陽川)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 때에는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제차(齊次)」라는 말은 지금의 김포군「양천」의 고명(古名)인데 뜻은 미상이나 혹시 「잿」(城)의 음차(音借)인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파의(巴衣)」는 「공암」의 「암(岩)」에 해당하는 「바위」의 음차이다. 바위는 「파의(波衣)」「파혜(波兮)」로 음차된 예가 많다. 그래서 양천은 제차파의현-공암현-양천현이 되었으며 「잿바위」혹은 「갯바위」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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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동(木洞)
 
신월동(新月洞)
 
신정동(新亭洞)

 

 

 

 

 

 

 

 

 

목동(木洞)

  목동(木洞)의 동명은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목동리(木洞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목동은 조선시대까지는 양천군(陽川郡) 남산면(南山面) 월촌리(月村里), 내목동(內木洞), 외목동(外木洞)이었던 것을 1914년 군, 면, 동, 리의 폐합을 하면서 김포군 양동면 목동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확장이 있을 때 김포, 시흥군 일대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영등포구에 양동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목동리는 이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8년 양동출장소를 폐지함에 따라 목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이에 포함되었다.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분리 신설하면서 목동은 신설된 양천구 관할이 되었다.

  목동은 날로 증가하는 도심인구의 분산과 서울 남부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조성되는 대단위 주택단지의 건설에 그 목적을 두고 개발되었다.

  신시가지 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전의 목동의 도시 속의 농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한 곳이었다. 동쪽은 안양천(安養川)이 흐르고 북쪽은 한강에 연하여 있기 때문에 장마 때마다 상습적으로 침수가 되는 곳이었다. 이 곳이 안양천의 정비작업과 한강개발사업, 경인고속국도 주변 정리 등으로 인해 신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다.
  70여년 전 안양천 제방공사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갈대가 우거진 침수지대로 무성한 목초(牧草)가 자연 조성되었기 때문에 말을 방목하는 목장(牧場)으로 이용되었다. 목장의 안쪽에 있던 마을은 내목동(內木洞) 혹은 나말, 안말, 안마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목동 제일 바깥쪽 끝부분에 있는 동네를 외목동(外木洞) 혹은 모세미라 하였으며 마장(馬場) 안 바로 옆에 있는 산은 마장산이라 하였다. 마장 안쪽은 마을을 마장안 또는 마장이라 하는데 내목동(內木洞)을 말한다. 또 부엉이처럼 바위모양이 생겼다하여 이름이 붙여진 부엉바위가 있으며 부엉바위가 있는 산을 부엉바위산이라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본 목동의 외산은 수명산과 우장산(雨裝山)이 있고 또 높이 98.8m의 매봉산, 양화산 등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치 한양이 내사산(內四山), 외사산(外四山)으로 형성된 것과 같은 형상으로 되어 있다. 또 객수(客水)인 안양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는 등 지형, 지세에서 왕이 나올 수 있는 곳이라 하던 왕재산(王在山)이 있었으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주택단지로 변하였다.

  1923년 한강수리조합에 의한 농수로의 개발과 1925년 대홍수로 한강변과 안양천변 일대가 모두 침수되자 한강변에 흙으로 제방을 쌓게 되어 전일의 목초지였던 곳은 농경지로 조성되었다. 이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농토가 있는 이 곳으로 모여들어 새로 이룩한 마을을 신촌(新村) 또는 새말이라 하였다.
  신촌에는 엄지미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화초등학교와 진흥연립이 있는 곳을 말하며, 엄지미란 부락이름은 엄지산(嚴知山)에서 유래되었다. 용왕산이라고도 하는 엄지산은 높이 78m와 68m의 봉우리 두 개가 붙어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목동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두 봉우리가 마치 펴놓은 엄지손가락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78m 높이 부분은 손바닥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조금 불룩하게 나온 곳이고 68m 높이 지점은 손톱부분으로 보인다.
  월촌(月村)은 달거리 혹은 달거리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용왕산 남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1단지와 2단지 동쪽부분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용왕산(龍王山)에서 떠오르는 달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고 한다.
  한강으로 유입되는 부분의 안양천은 원래 이름이 오목내였다. 이 부분에는 많은 세천(細川)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오목교 근방에 이르면 이들 세천에서 나온 물길들이 한데 모이면서 하천바닥을 움푹하게 골을 만들었고 이처럼 골이 형성되어 움푹 들어간 곳을 「오목하게 만들어진 내」라는 뜻으로 오목내라 하였다. 이 오목내에 걸쳐진 다리가 오목교인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곳의 물살이 세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게 되자 동네사람들이 다리를 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매번 다리를 놓을 때마다 떠내려 가므로 동네 사람들은 달리 방도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한 늙은 스님이 지나가다가 떠내려가는 다리를 붙잡아 매는 모습을 보고 '쯧쯧, 오동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쉬울 것을···'라고 하며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인부 한사람이 급히 달려가 무슨 말인가 하고 되묻자 '웃여울에서 오동나무를 떠내려보내 멈추는 곳이 다리 놓을 곳인데 괜한 장소에서 애쓰며 다리를 놓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힐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속는 셈치고 노승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근방에는 오동나무가 하나도 없으므로 멀리 남쪽에 있는 칼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 바로 안양천 물에 띄우자 과연 지금의 오목교 근방에서 멈추므로 이 곳에다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동나무다리라 불렀다.

  목동 신시가지 개발계획의 마지막 꽃은 목동종합운동장의 완성이다. 이 운동장은 서울시민들의 체육진흥을 위해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에 건설되었다.
  서울시가 목동 신시가지 개발사업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1987년 6월부터 20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목동 아파트단지와 안양천 사이 4만 8,269평의 대지에 착공한 이 종합운동장은 주경기장, 야구장, 실내빙상경기장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목동에는 목동 신시가지개발과 함께 중요한 전력공급처가 될 열병합 발전소를 1985년 1월에 착공하여 1988년 11월 28일에 완공함에 따라 국내 최초인 열병합발전소의 건설과 함께 국내의 난방 및 폐열관리 등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목동 906번지에는 1987년 3월 6일 착공 동년 7월 1일 준공 개원한 파리공원이 있다. 1886년 한국과 프랑스가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지난 백년동안 두 나라가 동서문화의 교류는 물론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국제평화유지의 혈맹으로 다진 우호를 상기하고, 파리시 코로니 아파트 단지 내에 「서울광장」을 마련한 답례로 신시가지 부지 2만 9,720㎡의 제2근린공원을 파리공원으로 조성케 되었던 것이다.

 

 신월동(新月洞)

 

  신월동(新月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 고을 원님이 양천향교(陽川鄕校)를 지나 현 화곡아파트 부근 돌다리 앞에 이르러 전망으로 보니 마을이 신선하고 반달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새「新」자와 달「月」자를 따서 신월리(新月里)라 명명한데서 비롯되었다.

 신월동은 갑오개혁시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서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된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신월리(新月里), 개대리(開垈里), 당곡리(堂谷里), 고음월리(古音月里) 등 마을이 띄어띄엄 자리잡아 이룩된 약 100호 정도의 마을이었다.
  1914년 경기도의 구역을 획정할 때 신월리, 당곡리, 고음월리를 합쳐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신당리(新堂里)로 하였는데 이들 마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중심지역인 신월리와 당곡리의 이름을 각각 따서 동명을  붙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신월동이 되었다. 1977년 강서구를 신설하면서 강서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양천구가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고,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를 신설하여 양천구에는 목동 신시가지에 해당되는 목동, 신정동과 함께 신월동이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에도 신월동은 교통의 요지와 김포평야가 끝나는 구릉지대로 침수지역이 없는 준평원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제법 큰 부락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신월동에는 자연부락명이 아직도 꽤 많이 남아있다.

  신원초등학교가 있는 뒷산에서 동쪽으로 발달한 동네를 곰달래라고 하는데 달빛이 맑게 비친다는 뜻의 고운달동네가 곰달래로 되었다. 한자로는 고음월(古音月)이라 쓴다. 신월2동 지역으로 경인고속도로변에 발달한 마을을 개대리(開垈里)라 한다. 개터리 혹은 새터골이라고도 하는데 곰달래 쪽의 사람들이 이주, 부락을 새로 형성하였다.
  신월3동 화곡로가 지나는 동네를 당곡(堂谷) 혹은 당꿀이라 한다. 마을의 어귀에 해당되는 곳으로 도당(都堂)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상곡(裳谷)이라고도 하는데 당집에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치마를 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곰달래의 아랫동네는 아랫말, 윗동네는 웃말이라 하며 신월2동 쪽을 한강말이라 하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홍수때 한강과 안양천을 넘쳐흘러 이곳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한강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 이 지방의 소산물 중 수산물로는 생자해(生雌蟹;게), 위어(葦魚;웅어), 백어(白魚;뱅어), 은어(銀魚), 면어(綿魚;민어?)등이 유명하였으며, 이 중 게와 웅어는 나라의 진상품으로 바쳤고, 사어는 국휼시(國恤時)혈에 진공하였다.
  이 직역은 한강에 연한 평탄한 야지(野地)로 지질은 비교적 비옥한 편이나 수원(水源)이 적어 수도작(水稻作)은 생수지(生水地)에나 경작이 가능하였지만 가뭄의 피해가 많아 야지는 전작(田作)을 대부분 하여였다.

  이 지방에는 다음과 같은 전래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양천원님이 부임할 때 울고, 나갈 때 운다.』

  양천현(陽川縣)은 장(長) 30리이며 광(廣) 15里가 되는 아주 작은 고을인 데다가 한강이 가까운 야지이기 때문에 수해가 가끔 있어서 해마다 흉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라야 잡곡 뿐이라서 누가 보든지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현감이 이런 고을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보니 낙심이 되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임하여 지내고 보니 봉급 외에도 꽤 생기는게 있었다. 즉, 매년 백미의 관수미(官需米 ; 현감의 식량으로 매년 정해놓은 쌀)가 108석이고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 손님 접대용으로 정해놓으 쌀)가 30석이며 그 밖에 은결(隱結)에서 남이 모르게 생기는 것과 또 살림에 해당하는 모든 물건이 들어오니 작은 고을로는 그만하면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 이런 고을을 버리고 다른 임지로 떠나게 되니 아까운 생각에서 또한 울 정도였다 하여 나온 말이다.

  『양천 사람은 바람마시고 죽(粥)을 마신다.』

  이 말은 기후에 따라 부는 바람이 아침에는 동풍이 불고 저녁때는 서풍이 부는 경우가 많아 일기가 고르지 않는 때가 많다. 그런 날 서울로 나무를 팔러 가는 나무장사나 행인이 항상 일찍 출발하므로 집에서 떠날 때에는 동풍이 불어 바람을 안고 가니 바람을 마시게 되고 저녁 때 집으로 올 때는 서풍이 불어 또 안고 내려오게 된다. 해마다 계속되는 흉작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을 하게 되어 죽을 먹는다는 데서 나온 속담이나 실제로 옛날의 실정이 그러하였다고 한다.

 

신정동(新亭洞)

  신정동(新亭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의 자연마을이었던 新機(신트리)의 「新」자와 은행정(銀杏亭)의 「亭」자를 따서 신정리(新亭里)라 한데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에 속하였던 것을 갑오개혁시 양천현이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됨에 따라 여러 부락들을 합하여 양천군 장군소면(將軍所面)의 은행리(銀杏里)와 신기리(新機里)로 하였다. 1914년 구역획정때 은행정리와 신기리는 양천(陽川)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양동면(陽東面)으로 하고 두 마을을 합쳐 신정리(新亭里)로 하였다. 1963년 영등포구 양동출장소로 소속되고 신정동(新亭洞)으로 동명을 변경하였다. 1968년 양동출장소의 폐지로 영등포구 신정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서 강서구를 분리하여 설치하자 신정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양천구를 신설케 되자 신정동은 신설된 양천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 남아 있는 신정동의 자연부락 명칭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남아있다.

  단산(丹山)은 현 신정동 산 125-1번지 일대로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둥근산을 말한다. 매년 음력 10월1일이면 이곳에 있던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기 때문에 당집이 있는 산 곧 당산(堂山)이라 불렀다. 신정산이라고도 하는 단산이 모양이 쪽박처럼 생겼다 하여 쪽박산이라고 하였다. 일제 때 근방에 농토를 개간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이 산 근방에 거주케 했는데 약 40여호의 농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담겨 있다.
  이 산은 원래 광주(廣州)에 있던 산으로 오랜 옛날에 비가 계속 내려 큰 홍수가 나자 광주에서 이곳까지 떠내려왔다. 비가 개인 뒤 광주고을에서는 없어진 산을 찾아다니다가 김포공암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알자 광주 관가에서는 「이 산은 우리 고을에서 떠내려와 이곳에 있는 것이니 해마다 우리고을에 조세(租稅)를 바치시오」하고 양천관아에 요구하였다 양천 고을원님은 광주 관아에서 요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산에서 생산되는 것이 없고 오직 싸리나무가 몇 주씩 드문드문 있으므로 해마다 싸리나무를 베어 비 세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었다.
  이해에도 비 세자루를 만들어 광주고을에 보내준 양천고을 원님이 조용히 생각해 보니 「저 벌거숭이 산에 기껏해야 싸리나무 몇 주 나는데 그것마저 비를 만들어 바치니 이런 귀찮은 일을 하면서도 저 산이 우리 고을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광주 관가에 「이 산은 우리 고을에 아무 소용이없으니 도로 가져 가시오. 앞으로는 빗자루도 못바치겠오.」하고 통보하자 광주 고을에서는 이 산을 가져갈 수 없어 양천 고을에 빼앗기고 말았다.

  신트리는 600여년 전의 지도에도 신기(新機)라 표기될 만큼 역사가 깊은 마을인데 금옥여고 어귀 정랑고개 아래 동네를 말한다.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전설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간혹 잘못 전해지는 기록으로 「옛날 신을 삼았던 마을」이라는 뜻의 표기도 있다. 신트리를 순우리말이라 한다면 新機의 「新」은「처음」이라는 뜻이 되고 「機」는 「틀」로 해석될 수 있다. 「틀」이란 「어떠한 짜임새 있는 것」이 되므로 「터」의 뜻과도 통한다. 「특」과「터」는 어떤 터전과 윤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월제3동에 「개터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새터에 발달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곳 주민들도 개터리의 「개」를 「開」로 보아 「트인 곳, 열린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기란 「새로운 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터리→신틀이→신트리로 전해진 것이라 봄이 타당하다.

  오금(梧琴)은 마을 형국이 오목하여 마치 사람의 다리 오금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영중학교 근방인데 조선시대에는 약 50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응골은 일명 웅골이라고도 하며 은행정 마을 북쪽에 위치한 깊은 골짜기에 발달한 마을로 은행정에 속했다.
  천호지벌판은 현 목동시영아파트가 았는 곳으로 옛날 한 기인(奇人)이 나타나 뒷날 이곳에 천호가 들어선다고 예언한 데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달밭이었는데 일제 때 논으로 개척하였다. 벌판의 길이가 천리나 된다하여 천리지벌판이라 불렀다고 한다.
  충청촌(忠淸村)은 일제때 안양천의 오목교 근처에 둑을 쌓고 그 근처를 농토로 개간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그들이 만든 부락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