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江西區)

 

염창동(鹽倉洞)
등촌동(登村洞)
화곡동(禾谷洞)
가양동(加陽洞)
마곡동(麻谷洞)
내발산동(內鉢山洞)
외발산동(外鉢山洞)
공항동(空港洞)
과해동(果海洞)
오곡동(五谷洞)
오쇠동(五釗洞)
방화동(傍花洞)
개화동(開花洞)



염창동(鹽倉洞)

  염창동은 조선시대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 창고를 지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국가 세원(稅源)이 되는 소금 창고가 있던 염창동은 고구려 때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했다가 신라가 한강연안을 차지하면서 한산주(漢山州)의 소속으로 되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때에 공암(孔岩)으로 고치면서 통진군(通津郡)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
  고려 성종(成宗)때에는 관내도(關內道)였던 것이 현종(顯宗) 때에는 양광도(楊廣道)의 관할이 되었다가 同王 9년(1018) 공암현(孔岩縣)의 수주(樹州)에 예속되었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 (1310)에 양천현(陽川縣)이라 하고 현령을 파견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양천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양천현이라 하였는데 태종(太宗) 13년(1413년)부터 염창동을 중심으로 한 양천현 일대에 비교적 많은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때에는 통진현(通津縣)으로서 현감이 파견되었다가 다시 양천현으로 만들었는데 곧이어 김포군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

  1895년 금천현(衿川縣)은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되었으나 이듬해 부제(府制)의 폐지와 함께 염창동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鹽倉里)로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옛 양천땅의  동쪽에 있던 염창동 일대는 김포군 양동면의 관할로 되었다. 1962년 서울시로 편입된 염창동은 1962년 영등포구 영동출장소의 소속이 되었다.
1968년 영동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염창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로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구, 강서구를 신설함에 따라 염창동은 강서구의 소속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염창(鹽倉)으로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 판매용으로 구분되어 각각 저장 보관하였는데 천일염으로만 제조되던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 취급되었다. 이에 암거래도 무척 성행하였다. 암거래와 투기, 운반 도중 물에 녹아서 염전에서 출발한 소금의 양이 이곳 염창에 도착하면 심한 경우 1/50도 제대로 남지 않아 염창에 소속된 관원은 물론 양천현의 관리들가지도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염창동은 한강가에 솟은 염창산의 산록에 홍수를 피하여 이전한 사람들로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발달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자연부락명에서 그 옛날 염창동의 흔적을 조금씩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주막거리가 있는데 지금의 양천(陽川)길가 양쪽으로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바로 강변에 나루터가 있고 그 인근에 염창이 있어서 배를 저어온 배꾼들이나 각지에서 모여든 소금장수들이 북적거리기 일쑤였기에 자연히 이들을 상대로 한 객주(客主)집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 하나의 부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을의 입구에 장승이 박혀있던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마을의 편안과 안녕을 위한 수호신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장승이 세워졌었다.
  염창동의 유일한 산으로 남아있는 염창산은 산의 모양이 마치 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쥐산이라고도 부른다. 이 쥐산의 동남쪽에서 마을과 이어지는 고개를 서낭당이 고개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 서낭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쥐산에서는 분가루같은 백토(白土)가 있어 바람 부는 날이면 근방 일대가 분(紛)이 날리는 것처럼 하얗다고 해서 분동산이라 한다. 염창동의 쥐산에는 옻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이 물을 마시고 온몸에 바르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촌동(登村洞)

  등촌동(登村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지형이 산등성이로 구성된 즉, 등마루로 이루어졌다 하여 등촌동으로 명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이었던 것이 양천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에 김포군(金浦郡), 통진군(通津郡), 양천군(陽川郡)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 통진, 양천군을 폐군하여 김포군과 합치고 이 지역은 김포군 양동면(陽東面)의 소속으로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의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관할로 편입되었다가 1968년 영등포구 직할이 된 후1977년 강서구를 분구 신설하자 등촌동은 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지명
  백석초등학교 근방인 등촌동 650번지 일대를 도림이라고 하는데 우장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로 일대의 길이 늘 질척하게 젖어있으므로 해서 도림(道臨) 즉 길질이라 하였다. 원래 臨은 질(泥)의 訓借이므로 해서 붙여졌다. 이 도림이 근방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해서 도림이 마을, 그 남쪽 골짜기 근방을 도림이 골짜기라 한다. 옛날 도림이 마을에는 맑은 우물이 있었는데 항상 차고 시원한 물이 넘쳐 흘러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이 물로 동네 입구가 질퍽하게 젖었다고 한다. 지금의 우장산과 한강변의 증산(甑山)은 원래 같은 산줄기로 이어진 것으로 공항로가 지나고 있는 부분은 꽤나 표고가 높은 산마루턱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 산마루턱을 중심으로 마을이 자리잡았다 하여 등마루골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지었다가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등촌동이었다.
등마루의 서쪽은 넓은 들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경복여고와 마포중학교와 화곡로 동쪽의 일대도 모두 논이었다. 이 논을 더펄논이라 부른다. 더펄논은 비가 온 후에도 등마루 골짜기에서 반드시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려와 논 전체를 물로 덮어 버리기 때문에 「물로 덮은 논」이「덮은논」으로 변했다가 다시 더펄논이 되었다.
  이 더펄논보다 조금 지대가 높은 동쪽 등마루의 서쪽 기슭은 비교적 얕으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가축을 방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는 서울,인천사이를 왕래하는 마지막 驛村이 가까운 화곡동에 있었고 역마(驛馬)는 이 골짜기에 놓아 길렀다. 이곳에 키우던 말은 때때로 궁중으로 진상이 되기도 하였고 궁중에서 키우던 말이 다시 이곳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등촌동 509번지 일대는 목동과 경계가 되는 등촌로가 지나고 있지만 옛날의 이곳은 산마루에서 이어내려온 곳에 불과한 고개턱이었다. 3가구가 살고 있던 이 고개턱을 세집메라고 하여싿. 이 세집메 동남쪽 부근에는 銀을 가득 채운 항아리 세 개를 이 동네에 살던 부자가 묻어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후세 사람들 여럿이 그 항아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만 하였는데 어느날 두 항아리만 찾고 나머지 독 한 개는 끝까지 못 찾아서 마을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한독굴이다. 나머지 항아리 한 개는 일제 때 엄씨(嚴氏)라는 사람이 찾아서 남산면(南山面) 면장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
  등촌동과 가양동 경계를 이루는 양천길 주위인 등촌동 58-1번지에서 15번지에 이르는 곳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었고 이 물에 오리가 와서 앉아 놀았다 하여 오리웅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리웅덩이는 더펄논의 북쪽으로 현재는 농수로가 이 부근을 지나고 있다. 옛날의 역말이었으며 등촌동의 효시가 되고 있는 곳, 즉 구석말과 너머말사이에서 서북쪽으로 나가다가 중간쯤의 거리에 있는 들판을 중벌이라 하였다. 현재 등촌동 639번지 일대이다.



화곡동(禾谷洞)

  화곡동(禾谷洞) 동명의 유래는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남산면(南山面) 화곡리(禾谷里)로 되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화곡리(禾谷里)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역의 확장으로 옛 양천군이었던 김포군의 양동면과 양서면(陽西面)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면서 양동출장소의 관할로 되었다가 1968년 1월 1일 양동출장소가 폐지되자 영등포구 화곡동이 되었다. 1977년 신설된 강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능꿀은 현재 화곡동 476~478번지 일대인데 신곡초등학교 있는 화곡제4동에 해당된다. 한자로 능동(菱洞)이라 불리우던 이곳은 약간 습한 지대로 약용으로 쓰는 마름풀이 많이 났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는데 김포군 양동면의 화곡리는 이 능동, 반곡동, 화곡동이 합쳐져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더부리마을 다음 가는 큰 마을이었다. 능꿀은 표고 90m의 매봉산이 있어 정월 보름에는 이 산위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고 쥐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능꿀과 바로 맞닿아 있던 동네는 더부리인데 능꿀에서 더부리로 갈 때에는 이 마을 뒤에 있는 더부리고개를 넘어야 했다. 토지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금에 와서 더부리고개의 흔적을 탖기란 매우 어렵지만 옛날 이 더부리고개에는 봄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능꿀과 더부리의 처녀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고 한다. 더부리 처녀들을 가슴에 담고 사모하는 능꿀 청년이 더부리고개를 몰래 넘다가 더부리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는 일이 허다하였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잇다. 아마도 '더불어(與) 산다'라는 끗을 지닌 이 더부리와 더부리고개는 능꿀과 앙숙으로 지내면서도 같이 협조하며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부리는 까치산 동북쪽에 위치했으며 현재 화곡제2동에 해당된다.
  화곡본동에 해당하는 역말은 지금도 강서구관내에서는 가장 중심지가 되고 있기 때문에 고금의 지명이 서로 상충함을 알 수 있다. 한자로는 역촌(驛村)으로 쓴다. 멀지 않은 곳에 염창(鹽倉)이 있고 그 일대에 주막이 형성되었으며 양화나루와 김포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았던 까닭으로 이곳에 역촌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말 근방의 화곡본동은 특히 우측으로 봉제산이, 좌측으로는 우장산이 있는 계곡에 형성된 마을인데 이 계곡은 옛날 천수답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이 기름지고 좌우 양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벼가 잘 자라기 때문에 화곡(禾谷)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이 화곡본동이 화곡동 일대에서는 최초의 주거형성지로 되었다는 주민들의 주장에 따라 1970년 12월 31일 화곡제2동에서 화곡본동으로 동명이 바뀌었다.
  빗뒤골짜기는 화곡동 1093번지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있던 자리 일대와 공항로 건너 등촌동 661번지 일대이다. 선정비(善政碑) 등 비석이 우장산 북동쪽 산기슭에 세워져 있으므로 해서 비가 서 있는 뒤쪽 골짜기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강서로가 지나고 잇는 화곡제5동과 화곡제3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양천군 반곡리(盤谷里)라 하였다. 우장산과 수명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굽이쳐 돌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졌다.
  화곡동에서 양동출장소가 있던 등촌동쪽으로 가는 고개, 즉 봉제산 기슭을 넘어가는 곳을 평상굴고개라고 한다. 이 고개 언저리에 있는 마을을 평상굴이라 하는데 지형은 산비탈이지만 평상처럼 평평한 곳에 자리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곡동에는 우장산(雨裝山)이 있는데 서울시에서 시민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우장산은 내발산동과 화곡제5동에 걸쳐있는 높이 98m의 산으로 옛날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우장산이란 이름은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즉시 비가 내리므로 반드시 우장(雨裝)을 준비하여 기우제에 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개발되기 이전의 화곡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 만큼 진흙땅이었다. 비만 오면 온통 신발에 엉겨붙는 진흙무게로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몇 곱절 더 차비를 지불한다 해도 택시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이 같은 화곡동의 진흙땅은 1925년 이후부터 항아리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다. 한강 상류연안에는 몇 군데 도기공장이 있었는데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이들 도기 만드는 사람들이 하류인 염창동으로 이주하여 독점을 차리게 되었다. 1935년 무렵만 해도 화곡동 언저리의 염창동에는 독 굽는 가마가 11개소가 되었는데 소요되는 흙은 모두 화곡동의 진흙이었다.



가양동(加陽洞)

  가양동(加陽洞)의 동명은 가마동(加麻洞)과 고양리(古陽里)가 합쳐지면서 비롯되었다. 가양동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양천현(陽川縣)이었으나 곧 금천군(衿川郡)으로 되었으며 인조 대에 양천군으로 잠시 승격하였다가 숙종때 다시 양천현이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陽東面) 가양리(加陽里)라 하였다. 가양리는 조선시대 양천현아(陽川縣衙)가 있던 중심지역으로 그 중 가장 오래된 가마동(加麻洞)과 고양리(古陽里)를 합쳐 이름을 붙였다. 옛 양천군이었던 김포군 양동면이 서울시 영등포구 가양동으로 편입되어 양동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68년 영등포구의 직할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서구에 속해 지금에 이른다.

옛지명
  가마동은 고양리와 함께 마곡동(麻谷洞)의 동명이 유래된 곳인데 지금의 대상(구 미원) 김포공장 언저리에 옛날 삼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천군의 중심지역에 해당하였다. 古陽里는 굉이말이라고도 하는데 고양이의 방언이 굉이이기 때문이다. 양천초등학교가 있는 근방으로 宮山의 남쪽 볕이 잘드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양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이 일대가 양천현아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래된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향교동(鄕校洞)은 가양동 234번지 양천향교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양천향교는 1914년 양천군과 통진군을 김포군에 병합하면서 ‘1군 1향교’라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946년 6월에 복구되었다. 공암리(孔岩里)는 지금 孔岩이 있는 이대의 마을이다. 궁산은 원래 城山이라고도 한다. 양천군의 진산이 되는데 옛날 城府地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궁산에 관한 기록으로는 <진증동국여지승람>이 있는데 여기에 ‘고서에 이르기를 이 산에는 石城이 있어 그 주위는 726尺이나 된다.’라고 하였다. 사실 석성의 꽤 많은 부분이 6,25동란 직전만 하더라도 남아있었으나 천도 직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훼손, 마멸되어 지금은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몇 개의 석축과 겨우 몇 십미터 정도되는 길이의 석축이 남아 있어 석성인지 아닌지 얼핏 구분이 가지않을 정도이다.
  한편 궁산 아래 절벽 밑 가양동 24번지에는 구멍뚫린 바위가 있어 이를 흔히 孔岩, 廣州암, 廣州바위, 廣濟바위라고 칭해오고 있다.
공암을 고구려 때에는 齊次巴衣라고 하였는데 바위의 한자표기인 巴衣로부터 양천의 별호인 巴陵이 생기게 되었고 양천으로 읍치를 옮긴 후 뒷산을 巴山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공암은 일명 ‘許哥바위굴’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고로들은 이곳을 양천허씨 발상지로 부른다.
  탑이 세워져 있어서 이름이 붙은 탑산(塔山)은 공암나루 바로 뒤편으로 일직선상이 된다. 산 중턱에는 어느 때 세웠는지 모르지만 매우 오래된 탑이 한 기 서있었다. 그러나 6,25동란 때 무너져 버린 후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일대는 가양동 주민들의 공원 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가양동 234번지는 양천현아가 있던 자리로 현재는 陽川鄕校가 복원되어 있다. 향교의 정문 좌측에는 근방에 흩어져 있던 양천현 역대 현령들의 업적을 기린 善政碑를 한군데 모아놓았다. 양천현아의 중심이며 현령의 집무실인 종해헌(宗海軒)이 1977년까지 있었으나 그 자리에는 연립주택이 대신 세워져 있다. 양천향교는 성루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향교인데 유교의 교리를 교육덕목으로 하여 수학하던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으로 1411년(태종 11)에 설치되었다.
1906년 학제가 대폭 개혁되면서 종래 향교에서 담당하던 교육은 중지되고 1913년 일제의 식민사업을 보다 잘 수행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군 1향교제를 시행케되자 양천향교는 폐지되고 모든 재산과 각교궁(各校宮)도 통합된 김포향교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양천향교가 김포향교로부터 독립하면서 재산과 경영도 독자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1981년 붕괴된 담장과 건물을 보수하면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향교형태로 복원준공되었다.



마곡동(麻谷洞)

  마곡동은 옛날 이 일대에 삼(麻)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곡동은 조선초기까지 양천현(陽川縣)이었다가 인조(仁祖) 때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되면서 이의 소속이 되었다.
 1895년 인천부(仁川府) 12군중 하나인 양천군의 양천읍이 되었다. 1914년 경기도 구획 획정시 김포군, 통진군과 양천군을 합친 김포군 양동면 마곡리(麻谷里)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역의 확장으로 서울시의 영등포구 마곡동으로 편입되었으며 1977년 영등포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곡동 108번지 일대를 마곡(麻谷) 혹은 마결(麻結)이라고 부른다. 마곡동의 중심마을이 되는데 삼을 많이 심었던 곳이다. 마곡에는 항상 논에 물이 가득 채워져있다는 굿논이 있고 이 굿논의 중간을 뚫고 흐르는 개울을 굿논개울, 개울에 놓인 시멘트콘크리트다리를 굿논다리라 하였다.
  마곡동의 223번지 근처의 동산을 뒷동산이라 하고 마곡의 북쪽은 웃말이라 하였다 또 마곡의 서남쪽 방화동과 경계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아랫말이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이 마곡동 강변 궁산(宮山)의 서쪽에는 高市라는 일본인이 처음 들어와 살면서 주변의 농경지를 매입, 제법 넓은 지역을 소유하면서 본국의 친척들을 불러 농장처럼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인근 부락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을 일컬어 이들 高市네 일가가 모여사는 곳이라 하여 고시네촌이라 불렀다.



내발산동(內鉢山洞)

  내발산동(內鉢山洞)은 이 동의 주산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鉢山)이라 부르고 그 발산의 안쪽으로 형성 발달된 마을이라 하여 동명이 붙여졌다.
  이 지역은 조선초에는 양천현이었다가 인조 때 양천군으로 승격되었고 선조 이후에 양천현(陽川縣)이 되었다. 조선말에는 간뎃말, 원대이, 발음 등 산촌으로 형성되어 있던 마을이 모여 원당리(元堂里)와 내발산리(內鉢山里)라는 큰 마을로 발전되었다.
  1895년 인천부(仁川府)의 12군 중 하나인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원당리(元堂里), 내발산리(內鉢山里)로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김포군 양서면 내발산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역이 확장되면서 내발산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된 후 1977년 9월 1일 영등포구에서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강서구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내발산동은 우장산(雨裝山)의 산록에 발달한 취락이다. 117.7m의 수명산에서부터 발달해 뻗어온 93.6m의 우장산은 화곡로를 중심으로 좌우대칭 형태를 이루는데 수명산을 주산으로 할 때 우장산은 좌청룡이 된다. 이 좌청룡이 다시 가지를 뻗어 서남한 것이 발산인 것이다. 따라서 72.3m의 발산은 수명산의 진산이 되는데 산의 모양이 주발처럼 생겼고 이 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그 주변 지역에 발산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이다.
  간뎃말은 발음(鉢音)의 한 마을로 가운데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발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에서부터 687번지와 700번지 일대로 과거에는 내발산동의 중심지역이었다.
  발음(鉢音)은 조선조말에 발산 건너편에 경문(慶門)이 세워지던 날 저녁에 발산이 울었다 해서 생긴 또 다른 이름이다. 발음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명덕여중(구 영일여중), 명덕여고가 있는 일대의 동네는 윗말 또는 웃말이라고 하였다.
  윗말과 인접한 곳으로 우장산 산줄기가 이어지는 곳을 원당(元堂) 또는 원대이 라고 한다. 원당은 내발산과 함께 내발산리를 이루는데 이곳에 堂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문(慶門)이 섰던 곳을 경문재라고 하였는데 경문재 아래에는 경문밭이 있었다. 경문밭은 경문의 유지 관리를 위해 나라에서 이 마을에 내려준 밭을 말한다. 그러나 경문이 섰던 자리와 밭은 확인할 수가 없고 어느 재상이 자식처럼 여기고 돌보던 애마가 죽자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터가 지금의 내발산아파트 자리라고 전한다.
  내발산동 660-20번지에는 경민사라고 하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문화유씨의 모임이 종종 이루어지며 봄 가을 두차례에 걸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일종의 동제를 지낸다.
  내발산동 678번지는 발음 중에서 제일 나중에 새로 생긴 동네라 하여 새터말이라 하며 이곳에 있는 우물을 새터말우물이라 불렀다. 이 새터말로 가기위해서는 개낄재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새길고개라고도 하였다.



외발산동(外鉢山洞)

  외발산동(外鉢山洞)은 이 마을의 주산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발산)이라 부르고 그 발산의 바깥쪽으로 마을이 형성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의 이 마을은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양서면(陽西面) 외발산리(外鉢山里)였다.
  조선 인조 때 양천현(陽川縣)이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됨에 따라 양천현의 신광명(新光明), 구광명(舊光明)이 합쳐져 양천군 가곡면(加谷面) 외발산리(外鉢山里)로 되었다.
  1895년 인천부(仁川府)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외발산리가 되었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陽西面) 외발산리가 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외발산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된후 1977년 9월 1일 영등포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서구의 관할로 되었다.

  외발산동은 높이 72.3mdls 발산의 바깥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발산은 수명산의 진산으로 화곡동의 우장산이 이 수명산의 좌청룡이 되고 이곳에서 다시 가지를 벋어 서남쪽에 가서 結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발산의 서북부와 서남쪽에 형성된 외발산동은 능선 아래로 취락구조가 발달되어 있으므로 준평원과 산록이 병행된 자연적인 입지를 갖추고 있다. 곧 발산쪽으로는 얕은 구릉이 형성되므로 산비탈을 이용한 과수원과 밭이 일찍부터 발달되었고 그 보다 낮은 준평원지역은 김포평야의 일원이 되어 넓은 들을 이루고 있다.

  구굉명이 혹은 구광명(舊光明)이라 불리우는 곳은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아직 보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이곳을 지나면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고 그 연유로 해서 붙여졌다. 곧 수양대군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통진(通津)쪽으로 다녀올 때 길을 잘못 들은 데다가 날이 저물자 가까이 불빛이 보이는 마을에서 쉬게 되었다. 마을에는 효자와 효부가 많이 살았는데 수양대군은 이들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그지없이 숭고해 보여 날이 밝은 즉시 도성 안으로 들어가 대군의 이름으로 이 마을 사람 전체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이문(里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또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경문(慶門)을 세워 주었는데 사람들은 이문과 경문이 함께 세워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라 하여 동네의 이름을 오랫동안 빛날 것이라는 뜻으로 광명마을 곧 광명이라 하였던 것이다. 광명리(光明里)에서 광명이, 그리고 다시 굉명이로 음이 변하였다. 그 후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자 고개너머에 이곳 사람들이 이주해 살면서 먼저 마을을 구광명 또는 구굉명이라 하고 고개 너머의 새로 생긴 마을을 신광명 또는 새굉명이, 너머말이라고 하였다.

  발산 아래 마을 쪽에는 산우물이 있었는데 예부터 산제를 지낼 때에만 이 물을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덮어둔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오곡이 자되고 여름 장마철에 산사태가 나는 일이 없도록 비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용하게도 신수를 다른 우물을 사용하면 마을에 재앙이 들었다고 한다. 곧 가뭄이 들어 곡식이 다 타버리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산사태가 나지 않으면 논에 물이 너무 많아 냉병으로 인한 냉해로 벼의 수확량이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던 중에 마을의 영험한 노인 한 사람이 잠시 낮잠을 잘 때 꿈속에 어린 동자 한 명이 나타나 산신제 때 떠올린 제수(祭水)에 지렁이가 나와 마실 수가 없는데도 계속 이 물을 떠놓으니 사람들도 물을 마실 수 없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노인이 무슨 물을 마셔야만 되느냐고 반문하니 산우물만이 정결한 물이므로 부정한 사람들은 마시지 않도록 하고 그 물을 떠서 받치라고 하였다. 꿈속의 동자가 일러준 대로 산우물을 제수로 사용하면서부터 마을에는 동티가 나지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남부순환로변의 264, 271~275번지 일대의 들판을 엉굴이라 하는데 엉굴에서 천년 묵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 하여 용의 굿이라고도 부른다. 엉굴이 있는 곳 남쪽의 야산은 부천시와 경계가 되며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기, 서낭당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때에는 이곳에 장이 섰다 하여 장터고개라고도 한다.



공항동(空港洞)

 공항동의 동명 유래는 이곳에 김포비행장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졌다.

 조선시대까지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눌어리(訥語里), 송정리(松亭里), 소율리(小栗里)였으나 1914년 눌어리, 송정리, 소율리를 한데 묶어 김포군 양서면(陽西面) 송정리라 하였다.  3개의 자연부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은 송정리는 소나무가 울창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63년 서울시역의 확장으로 시울시 영등포구 공항동으로 개칭 편입되었다. 1977년 강서구가 분구되어 공항동은 이에 속하게 된다.

  일본침략기에 공항동 일대에 일본육군 군사비행장을 건설코자 하는 계획을 1936년 수립, 1937년부터 작업에 착수하였다. 현재 김포공항 국내선지역은 일제 때 군사비행장 시설의 중심으로 확충된 것이다.

  송정리는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松亭)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불렀다.
  눌언리는 누랭이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던 사람이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눌언이」마을이라 하던 것이 눌어리(訥語里)로 되었다. 누랭이는 눌언이 변해서 된 이름이다.
  소율리는 소배미라고도 하며 밤나무꿀이라고도 했다. 옛날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을 때 그 속에서 예닐곱집이 살아 소배미라 했는데 6·25동란때 피난민들이 밤나무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개이름으로는 서울고개, 칡불고개가 있다. 지형이 습지와 야산의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다른 동네와는 달리 고개가 적은 것도 공항동의 특징이다.  



과해동(果海洞)

  과해동은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며 서울특별시의 극서지역이다. 마을의 형국이 오이줄기가 바다쪽으로 뻗은 꼴이라 해서 과해(瓜海)라 하다가 음이 같은 과해(果海)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과해동은 대한제국 때까지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내과해리(內果海里) ,외과해리(外果海里), 신선리(新旋里), 장산리(獐山里)의 여러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14년 경기도내의 각 구역과 명칭이 새로 조정되면서 양천군의 내과해리, 외과해리, 신선리, 장산리를 합쳐서 과해리라 하였다. 1963년 과해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로부터 강서구를 신설하자 과해동은 이에 속하게 된다.

  과해동의 지형은 얕은 구릉과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만큼 높은 산이나 고개는 없다. 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도 약간 경사진 언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의 자연적 여건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나마 이런 곳도 비행장 조성을 위해 깎아내서 형체가 남아있는 데는 없다.
  또한 인공수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천과 김포쪽에서 들어온 굴포천(掘浦川)으로 항상 수량이 넉넉하기 때문에 과해동 방향의 논으로 수로를 만들거나 자연발생적으로 새긴 개울들이 많이 있었다.



오곡동(五谷洞)

  오곡동(五谷洞)은 지금의 김포공항 자리에 옛날에는 골짜기 5개가 있었으므로 이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오곡동은 조선 영조때에는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오곡리(五谷里)였다가 1895년 5월 26일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소지역주의를 택하게 될 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고, 도 이하의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은 통틀어 郡으로 통일하였는데 오곡리는 부평군 소속으로 되었다.
  1914년 부천군(富川郡)을 신설하면서 오정면(吾丁面)의 오곡리(五谷里)가 되었다. 이 때의 오곡리는 부천군이 신설되기 이전 부평군 주화관면(注火串面)의 오곡리(五谷里)와 내촌(內村)을 합쳐서 만들었다.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오정면의 오곡리는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오곡동(五谷洞)이 되었는데 영등포구에 신설된 양서출장소에 편입, 관할을 받았다.
  1977년 9월 1일 양서출장소 관할의 오곡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오곡동의 동명 유래에 대해서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이곳에 다섯 골짜기가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나, 신태현(辛兌鉉)의 <삼국사기 지리지의 연구>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신태현은 오곡을 ‘구븐골’로 궁화운홀(弓火云忽)이라하고 곡곡(曲谷)의 뜻으로 보았다. 실제 오곡동은 골짜기가 형성될 만큼 산이 높은 지형을 갖춘 곳이 아니라 거의 준평원 구릉 지역일 뿐이다. 그런데 오곡동을 이룬 옛 마을들, 긴등이라든지 솔말, 노루메, 안말 등이 위치한 곳을 지도상에서 이어보면 마치 활‘弓’字처럼 생격T고 김포공항이 확장되기 전인 1950년대의 군사지도를 보아도 그렇다. 따라서 오곡동의 동명 유래는 마을들이 생겨나서 마치 弓字처럼 이루고 살았기에 ‘굽은골’이라는 뜻으로서의 五谷이 된 것이 더 정확할 듯 하다.

  오곡동에는 옛이름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렁이 깊은 곳에 있는 논을 군논, 논이 크다 해서 대논, 논 가운데 바위가 있는 바위논, 논의 모습이 바지가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바지갈랭이가 있고 장구처럼 생긴 들은 장구배미, 세모꼴로 생긴 논은 세귀배미라 했다. 또 우리나라 지도처럼 생긴 논은 지도배미라 불렀다.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긴등이라 하는데 210, 212~218, 200~205, 356~360번지 일대로 현재 취락지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안말은 227, 232, 174~180, 111~120번지 일대에 형성된 마을로 긴등보다 공항동쪽으로 위치한 마을이다.
  뒷벌 곧 안말의앞에 있는 들로 가는 농사길은 뒷벌길이라 하고 산모양이 동그랗게 생긴 산을 동그란산, 공동묘지가 있던 산을 북망산이라고 했다. 오곡동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이를 북망산 공동묘지라 했고 산 모양이 용의 허리처럼 생긴 곳을 용허리라 했다.



오쇠동(五釗洞)

  오쇠동은 옛날 이곳에 弩(쇠노)를 만들던 사람 다섯명이 도망와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동명이다.

  조선 영조(英祖) 때에는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오쇠리였는데 1895년 부평군(富平郡)으로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던 것이다.1896년 부평군 주화관면(注火串面) 오쇠리(五釗里)가 되었다. 1914년 부천군(富川郡)을 신설하면서 오정면(吾丁面)의 오쇠리가 되었다. 1963년 부천군 오정면 오쇠리는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오쇠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 설치하였던 양서출장소 관할의 오쇠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안오쇠와 밖오쇠는 오쇠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안오쇠는 다시 아랫말과 웃말로 나누어져 있다. 밭 한가운데 옻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그 중 마을 바깥 쪽으로 있는 옻나무의 독성이 더 강해 이 옻나무 곁을 스쳐가기만 해도 옻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쪽에 있는 옻나무는 이보다 옻의 성질이 약하고 또 옻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먼저 타므로 밖에 있는 옻나무에서 옻이 먼저 오른다는 뜻의 밖오시라 했다고 전한다.
  죽은나무골은 김포비행장이 미군 관할하에 있을 무렵 미군 76공병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일대를 칠륙부대라 하게 되었는데 칠륙부대가 있는 등성이에는 한번 죽었다가 3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향나무가 있어서 죽은나무골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방화동(傍花洞)

  방화(傍花)라는 지명은 개화산(開花山)의 옆에 있으므로 얻어진 것이다. 6호 국도와 48호 국도의 교차점이 된다.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 건너로 행주산성과 대하고 행주도(幸州渡)가 있었다.
  방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삼정면(三井面) 정곡리(井谷里), 치현리(雉峴里), 능리(陵里)로 각각 나누어진 부락이었다.
  1914년 3월 1일 양천군 삼정면의 정곡리, 치현리, 능리를 김포군 양천면 방화리로 하였다. 이때 개화산을 중심으로 인근 일대의 부락을 통합하여 성립된 방화리는 꽃이 피는 모습과 같은 개화산 옆에 발달한 동네라는 뜻으로 동명을 붙였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陽西面)의 방화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방화동으로 편입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는 영등포구 관할 하에 있던 방화동을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도록 하였다.

  방화동을 이룬 부락은 정곡리, 치현리, 능리였다.
  능리는 능말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말에 이곳을 왕능지로 잡았으나 왕기가 모두 南京(지금의 서울)쪽으로 빠져나간다는 대신들의 만류로 잡아놓은 왕능터에 말뚝만 박아 놓은채 능지임을 표시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했고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도 묘를 쓸 수 없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조선 中宗때 좌의정이었던 심정(沈貞;1471~1531)이 관직에서 물러나 노년을 지낼 주택지로 보고 재임중에 이미 선택을 했던 마을이라고도 한다. 심정은 평소 이곳의 지기가 뛰어난 곳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던 중 어느날 개화산 쪽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 위에서 강을 내려다 보는 풍경이 비경 중에서도 뛰어난데 반해 즉시 별장을 짓도록 하고 자신의 호를 따서 소요정(逍遙亭)이라 하였다.
  정곡(井谷)은 치현(雉峴)의 동쪽 끝에 자리한 마을인데 마을 골짜기에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다. 다른 부락에서는 가뭄 때 마을의 샘과 골짜기의 물이 말라붙어도 이 마을 만은 언제나 물이 마을을 돌아 흐르고 있기 때문에 샘물이 치현을 돌아 흐르는 마을이라는 뜻의 돌정말(또는 돌샘말)이라 하였다. 井谷은 돌정말의 한자명이다.
  치현리(雉峴里)는 개화산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이어진 높이 70.5m의 치현이 있는 주위에 발달한 마을이다. 치현은 이 고개가 꿩사냥 하기에 좋았기 때문에 붙여졌는데 방화리라는 동명이 생긴 이후에는 방화고개라고도 불렀다. 신설동(新設洞)은 원래 예닐곱채 정도의 집이 있었으나 6.25동란 이후 새로 집들을 많이 짓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새로 지은 집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졌던 이름이다. 640, 641, 667, 669, 620, 626, 634번지 일대로 개화로 서쪽이 이에 해당된다.
  긴등은 서쪽 끝에는 수용소말이 자리잡고 있다. 수용소마을은 혹은 수용소부락이라고도 하는데 6.25동란 뒤에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에서 월남해왔던 피난민들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이 일대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강서농협 방화지점이 있는 서북쪽이다.
  개화산과 치현이 이어지는 잘쑥한 허리부분을 큰고개라 불러왔다. 행주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이었던 이 고개를 넘었는데 은근히 높고 나무가 울창해서 대낮에도 혼자 넘기에는 으스스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개를 넘으려면 대여섯명이 모여서 횃불을 들고 지났다고 한다.토성고개는 큰고개에서 이어진 작은고개에 해당하는 곳이다. 얼핏보면 와우(臥牛)의 모양이기도 하고 복호(伏虎)의 모양이기도 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이러한 곳을 장지로 선정하면 부(富) 혹은 귀(貴)가 따른다고 해서 명혈(名穴)로 여긴다.
  복종(伏鍾)머리는 옛날 이곳 마을에서 집터를 닦는데 땅 속에서 엎어진 종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혹은 복종이라고도 한다. 개화초등학교가 있는 근방 일대이다.



개화동(開花洞)

  개화동(開花洞)의 동명은 이 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開花山)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개화동은 대한제국까지 김포평야와 행주나루 끝에 걸쳐있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삼정면(三井面) 내부석리(內浮石里), 상사동(相思洞), 개화리(開花里), 외부석리(外浮石里)의 자연부락들로 이루어졌다.
  1914년 3월 1일에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陽西面) 개화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는데 개화동은 영등포구 양서출장소에서 담당하였다. 1977년 9월 1일 강서구에 속하도록 하고 양서출장소는 폐지하여 현재에 이른다.

  개화동을 이룬 상사동(相思洞)은 상시꿀, 상사꿀, 갯모랭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행주대교 남단 인터체인지로부터 개화로의 북쪽지역에 걸쳐 발달한 마을이다. 옛날 어느 가난한 사람이 개화산 귀퉁이에 뽕나무로 집을 지었다 해서 상사꿀이라 했는데 이로 보면 아마 상산곡(桑山谷)이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은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굴포천(掘捕川)의 배수로 허리쯤에 있기 때문이다. 한강하류는 인천만의 바닷물이 섞여지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 하였다.
  내,외부석리는 마을 뒷산 부석(浮石)의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부석 바위 두 개가 상하로 서로 덮쳐있는데 그 사이로 실이 빠져나갈 만큼 공간이 있으므로 떠있는 바위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신대가 주둔하기 위해 부대를 만들면서 바위를 묻어버렸다. 그 후 통신부대가 이전하고 일대를 주택지로 새로이 조성하였다. 부석이는 개화동 새마을회관이 있는 일대로 새터말과 상사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새터말은 신대(新垈)라고도 하는데 부석이 마을이 번성해지자 마을 사람들 일부가 그 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 부락을 형성하자 부석이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418~472번지 일대이다.
  한강수리조합에서 1923년에 설치한 인공수로는 부석이 앞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마을 앞 수로위에 설치한 다리를 개화동다리라고 한다. 상사동쪽으로는 배수로가 되는데 상사동 입구 부석이 끝에 있는 다리를 갯모랭이 다리라 하였다.
  부석이 마을 산 밑에 예부터 있던 큰 우물을 상두물이라 하였다. 마을 제사때 제수(祭水)로 사용했다는 이 우물은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도 반드시 우물 앞에 멈추어서 상여꾼들이 물을 마시고 死者의 영혼도 목을 축이고 지나갔다. 49일 동안이나 멀고 험한 저승길을 가야하는 사자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베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 바로 이 상두물에서 목을 추기게 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평구덩이는 한강 수리조합에서 1923년 제방을 구축할 때 취토한 흙 때문에 생겨난 구덩이로 연못이 된 곳을 말한다. 토목뚝은 한강이 범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토목국(土木局)에서 구축한 뚝인데 부석마을에서 상사동까지이다.
  갯모랭이 앞의 나루를 행주(幸州)나루라고 하는데 행주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개화동에서 고양군 지도읍 행주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또 갯모랭이 근처 한강 연안에는 농장이 있었는데 난민정착사업장이라 하였다. 오랜 침식작용과 토사의 운반작용으로 이루어진 농경지로 토지가 매우 비옥하였던 이곳에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의 난민들이 6.25동란 때 월남하여 밭벼, 채소등을 가꾸면서 정착한 곳이다.
  ‘양천읍지(陽川邑誌)’의 고적조(古蹟條)에서는 개화사(開花寺)가 있는 산 이름을 주용산(駐龍山)이라 하기도 하고 개화산(開花山)이라고도 하는 내력을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신라 때에 한 도인이 이곳 주용산에 살면서 주용선생(駐龍先生)이라 자칭하며 숨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이곳에서 늙어 죽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 살 때 매년 9월 9일에는 동지 두 세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 이라 하였으므로 주용산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돌아간 후에 그 자리에는 이상한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일컬었다. 지금의 개화사(開花寺)가 선생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개화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산이다. 산정에서는 삼각산과 도봉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치는 조강(祖江)의 광활한 조해(潮海) 풍광을 아울러 조망할 수 있다.
  개화사는 약사사(藥師寺)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약사사 거의 다가서 길 왼쪽 쯤에 여우굴이라 부르는 은 굴이 하나 있다. 여우가 숨어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굴인데 길이가 약 7~8m, 폭은 2m 정도 되는 제법 넓은 굴이다.
  굴입구를 따라 양쪽으로 시멘트 콘크리트로 턱을 만들어 놓았는데 방공호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 주민들은 이 굴에 대해서 또 다른 전설이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남녀가 마을을 떠나 행주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려 하였다. 그러나 나루터를 지키는 관헌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숨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이슥해지면 몰래 강을 건너려는 목적이었다. 숨을 만한 곳을 찾던 중 마침 발견한 곳이 이 여우굴이었고 두 사람은 이 굴속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남자가 보니 여우가 사랑하는 여자를 해치려 하는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해 여우와 싸워 마침내 이겼으나 그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고 숨을 거두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여자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미쳐버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어쩌다 지나는 행인을 마주치면 여우처럼 자세를 갖추고 공격하기 일쑤였다. 굴 입구에 불을 때서 미친여자는 질식해 죽었으나 그 후부터 누구도 이 굴 가까이는 가지 않으려 하였다. (김승환, 개화동 거주 1990년 10월 16일 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