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江西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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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동(鹽倉洞) |
염창동은 조선시대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 창고를 지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되었다. 국가 세원(稅源)이 되는 소금 창고가 있던 염창동은 고구려 때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
했다가 신라가 한강연안을 차지하면서 한산주(漢山州)의 소속으로 되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때에 공암(孔岩)으로 고치면서 통진군(通津郡)의 속현(屬縣)으로 되었다. 1895년 금천현(衿川縣)은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되었으나 이듬해
부제(府制)의 폐지와 함께 염창동은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鹽倉里)로 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옛 양천땅의 동쪽에 있던 염창동
일대는 김포군 양동면의 관할로 되었다. 1962년 서울시로 편입된 염창동은 1962년
영등포구 영동출장소의 소속이 되었다. 염창(鹽倉)으로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 판매용으로
구분되어 각각 저장 보관하였는데 천일염으로만 제조되던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 취급되었다. 이에 암거래도 무척 성행하였다. 암거래와
투기, 운반 도중 물에 녹아서 염전에서 출발한 소금의 양이 이곳 염창에 도착하면
심한 경우 1/50도 제대로 남지 않아 염창에 소속된 관원은 물론 양천현의 관리들가지도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염창동은 한강가에 솟은 염창산의 산록에 홍수를 피하여 이전한 사람들로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발달되었다. |
등촌동(登村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지형이 산등성이로 구성된 즉, 등마루로 이루어졌다 하여
등촌동으로 명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천현(陽川縣)이었던 것이 양천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에 김포군(金浦郡), 통진군(通津郡),
양천군(陽川郡)으로 나누어졌다. |
화곡동(禾谷洞) 동명의 유래는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가양동(加陽洞)의 동명은 가마동(加麻洞)과 고양리(古陽里)가 합쳐지면서 비롯되었다.
가양동은 조선시대 초기까지 양천현(陽川縣)이었으나 곧 금천군(衿川郡)으로 되었으며 인조 대에 양천군으로 잠시 승격하였다가 숙종때 다시 양천현이 되었다. |
마곡동은 옛날 이 일대에 삼(麻)을 많이 심었던 동네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곡동은 조선초기까지 양천현(陽川縣)이었다가 인조(仁祖) 때 양천군(陽川郡)으로 승격되면서 이의 소속이 되었다. 마곡동 108번지 일대를 마곡(麻谷) 혹은 마결(麻結)이라고 부른다.
마곡동의 중심마을이 되는데 삼을 많이 심었던 곳이다. 마곡에는 항상 논에 물이
가득 채워져있다는 굿논이 있고 이 굿논의 중간을 뚫고 흐르는 개울을 굿논개울,
개울에 놓인 시멘트콘크리트다리를 굿논다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이 마곡동 강변 궁산(宮山)의 서쪽에는 高市라는 일본인이
처음 들어와 살면서 주변의 농경지를 매입, 제법 넓은 지역을 소유하면서 본국의
친척들을 불러 농장처럼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인근 부락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을
일컬어 이들 高市네 일가가 모여사는 곳이라 하여 고시네촌이라 불렀다. |
내발산동(內鉢山洞)은 이 동의 주산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鉢山)이라 부르고
그 발산의 안쪽으로 형성 발달된 마을이라 하여 동명이 붙여졌다. |
외발산동(外鉢山洞)은 이 마을의 주산인 수명산(壽命山)의 모습이 주발처럼 생겼으므로 발산(발산)이라
부르고 그 발산의 바깥쪽으로 마을이 형성된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
공항동의 동명 유래는 이곳에 김포비행장이 있음으로 해서 붙여졌다. 조선시대까지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눌어리(訥語里),
송정리(松亭里), 소율리(小栗里)였으나 1914년 눌어리, 송정리, 소율리를 한데 묶어
김포군 양서면(陽西面) 송정리라 하였다. 3개의 자연부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인구가 많은 송정리는 소나무가 울창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침략기에 공항동 일대에 일본육군 군사비행장을 건설코자 하는
계획을 1936년 수립, 1937년부터 작업에 착수하였다. 현재 김포공항 국내선지역은
일제 때 군사비행장 시설의 중심으로 확충된 것이다. 송정리는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울창했고 이곳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소나무로 된 정자가 있으므로 그 정자 이름을 송정(松亭)이라 하고 일대를 송정리라
불렀다. |
과해동은 강서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이며 서울특별시의 극서지역이다.
마을의 형국이 오이줄기가 바다쪽으로 뻗은 꼴이라 해서 과해(瓜海)라 하다가 음이
같은 과해(果海)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과해동은 대한제국 때까지는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가곡면(加谷面)
내과해리(內果海里) ,외과해리(外果海里), 신선리(新旋里), 장산리(獐山里)의 여러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과해동의 지형은 얕은 구릉과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만큼 높은 산이나
고개는 없다. 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도 약간 경사진 언덕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의 자연적 여건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나마 이런 곳도 비행장 조성을 위해
깎아내서 형체가 남아있는 데는 없다. |
오곡동(五谷洞)은 지금의 김포공항 자리에 옛날에는 골짜기 5개가 있었으므로 이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
오쇠동은 옛날 이곳에 弩(쇠노)를 만들던 사람 다섯명이 도망와 숨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동명이다. 조선 영조(英祖) 때에는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의 오쇠리였는데
1895년 부평군(富平郡)으로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던 것이다.1896년 부평군 주화관면(注火串面) 오쇠리(五釗里)가 되었다.
1914년 부천군(富川郡)을 신설하면서 오정면(吾丁面)의 오쇠리가
되었다. 1963년 부천군 오정면 오쇠리는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오쇠동이
되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 설치하였던 양서출장소 관할의 오쇠동은 신설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안오쇠와 밖오쇠는 오쇠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안오쇠는 다시
아랫말과 웃말로 나누어져 있다. 밭 한가운데 옻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그 중 마을
바깥 쪽으로 있는 옻나무의 독성이 더 강해 이 옻나무 곁을 스쳐가기만 해도 옻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안쪽에 있는 옻나무는 이보다 옻의 성질이 약하고 또 옻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먼저 타므로 밖에 있는 옻나무에서 옻이 먼저 오른다는
뜻의 밖오시라 했다고 전한다. |
방화(傍花)라는 지명은 개화산(開花山)의 옆에 있으므로 얻어진 것이다. 6호 국도와 48호 국도의 교차점이
된다. 북쪽에 한강이 있고, 연안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으며 한강 건너로 행주산성과 대하고 행주도(幸州渡)가 있었다. |
개화동(開花洞)의 동명은 이 동의 면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높이 13.2m의 개화산(開花山)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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