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구(九老區)

구로구 홈페이지 http://www1.guro.go.kr/

 

가리봉동(加里峰洞)
신도림동(新道林洞)
오류동(梧柳洞)
온수동(溫水洞)
구로동(九老洞)
고척동(高尺洞)
개봉동(開峰洞)
천왕동(天旺洞)
항동(航洞)
궁동(宮洞)

가리봉동(加里峰洞)

  加里峰洞의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주위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하나의 동명 연원은 골(谷), 즉 고을과 같은 의미를 갖는 「갈」또는 「가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에서 유래한다는 『한국지명총람』의 곤계자 유중달의 표현이 아니라 해도 구로구의 전체 땅 모양새가 바지가랭이처럼 갈라졌고, 또한 이곳에서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가 갈라지는 곳임을 감안하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동명 유래라 하겠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東面에 속해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의 加와 독산동의 山자를 따서 가산동이라 명명하였다가 1975년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분리되었다. 1980년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가리봉동은 구로구에 소속된다.
  大村은 전의 가리봉 2里에 있던 마을로 가리봉동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현재는 가리봉 1동에 해당된다. 원래 村은 우리말로 풀이할 때 「배미」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배미는 沓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배미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대는 크다는 의미를 지니며 같은 의미로 우리말의 「한」과 통용된다. 따라서 대촌은 큰논배미 또는 한논배미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신도림동(新道林洞)

  新道林洞 동명의 유래는 道林洞에서 새로 갈라져 나왔으므로 불리어진 것이다. 도림동 동명의 유래는 두가지로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 하나는 山形局이 마을 뒤로 城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國道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道也味里가 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道林里 일대 들판에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니, 특히 길 옆에 삿자리의 일종인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도림동은 본래 朝鮮時代에는 경기도 시흥군 上北面에 속해 있었는데 1895년 仁川府 12郡 중의 시흥군에 속하였다. 일제때인 1914년 시흥군 북면 도림리라 제정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곧 이어 신도림동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80년 신도림동을 구로구의 관할하에 있게 하였다.   신도림동 지역은 朝鮮時代 자연부락 명칭으로 上遠芝牧, 下遠芝牧(宋遠芝牧), 아랫말, 웃말, 遠芝牧里 등이 있다.
  원지목리는 옛날 도림천 근처에서 소와 말을 길렀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이에 따라 도림천을 마장천이라고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遠芝牧里의 위쪽에 있는 마을을 上遠芝牧里 또는 웃말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下遠芝牧里 또는 아랫말이라고 하였으며, 宋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으므로 宋遠芝牧里라고도 하였다.
  신도림동의 서쪽을 흐르는 安養川은 일명 葛川(갈천)이라고도 칭하고, 양평동 근처에서는 내의 모양이 오목하다 하여 오목내라고 불러, 오목교라는 다리이름도 있다.



오류동(梧柳洞)

  梧柳洞의 동명은 예부터 오류동 123번지 일대와 그 서쪽에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오류꿀(梧柳洞)이라고 불리었던 데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高麗때 樹州로 오랫동안 호칭되었고 朝鮮 太宗 13년(1713)에는 경기도 부평군호부에 속해 있었다. 갑오경장(1894)때에는 인천부 부평군에 속하였다. 1941년 오류동은 경기도 富川郡 素砂邑 오류리가 되었다. 1963년에 오류동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구로구를 신설함에 따라 오류동은 구로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류동 지역에는 자연부락 명칭으로 버들이, 보롱메, 엉굴, 오류꿀, 주막거리, 텃골 등이 있었다. 오류꿀은 예부터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았으므로 불리어진 마을이름으로 현재 오류동의 명칭이 되었다. 버들이는 현 오류역 앞 마을로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마을이름인데 경인선이 개통된 후 오류역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어둡고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불리어진 엉굴은 오류동의 가장 오래된 마을로 오류역 뒤쪽에 있다.
  1975년 10월 이전까지만 해도 梧柳洞 또는 오류골은 현재 오류동 외에 천왕동, 궁동, 온수동, 항동 일대를 지칭했는데 이 곳의 명물은 참외였다. 오류골 참외는 껍질의 빛깔이 진할수록 더욱 단맛이 있어 조선시대에는 궁중의 진상품이었다. 때문에 그 후에도 부천(素砂)의 복숭아, 시흥의 수박, 성환의 배와 함께 오류골 참외는 서울 長安에서 가장 인기있는 과일로 손꼽혔다.



온수동(溫水洞)

  溫水洞의 동명은 옛날 이 지역 일대에서 더운물이 나왔기 때문에 온수골이라 하였다가 溫水洞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더운 물이 나왔다는 곳은 온수동 가운데에서도 온수골(옷수골)인데 지금의 한국콘베어공업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쳐 있는 곳으로 북쪽은 富川市 如月洞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남쪽이고, 남쪽은 전철역 온수역 앞 세풍운수주식회사 버스 종점 앞거리이다.
  世宗實錄 卷83 世宗 20년 11월 8일조에 보면 부평도호부를 현으로 강등했는데, 임금께서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조정의 신하를 여러 차례 보내어 찾아 보라고 했던 바, 그 곳 아전과 백성이 숨기고 말을 아니하므로 도호부를 폐하고 縣으로 강등했다.
는 기록으로 보아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世宗이 온양온천욕 이후 큰 효험을 보고 있던 중 이 지역에 온천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탐색을 명했지만 발견하지 못한 채, 富平府使를 문책하고 都護府까지도 강등시킨 것이다.
  온천수가 나왔다는 지역은 현재 초운교회에서 복지회관 일대를 지칭하는 온수골에 해당하는데 지금의 주민들에게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곧 이 지역에서 나온 온천수로 인해 온천욕을 하기 위해 몰려든 수 많은 피부병환자들은 주민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흘러넘친 溫水는 논에 극심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온천수의 맥을 흙과 돌로 막고 나라에 물구멍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부평도호부에 속해있다가 갑오개혁 이듬해 인천부 부평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에는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온수리가 되었다가 1914년 부천군 계남면 온수리가 되었다. 1931년 부천군 계남면을 소사면으로 고치면서 이에 속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구로구를 신설하면서 구로구의 소속이 되었다.



구로동(九老洞)

  九老洞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노인 아홉 사람이 오랫동안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에 편입되어 있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영등포구에 소속되었다.
1980년 영등포구가 구로구로 분할됨에 따라 구로동은 구로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루지마을은 下九老里로 구로동 가운데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원래 구로리는 上, 中, 下의 3개 마을로 형성되었으며 구로동 가운데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구루지마을이다. 지금의 구로5동으로 구로구청이 있는 일대가 구루지 마을이고 중심지는 구청 뒤 보광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구로5동의 너머에는 큰 상나무가 있으므로 이 이름을 따서 상나무재라고 하였다. 이 상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의 역할도 함께 하여 마을 사람들이 상나무재를 넘을 때면 반드시 이 나무 아래에서 절을 하고 지났다고 한다. 지금은 상나무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구로5동 새마을금고가 있는 곳이 상나무가 있던 자리이다.



고척동(高尺洞)

  고척동(高尺洞)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하나는 이 동네의 한 자연마을인 高座里 즉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동네는 경기도 부천, 안양, 강화 사람들이 서울 지역 사람들과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생필품 및 농산물을 교환하여 오던 곳으로서 당시 계량기가 없어 교환 측정기준이 곤란하자 긴 자(高尺)로 재서 서로 교환 측정하던 것을 고척 이라 칭함으로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富平郡 수탄면(水呑面) 고척리(高尺里)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3월 1일 부천군(富川郡) 계남면(桂南面) 고척리(高尺里)라 하였다. 1941년 10월 1일에는 부천군 소사읍(素砂邑) 고척리라 개칭하였다. 고척동은 그 후 1963년1월 1일에 부천군 소사읍에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고척동 지역의 자연부락 및 산, 고개 등의 명칭으로는 고잘(고좌리), 능꿀, 德義里(덩어리), 三工區社宅, 연화사택, 장터꿀, 가녈봉, 단혈고개 등이 전해온다.
   고척동의 동명이 되었다는 고좌리 또는 고잘마을은 높은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졌다. 고잘은 고척동의 옛마을 이름으로서 현재 고척1동 고척초등학교 부근 일대를 일컬었는데 고척동 전체 지형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다. 얼마전까지도 안양천 변의 방죽 명칭을 고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德義里 또는 덩어리는 현재 고척 2동사무소와 덕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마을로 고척동 가운데 역사가 제일 깊다.
   가는골 또는 細谷은 좁고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 졌는데 가녈봉 남서쪽의 세곡초등학교 부근 일대에 있었다. 그리고 능꿀마을은 고려시대에 이곳이 능터를 잡으려고 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고척동 233번지 일대의 계곡이며 전에는 능꿀로 넘어가는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덕의초등학교 앞, 고척동 168번지 일대에는 일제 때 일본인 고바야시(小林)의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지은 三工區社宅이 있었다. 고바야시는 지금의 영등포교도소와 구치소 자리에 군수공장을 짓고 이곳에 사택을 지었다고 한다. 고바야시는 고척동의 토지를 거의 다 빼앗고 오갈데 없어진 이곳 사람들이 그의 공장에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 동에는 예전에 바위가 울었다 하여 우렁바위 또는 명암이라고도 하고 길마바위라고도 하는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양천군 목동과의 경계지점에 바위 모습이 마치 감투나 사모처럼 생겨 감투바위 혹은 사모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말안장처럼 생겨 안장바위라고도 하고 의자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도 있었다.



개봉동(開峰洞)

  개봉동(開峰洞)의 동명은 현재 경인선과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에 있었던 개웅(開雄)마을의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서 유래한다.
  이 동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대한주택공사에서 개봉천 북쪽 저지대에 택지를 조성하여 분양했으므로 신시가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부평군(富平郡) 수탄면(水呑面) 개봉리(開峰里)라 하다가, 1914년 3월 1일 부천군(富川郡) 계남면(桂南面) 개봉리(開峰里)로 하였다.
  1941년 10월 1일 소사읍(素砂邑)으로 이관되어 부천군 소사읍 개봉리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에 속하였다.
1973년 7월 1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일부를 영등포구 개봉동에 편입하였고 개봉동의 일부를 시흥군에 편입하였다.
1980년 4월 1일 구로구를 신설하면서 개봉동은 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개봉동 지역에는 자연부락 명칭으로 가린열, 개웅(開雄),덕고개, 부누꿀, 잣절(栢寺里), 천신(天神) 등이 있다.
   가린열은 고척동과 경계가 되는 갈탄봉(葛灘峰 일명 가녈봉)의 음이 변하여 된 이름인 듯하다. 개봉동의 중앙에 위치한 가린열은 칡넝쿨 모양으로 생겼으며, 갈탄봉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곳의 물이 합수되던 여울목 근처를 말한다. 가린열은 갈탄 혹은 광주물이라고도 하는데 ‘갈라지는 내’라는 뜻이 되기도 하고 이 물은 광주리에 담는다는 뜻에서 ‘광주물’이라고도 하였다.
  개봉동과 오류동과의 경계가 되는 경인로에는 덕고개가 있어서 이 부근의 마을을 덕고개마을로 불렀고, 가린열의 북쪽에는 부누꿀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잣절인 백사리(栢寺里)는 잣나무가 많고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인데 오류초등학교 뒷산 너머 남부순환로변에 있었으며 현재 이 일대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자연부락명으로는 개봉동의 동명이 된 개웅(開雄)마을이 있다 개웅마을은 개웅산의 이름을 따서 불려진 마을로서 경인선 철도와 남부 순환로가 교차하는 남쪽부근과 개봉동 247번지 일대에 있었다. 오류동과 인접한 이 마을은 지형이 움푹 들어간 관계로 난리 때마다 총탄이 개웃개웃 피해가서 개웅마을이라고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개봉동에는 개웅산 외에도 두루미산 또는 두름산이 있는데 이 산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어느 해에 큰 장마가 졌는데 어디선가 조그맣고 동그란 산이 물살에 떠내려와 논 한 가운데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에 백로가 날아와 서식했기 때문에 두루미산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루미산은 이 동과 양천구 신월동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70여 년 전까지 흑연광이 있었다.
  이 동과 광명시를 구획하고 있는 개봉천은 안양천의 지류로서 일명 개웅개울 또는 목감천이라고 칭한다. 개봉동 271-19번지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서울특별시 소유로 구로구에서 지정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떠내려와 논 한 가운데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에 백로가 날아와 서식했기 때문에 두루미산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루미산은 이 동과 양천구 신월동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데 70여 년 전까지 흑연광이 있었다.
  이 동과 광명시를 구획하고 있는 개봉천은 안양천의 지류로서 일명 개웅개울 또는 목감천이라고 칭한다.
  개봉동 271-19번지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서울특별시 소유로 구로구에서 지정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천왕동(天旺洞)

  동네 뒷산이 굴봉산이고, 굴봉산 골짜기에 천왕사(天旺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 아랫마을이란 뜻의 ‘천왕골’ 혹은 천왕리(天旺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천왕동(天旺洞)은 1963년 1월 1일자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경기도 부천 땅이었다. 경기도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딸렸던 천왕동은 인천부(仁川府) 12개군 가운데 부평군에 소속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평군의 행정구역은 부천군(富川郡)으로 개편되었으며 천왕동 일대는 부천군 계남면(桂南面)에 속하게 되었다.
  1931년 4월 1일 천왕동은 부천군 소사면에 딸린 동리가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소사면이 소사읍으로 승격함에 다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素砂邑) 천왕리(天旺里)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천왕동은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고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신설됨에 따라 서울특별시 구로구 천왕동(天旺洞)으로 되었다.

  굴봉 : 천왕동 웃말의 뒤쪽에 있는 봉우리. 항동과의 사이에 있는 삼각산의 북쪽봉우리로서 높이 142.5m이며, 동쪽으로 이어진 105m의 봉우리가 있다.
  너부대내 : 경기도 광명시와 이 마을의 경계선을 이루며 흐르는 개울로서 광명시로 흘러들어 가는 개울인데 한자로 표기하면 廣火大라고 하는데 순수한 우리말이름이다.
  도당굴 : 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던 단으로서 서낭당과 비슷한 곳이었는데 아랫말 곧 행촌에서 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다.
  뒷골 : 천왕굴 웃말 뒤쪽의 골짜기. 이 골짜기에 천왕저수지가 있다.
  숫돌고개 : 천왕굴고개를 넘어 천왕굴로 들어서기 전의 등성에 있는 고개. 숫돌을 캐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다.
  염주봉(연지봉) : 천왕굴의 굴봉 동쪽에 있는 산. 천왕동, 오류동, 개봉동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서 높이 125m. 고개의 뜻인 재에 ‘비’를 붙여 ‘연지재비’라 하였던 것을 다시 ‘연지제비’로 바꾸었다. 한자로 ‘燕字(연자)’로 쓰고 읽기는 연지라 하던 것이 염주로까지 변했을 것 같다. ‘재비’는 고개나 산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항동(航洞)

  항동(航洞)은 풍수지리학적인 면으로 살펴볼 때 마을의 형태가 배 모양이 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마을 이름에 ‘航’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은 옛 부평의 땅에 두 곳이 있을 뿐인데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素砂洞)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곳은 구로구의 항동(航洞)이고, 서쪽에 있는 곳은 인천시 북구 부개동(富開洞)에 딸린 마을인 항동(航洞)이 있다. 이 중 인천의 항동은 이곳이 부평군 군내면(郡內面)의 관할이 될 때까지는 항동(航洞)이었다가 후일 일신동(日新洞)의 한 마을인 항동(港洞)으로 바뀌었으며 그 후 부개동의 자연부락명으로 된 것이다. 때문에 ‘航’字가 들어 있는 마을은 이곳 구로구의 항동 하나만 남게 된 것인데 옛날 이곳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을 때 배가 이 마을에 닿았으므로 航洞이라 했다는 전설적인 해석도 있다. 천왕동의 너부대내와 소래쪽의 바닷물이 낮은 곳은 해발 10m 안팎 정도가 되는 이 마을로 유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전설도 부정할 수는 없다.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부평도호부의 항동이었다가 1895년 전국을 23府 337郡으로 개편할 때 인천부 부평군 옥산면(玉山面)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천군 계남면의 항리(航里)가 되었다가 1931년 4월 1일 계남면이 소사면(素砂面)으로 바뀌자 항동은 이 면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소사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항리로 된 후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신설되어 구로구 항동으로 되었다.
  항동 마을뒤 부천시(富川市) 쪽을 향한 골짜기에는 매우 오래 묵은 전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航마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은 이 전나무가 풍수지리적으로 배의 형국을 한 航洞의 돛대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마을에는 우물을 팔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배 바닥에 구멍을 내면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침몰하기 때문에 함부로 우물을 파지 못했으나 집집마다 상수도가 가설된 지금은 전나무 마저 고사하여 없어졌다.
  항동을 항골이라고도 하는데 ‘한골’이 변하여 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골’의 ‘한’은 하나, 으뜸, 큰, 많은, 거룩한, 높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큰 고을 즉 큰 동네라는 뜻으로 설명될 수도 있겠고 먼저 생긴 동네로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도 되겠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남북 방향으로 높이 100m 남짓한 봉우리가 셋이 나란히 서있다. 이 봉우리를 합하여 삼각산이라 하는데 제일 북쪽의 높이 102m의 봉우리는 항동 쪽에서는 이름이 없으나 천왕동에서는 굴봉이라 한다. 굴봉의 천왕동 쪽에는 도당골이 있으며 항동에서는 산제를 지낼 때 神木으로 삼았던 전나무가 서있던 골짜기가 된다.
  마을의 남쪽에는 건지산이 있는데 표고 134m로 동서방향으로 산등성이가 형성되어 있다. 부천시와 경계가 되는 이 산의 서남쪽에는 몰미산이 ‘ㄷ’자 모양으로 뻗어있다. 몰미산은 높이 59m의 봉우리와 남쪽의 높이 68m의 봉우리가 서로 붙어 있으며 동쪽에는 82m 높이의 봉우리가 연접하고 있다. 몰미산의 세 봉우리가 이처럼 ‘ㄷ’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臥牛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는 54m 높이의 뒷매봉이 삼각산의 굴봉과 맞닿아 서쪽으로 뻗쳐서 오류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뒷매봉의 서쪽 능선에서는 옛날 항아리를 만들던 곳이 있어 ‘독쟁이’라 하였고 이 고개를 넘어 항동으로 들어올수 있기 때문에 독쟁이고개라 하였다.
  와우산 아래에는 일제 때 노량진 철길 주변을 정리할 때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모여와 집단으로 부락을 만들어 살았기 때문에 철거민촌이라고 한다. 이 대 마을 입구에 있는 성공회에서 많은 지원을 하여 이들 철거민들이 정착, 야산과 잡초로 이루어진 들판을 개척했기 때문에 개척지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항동에 남아있는 자연부락명은 다음과 같다.
  망골 : 개척지마을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개척하기가 힘이 들었든지 여기서 살면 망하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낭당고개 : 항동에서 삼각산과 건지산 사이의 봉우리를 향하여 넘어 천왕동으로 가는 고개. 이 고개에 서낭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웃당골이라고도 부른다.
  앞내깔 : 농사시험장 저수지에서 천왕동 앞으로 흘러 옥련동으로 나가는 내. 이 내의 양쪽에 논이 있어 앞내깔들이라고 부른다.
  논이 많고 비교적 높이가 낮은 산들로 이어진 항동은 일찍부터 농사가 발달 하였다. 일찍부터 참외, 수박, 포도, 복숭아 등 특산물이 많았던 항동에 농사시험장이 생기면서 그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일년감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토마토는 항동의 특산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이었고 이 토마토는 궁중에까지 진상되었다.



궁동(宮洞)

  궁동(宮洞)의 유래는 조선 선조의 일곱째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이곳에 살던 길성군 권대임(吉城君 權大任)에게 출가하여 궁궐같은 큰 집에서 살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 궁리(宮里)였던 것이 1914년 3월 1일 부평군과 인천을 합쳐 만든 부천군(富川郡) 계남면(桂南面)에 속하게 되었다. 1931년 4월 1일 부천군 계남면은 소사면(素砂面)으로 바뀌었고, 1941년 1월 1일 부천군 소사읍으로 승격되면서 궁리는 소사읍의 소속이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소사읍의 궁리는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궁동은 구로구에 편입되었다.
   궁골이라는 동명의 유래는 선원계보(璿源系譜)에 따르면 선조의 7女인 정선옹주가 경기도 부평부에 속해 있던 이곳 안동권씨 대임(大任)에게 시집을 오게 되자 선조가 이 일대를 정선옹주에게 사패(賜牌)땅으로 내려주면서 비롯되었다. 나라에 공로가 있는 왕족이나 벼슬아치에게 내려준 논과 밭을 사패땅이라고 불렀다.
  정선옹주가 시집을 간 안동권씨 집안은 당시의 당당한 세도가로 대임은 안동권씨라는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에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칭호를 받고 예조판서를 지낸 충정공 협의 손자이며 부인 또한 임금의 딸이라 그들이 사는 집은 크고 으리으리하여 여느 사람들의 집이 아니라 고대광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집이 가히 궁궐 못지 않았음인지 궁궐 같은 집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궁마을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이 커서라기 보다는 왕족이 살던 집이라는 뜻에서 '궁'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으로 보여진다.

  궁동의 자연부락명은 다음과 같다.
  갈골 : 옛날 갈대가 많이 났다는 골짜기
  댓골고개 : 궁동에서 동북쪽 양천구 신정3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댓골은 죽동(竹洞)이라고도 하지만, 대나무는 없고, 큰골→大洞→댓골→竹洞으로 변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동이점골 : 옛날에 좋은 흙이 나서 동이(항아리)를 구웠다 한다.
  뱀일 : 권씨 문중묘 서쪽 일대. 골짜기가 뱀처럼 길다고 하는데 뱀이 많이 살았다고도 볼 수있다. '일'은 마을이라는 뜻의 말조각이다.
  삭새고개 : 온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마처럼 갑자기 꼬부라졌다고 길마산고개라고도 한다.
  성짓골 : 궁동 어귀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북쪽 양천구 신월4동으로 통하는 길인 궁동길과 절터 서북쪽 부천시 여월동으로 넘어가는 길인 수렁고개길과 갈라지는 골짜기.
  수렁고개 : 성짓골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부천시 여월동(如月洞)으로 넘어가는 고개. 그 동남쪽 기슭 골짜기에 절터가 잇다. 수룬고개라고도 한다.
  큰개울 : 여러 골짜기 물이 한데 모여 흐르는 개울
  풀뭇간 : 옛날에 풀뭇간이 있었다는 들. 궁동에서는 좋은 흙이 나기 때문에 동이를 구웠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