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구(衿川區)

 

금천구 홈페이지 http://www.kumchon.seoul.kr/

  

독산동(禿山洞)
가산동(加山洞)
시흥동(始興洞)



독산동(禿山洞)

  독산동의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의 산봉우리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姜曦의 호가 禿山이었는데 「어느 사람이 마을 이름을 따서 禿山이라고 호를 붙였는가 아니면 딴 뜻이 있었는가」하고 물었다. 강희가 대답하기를 「내 집 뒤에 산이있는데 벌거숭이 山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고 한다. 원래는 나무가 있었는데 漢城郊外에 있은 까닭에 도끼로 찍히고 소, 염소 따위에게 먹힘을 당하여 벌거숭이가 되었다.」
고 한 것으로 보면 조선시대 중기 이전부터 독산이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東面에 속한 禿山里였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이 되면서 종전의 시흥군 동면의 독산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동시에 관악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독산동은 영등포구의 관악출장소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가리봉리와 합쳐 加山洞으로 명명되었다. 1968년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로 편입되었고 동명도 전의 독산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1980년 구로구가 신설됨에 따라 종전의 영등포 관할구역에 있던 독산동이 구로구의 관할로 들어오게 되었다.



가산동(加山洞)

   인근의 加里峰洞의 ‘加’ 자와 독산동(禿山洞)의 ‘山’ 자를 따서 명명한 이름.
조선시대 : 京畿 始興郡 東面 加里山里

1895 : 仁川府 始興郡 東面 加里峰里
1896 : 京畿道 始興郡 東面 加里峰里
1963 : 永登浦區 加里峰洞
1980 : 九老區 加里峰洞
1995 : 衿川區 加山洞



시흥동(始興洞)

  시흥동(始興洞) 동명의 유래는 글자 그대로 '일어난다, 뻗어간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조선 正祖 19년(1795) 윤 2월 1일 금천현(衿川縣)의 행정지명을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하면서부터 불리어지기 시작한 이름이다.
  시흥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고구려 때 잉벌노(仍伐奴)였던 것이 통일신라 때는 곡양(穀壤)으로 되었으며, 고려 때 금주(衿州)라 하던 것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천(衿川)이라 하였다. 정조 때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한 후 1895년 5월 26일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의 통폐합조치로 시흥군 군내면(郡內面) 군내동(郡內洞)이었던 것을 시흥군 동면(東面) 시흥리(始興里)로 하였다.
  1949년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 도림리, 신대방리는 서울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으며 시흥리,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는 그대로 두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영등포구 관악출장소 관할 아래 두었다가 1968년 1월 1일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시흥동은 영등포구의 직할로 되었으며 1979년 영등포구로부터 구로구가 신설됨에 따라 시흥동은 구로구에 소속되었다. 1995년 금천구를 신설하면서 시흥동은 금천구에 속하게 되었다.

  관악구의 줄기인 삼성산(三聖山)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시흥동의 조선시대 자연부락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돌팍재는 돌이 많아 인근에서 집을 지을 때 이곳의 돌을 파냈으므로 해서 생겨난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상 삼성산은 해발 455.8m의 산이지만 관악산의 형세가 그러하듯 바위산이다. 때문에 호암(虎岩)이라든지 하는 동물모양의 암석을 비롯, 나무보다는 바위가 더 많고 이 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고개이므로 돌팍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삼성산은 고려 말엽 불교계를 이끌던 지공(指空;?~1363), 무학(無學;1327~1405), 나옹(懶翁;1320~1376)의 세 고승이 이 곳 산에 올라 각기 수도할 자리를 잡고 정진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둠배꿀은 삼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의 하나로 동구 밖에 있다 하여 '동구밖 골'이라 하였는데 점차 동밖골→동박골→둠배꿀로 음이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독산동에서 말뫼(斗山)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뫼고개라 하는데 이는 말머리 모양으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말머리(馬頭)산이 말산(馬山)이 되고 다시 말(馬)과 음이 같은 말(斗)로 바뀌어 斗山 또는 말뫼라는 이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도살장이 있던 곳을 부장촌이라 하는데 시흥동에 유난히 많은 짐승이름의 고개라든지 바위가 있는 것은 도살장이 있었기 때문에 여겨진다. 지리적으로도 시흥에 행궁(行宮)이 있었고 정조가 행차하면 한양에서부터 육류의 운반이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에 행궁에서 소요할 육류의 도축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흥4동 지역을 새재미라 한다. 시흥역 주변을 빌소라 하였으며, 현 탑동초등학교가 있는 시흥2동 지역에는 탑이 세워져 있던 동네라 하여 탑곡(塔谷) 혹은 탑골이라 하였고 탑골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탑시굴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현 841번지 일대인 시흥초등학교 주변은 송노골이라 하였다. 또 시흥5동 일대를 읍내라고 불렀는데 현재도 토착인은 옛날의 전래동명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관악산의 여맥이 이 마을 전역에 미치어 그런지 마을 뒤 黔(衿)芝山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있어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바위에 재미있는 애칭을 붙여 놓았다.
  삼성산의 형상이 호랑이 모양을 닮았기 때문에 호암산(虎岩山)이란 異名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흥2동 새봄교회 바로 앞에 위치한 칼바위는 바위가 칼처럼 뾰쪽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쟁기바위, 보습바위라고도 한다. 마치 칼자루를 옆으로 뉘어 놓은 듯한 이 바위는 임진왜란 때 일본 장사와 우리나라 장사가 턱걸이내기를 하던 중 일본장사가 99번을 하고 백번째 매달리는 순간 바위 밑으로 떨어지면서 바위의 뾰쪽한 끝이 쪼개어져 나갔다고 한다. 이 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겉으로 보기에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나 속은 매우 넓어서 장정 스물 대여섯 명이 능히 앉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인근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여름철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또 이 칼바위의 틈새는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사람들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까이는 6.25동란 때에도 이곳에 숨어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 장사가 오줌을 누자 오줌줄기 때문에 바위 한가운데가 패여 나갔다는 팽이바위와 한우물에서 곧바로 능선을 따라가면 각시가 앉아 있는 형상을 한 각시바위도 있다. 각시바위는 현재 과천을 행해 돌아앉아 있는데 과거에는 시흥을 향해 있었지만 어느 아낙네가 과거보러 간 낭군이 금의환향하길 학수고대하며 과천 쪽으로 돌아앉는 바람에 과천만 발전하고 시흥은 뒤쳐졌다고 한다.
  검지산(黔芝山) 정상에는 호랑이가 걸터앉아 잇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호암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이 바위의 북쪽에 돌사자를 묻고 바위의 남쪽에는 石犬(돌로 만든 개)4마리를 묻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 호랑이로 하여금 북쪽을 두려워하고 남쪽의 개는 불쌍히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시흥군읍지,1899년)

  시흥2동에는 행궁지가 남아있다.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양주 배봉산(拜峰山)아래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華山)으로 천봉(遷奉)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는 동시에 수시로 능행을 하였다. 능행길은 동작동을 거쳐 과천으로 가는 것이 정로였으나 그 길 가운데는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동한 김약로(金若魯) 형의 무덤이 있어 정조는 금천, 안양으로 노정을 바꾸었다. 왕 19년(1795)에는 안양의 토교(土橋)였던 만안교(萬安橋)를 돌다리로 바꾸고 왕의 능행을 위해 이 곳에 행궁을 지었다. 이 행궁은 옛 관청자리였다고 하며 행궁의 규모는 114間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조가 융릉(隆陵)으로 참배할 때마다 이 행궁에 들렀으며 이 때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다.

  이곳 266번지 일대는 수도경찰청장, 초대외무부장관과 1952년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청랑 장택상(滄浪 張澤相)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의 별장은 흔적조차 없고 인근의 상점들에 인용된 '별장수퍼마켓' '별장약국'등에서 이 지역일대가 별장이었음을 겨우 확인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시흥동 산 93-2번지에 서울특별시지방문화재 제10호인 天井(한우물,龍湫)이 있다. 예부터 관악산 봉우리의 큰우물이라는 뜻으로 불리었던 이 천정은 길이 22m, 폭12m의 작은 연못 규모의 우물로 가뭄때에는 기우제를 지냈으며 전시에는 군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호압산(虎壓山)에 옛성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비 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군용에 대비했다는 것은 옛 성이 이곳에 있었는데 석축둘레가 1,681尺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성중에 수비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유사시에는 다수의 군인이 합군 했을 것으로 추측되어 음료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예측된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선거이(宣居怡) 부대가 진을 쳤던 자리가 이 부근이므로 군인의 음료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마을 뒷산에 호압사(虎壓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세운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개창하고 궁궐을 세울 때 전국의 목수와 많은 역군을 동원하였으나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지붕에 흙을 덮었으나 밤만 되면 비가 내려 곧 바로 무너져 다음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에 태조가 몸소 거동하여 일을 독촉하였지만 여전히 일의 진행은 잘 되지 않았다. 태조가 몹시 초조해 하던 차에 어느날 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는데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이 괴물은 눈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대궐 가까이까지 와서 건물을 들이받으려는 자세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 대 태조는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그와 동시에 화살이 빗발처럼 괴물에게 쏟아졌으나 괴물은 화살에 아랑곳없이 궁궐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태조가 직접 활에 화살을 메워 쏘려고 할 때 궁궐은 무너지고 괴물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태조는 침통한 모습으로 궁궐로 돌아와 침실에 들었을 때 어디에서인지
"한양은 비할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
라고 하는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태조는 의아해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건 아실 것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장군께서 심려하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까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고 하였다.
태조는 무슨 묘안이 있는가고 공손히 물었다. 그 노인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한강 남쪽 산봉우리를 보라고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호랑이다! 저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다"
하고 태조는 노인에게 저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이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虎壓寺)라고 명명하였다.

  시흥의 詩,書,畵 3絶로 유명한 사람은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1418~1464)과 자하 신위(紫霞 申緯)라고 한다. 인재의 詩思와 畵趣는 왕유(王維)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그 아우인 사숙재 강희맹(私叔齋 姜希孟)이 평한 바 있다. 특히 인재의 글씨는 진체와 송설체에 능했으며 그림 가운데 '고사관수도'는 남송의 원체화풍을 발전시킨 명대 절맥화풍을 반영한 것으로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또 인재의 아우 강희맹(1424~1483)도 시흥의 농업 전반을 기술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