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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大林洞) |
대림동(大林洞) 동명의 유래는 1949년 8월 행정동명을 신대방동과 신도림동을 합하여 대림동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즉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이라 명명한 것이다. |
도림동(道林洞)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구전되어 내려 오고 있다.
그 하나는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國道)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도림리(道林里)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문래동(文來洞) 동명의 유래는 일제때 종연(鍾淵), 동양등 군소방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 의하여 사옥동(絲屋洞)이라 불리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文來洞)이라고 지었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 등이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의 설을 주장하는 주민들이 많다. |
양화동(楊花洞) 동명의 유래는 지금의 양화대교 하류쪽의 김포공항으로 가는 양화교 근처에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을 건너던 나룻터인 양화도(楊花渡)가 있었음으로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양화도」의「양화(楊花)」란 명칭이 붙게된 것은 옛날부터 양화도 부근 일대에 버드나무가 많아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였기 때문이었다. |
양평동(楊坪洞) 동명의 유래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漢江渡江)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이다. 즉 양화진의 「楊」字와 벌「坪」字를 따서 양평동(楊坪洞)이 된 것이다. |
영등포동(永登浦洞)은 지금 영등포구의 구명칭(區名稱)이 있게된 동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의 영등포리(永登浦里)였는데 일제 때인 1911년에 시흥군청을 이곳으로
옮긴 후 북면에서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나누어 영등포면으로 하였다. |
여의도(汝矣島)의 지명은 지금부터 450여년 전 중중(中宗)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보이는데 거기에는「잉화도(仍火島)」로 되어 있다. |
당산동(堂山洞) 동명은 이 마을 언덕(山)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였는데 이 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하였고 또 동제당(洞祭堂)이 있어 당산(堂山)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하간 이 마을에
당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다. |
신길동(新吉洞) 동명의 유래는 문헌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1914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경기도의
관할구역으로 편입될 때부터 신길동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신길리(新吉里)라 하여 그 관할구역을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 신길리(新吉里)·상방하관리(上方下串里)라 한 것을 보면 옛날부터, 즉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졌던 우리 고유의 동리명이 아닌가 한다. 즉「신길」이란 새로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같으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후 신길리는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3년 경성부
영등포구역소의 관할하에 있다가 1946년 실길정은 신길동으로 명칭이 바뀌어졌고 영등포구역소가 영등포구로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관할하에 들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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