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永登浦區)

영등포구 홈페이지 http://gu.yongdungpo.seoul.kr/

 

대림동(大林洞)
도림동(道林洞)
문래동(文來洞)
양화동(楊花洞)
양평동(楊坪洞)
영등포동(永登浦洞)
여의도동(汝矣島洞)
당산동(堂山洞)
신길동(新吉洞)



대림동(大林洞)

  대림동(大林洞) 동명의 유래는 1949년 8월 행정동명을 신대방동과 신도림동을 합하여 대림동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즉 신대방동의 「대」자와 신도림동의 「림」자를 따서 대림동이라 명명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상북중(上北中)에 속해 있다가 1936년 4월 지금의 대림동지역은 서울시에의 편입에서 제외되어 시흥군 동면 도림리로 남아 있었다.1949년 8월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이 있을 때 서울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곧이어 행정동명을 대림동이라 바꾸었다.



도림동(道林洞)

  도림동(道林洞) 동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구전되어 내려 오고 있다. 그 하나는 산형국(山形局)이 마을 뒤로 성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데 이 마을이 국도(國道)에서 돌아앉아 있다고 해서 도야미리(道也味里)가 도림(道林)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도림리(道林里) 일대의 들판이 억새풀 종류의 새나무가 많았으며, 특히 길 옆에 삿자리 일종의 풀이 숲을 이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다가 1936년 2월 경성부(京城府)의 구역을 확장하면서 경성부에 편입되었고 1943년 6월 도림동은 도림서부동(道林西部洞)으로 개편되어 경성부 영등포구역소(永登浦區役所)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일제식 동명이 개정되어 도림동으로 바뀌었으며 1946년 9월 서울시 영등포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현재의 도림2동인 도림서부동만이 서울시 영등포구에 소속되었다.1949년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도림리 일부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도림동으로 불리어지게되었다.
  도림동지역의 조선시대 자연부락 명칭으로서 모랫말, 돼지마을, 주막거리, 원지막(園趾幕) 등이 있었다 한다.
  구한말에는 약 20여호 정도가 산재해 있었으나, 일제의 대륙침략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하여 문래동 등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다고 한다.



문래동(文來洞)

  문래동(文來洞) 동명의 유래는 일제때 종연(鍾淵), 동양등 군소방적공장이 들어서자 일본인들에 의하여 사옥동(絲屋洞)이라 불리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광복 후 문익점의 목화 전래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文來洞)이라고 지었다는 해석이 있고 또 일설은 학교와 관공서 등이 들어서자 글이 온다는 뜻에서 동명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의 설을 주장하는 주민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늪지대 또는 벌판으로서 인가는 거의 없었다. 이곳은 1895년 5월 시흥군에 속했으며, 1936년 2월 경성부(京城府)의 관할구역을 확장할 때 문래동은 행정구역상 도림동에 소속되어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1973년 구제도가 실시되면서 사옥정(絲屋町)으로 동명이 정해졌다.
  1946년 9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명칭을 변경시키고 1949년 도림동 일부와 영등포동 일부를 사옥동(絲屋洞)으로 하였다가, 1952년 사옥동을 문래동(文來洞)으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늪지대로서 갈대숲을 이루었는데, 1900년대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여 근처 높은 지대의 흙을 파서 늪지대를 메꾸었으며, 일제 때에는 영등포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종연(鍾淵), 동양 등 방적회사들이 들어서게 되자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양화동(楊花洞)

   양화동(楊花洞) 동명의 유래는 지금의 양화대교 하류쪽의 김포공항으로 가는 양화교 근처에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한강을 건너던 나룻터인 양화도(楊花渡)가 있었음으로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양화도」의「양화(楊花)」란 명칭이 붙게된 것은 옛날부터 양화도 부근 일대에 버드나무가 많아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 이래 이곳에 나룻터가 설치되어 양천군(陽川郡)과 강화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유서깊은 동리라 할 수 있다.
  양화동은 원래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남산면(南山面) 양화리(楊花里)라 하였고, 다시 김포군(金浦郡) 양동면(陽東面) 양화리에 이관 되었다. 1936년 양화리는 양화정(楊花町)으로 개칭되어 경성부(京城府) 영등포출장소에서 행정을 맡아 보게 되었다. 양화정은 1946년 일제식 동명이 개정되면서 양화동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영등포출장소가 서울시 영등포구로 명칭이 변경되어 영등포구 관할하에 들게 되었다.

  지금의 양화교 부근에는 도선장(渡船場)인 楊花渡(양화나루)가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어 중요한 교통로로서 이용되어 왔다. 즉, 조선시대의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해야 하는 한강에는 일찍부터 廣津(광나루), 三田渡(삼밭나루), 西氷庫津(서빙고나루), 銅雀津(동작나루), 露梁津(노들나루), 麻浦津(삼개나루), 西江津(서강나루), 楊花津(양화나루) 등이 개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룻터의 의미로는 흔히 渡와 津이 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渡, 津, 濟, 涉의 구분이 있었다. 즉 황하, 요하와 같은 큰 강을 건널 때에는 渡河라 하였고, 보다 작은 한강, 임진강, 압록강과 같은 강을 건널 때는 津江이라 하며, 한강상류의 달천(達川)과 같이 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川을 건널 때에는 濟川이라 하였다. 또한 전답 사이로 흘러가는 도랑물을 건널 때에는 涉水라고 하였. 즉 강폭의 廣狹에 따라서 그 의미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각 진도(津渡)는 교통의 매체로서 소정의 나룻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조선후기의 자료에 의하면, 양화도에는 9척의 관진선(官津船)이 배치되어 있어서 물자와 인원을 수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루터는 지금의 절두산(切頭山)이라고 하는 잠두봉(蠶頭峰) 서쪽 아래 지금의 양화대교 북쪽 지점이었고, 건너편 양화나루는 지금의 양화교가 놓여 있는 안양천이 한강으로 들어가는 어구에 있어서 한강을 건너는 나루는 「큰나루」라 하였고, 안양천을 건너는 나루는 이를「작은 나루」라 하였다. 양화나루에는 일찍이 희우정(喜雨亭), 뒷 날의 망원정(望遠亭)이 있었는가 하면 나루터 동쪽에 강물 앞으로 불룩하게 높이 솟은 잠두봉은 한강진에서 시작하는 뱃놀이를 매듭짓는 절경의 명승지였다.



양평동(楊坪洞)

  양평동(楊坪洞) 동명의 유래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어 서민들의 한강도강(漢江渡江)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양화진(楊花津)」 근처 벌판에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불리어진 것이다. 즉 양화진의 「楊」字와 벌「坪」字를 따서 양평동(楊坪洞)이 된 것이다.
  양평동은 1930년쯤 주민이 살기 시작한 동으로서 당시 일부는 경기도 시흥군 도림리(道林里), 일부는 영등포읍 당산리에 속하였다. 1936년 4월 동리(洞里)명이 일제식의 정(町)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1941년 당산町과 양평町 및 양화町을 통합하여 당산, 양평, 양화정으로 칭하고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이 고유한 우리의 동명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때 양평동으로 바뀌었다.
  양평동의 서쪽에는 안양천(安養川)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강서구와의 사이를 양화교, 안양천교, 오목교가 연결하여 주고 있다. 양평동은 안양천과 접계되어 홍수로 인한 피해가 컸으나 일제때부터 안양천의 공업용수를 이용하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건립되어 공업단지로 형성되어왔다.
  일명 굉이산, 고양이산으로 불리고 형국이 고양이같이 생겼다는 선유봉(仙遊峰)은 양평동 4가 한강변에 위치하였던 봉우리로 오랜 옛날부터 잠두봉(蠶頭峰)등과 함께 아름다운 경지를 자랑하여 많은 묵객시인(墨客詩人)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나 1962년 마포구 합정동과 연결하는 양화대교를 건설할 때 깎아 허물어 지금은 그 옛 모습을 볼 수 없다.



영등포동(永登浦洞)

  영등포동(永登浦洞)은 지금 영등포구의 구명칭(區名稱)이 있게된 동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北面)의 영등포리(永登浦里)였는데 일제 때인 1911년에 시흥군청을 이곳으로 옮긴 후 북면에서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나누어 영등포면으로 하였다.
  1936년 4월 영등포동은 서울에 편입되었고 동명이 일제식명칭인 정으로 바뀌었다고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의 정이 동으로 개정될 때 정은 다시 동으로 되어 지금에 이른다.
  지금의 영등포동은 원래 시흥군 하북면(下北面)의 하방하관리(下方下串里), 영등포리(永登浦里), 차종리(車宗里) 등의 여러마을을 합한 것이었다.
  영등포동의 지명 영등포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추측은 해 볼 수 있다. 즉, 우리 민속에는 음력으로 정월과 2월중에 「연등놀이」,「영등굿」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갯마을이던 영등포의 지명이 우리 고유민속의 「연등」,「영등」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여의도동(汝矣島洞)

  여의도(汝矣島)의 지명은 지금부터 450여년 전 중중(中宗) 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보이는데 거기에는「잉화도(仍火島)」로 되어 있다.
 그 후 330여년을 지나 고종(高宗) 원년(1864)에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권(卷)1 한성부(漢城府) 도서조(島嶼條)에는 다시 저자도(楮子島), 율도(栗島)와 함께 잉화도 대신 여의도(汝矣島)의 이름이 보인다. 이 여의도에는 또 다른 「나의주(羅衣洲)」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였다.
  여의도, 나의주의 유래는 여의도가 홍수로 인하여 휩쓸릴 때에도 제일 높은 곳인 지금 국회의사당이 자리잡은 「양말산」만은 물 속에 잠기지 않고 나타나 있어 부근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섬」,「너의섬」하고 지칭하던 데에서 얻어진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여의도의 「양말산」은 옛날부터 말이나 양을 기르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양마산(養馬山)」또는 「양마산(羊馬山)」의 의미로 그렇게 불리어 온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후기 영조시대에 와서는 여의도가 한 민간마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영조(英祖) 27년(1751)에 도성수비를 위하여 작성, 발간된 수성책자(守城冊子)인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훈련도감 우정(右停)에 속한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의 여러 동계(洞契)중 여의도계(汝矣島契)가 있음을 볼 수 있다. 1911년에 여의도는 연희면(延禧面)에 속했으며, 1914년에는 여의도는 건너편의 율도와 함께 용산면(龍山面)과 서강면(西江面)을 합한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의 여율리(汝栗里)로 개편되어 서울에서 떨어져 나갔다. 1936년에는 고양군으로 편입되었던 지역을 대부분 서울로 편입하고 동리명을 아예 일제식의 정(町)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로 되어 있던 여의도와 율도는 여의도정(汝矣島町)으로 되었다. 1943년 율도는 마포구의 율도정(栗島町)으로 되고, 남은 여의도정은 영등포구의 여의도정이 되었다. 1946년 여의도정은 여의도동(汝矣島洞)으로 되었다.
  종래 목축장(牧畜場) 또는 척박한 농지로 사용되던 여의도가 새로운 세태변동과 함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이곳에 비행장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여의도비행장은 일제 때의 경성항공사(京城航空社), 1948년 이후 KNA항공사를 거쳐 1958년 김포비행장이 국제공항이 되면서 공군기지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0년초 여의도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윤중제(輪中堤)공사가 끝난 후 제방 내 매립공사가 진척됨에 따라 1971년 2월 이 여의도비행장은 폐쇄되고 말았다. 지금부터 약 80여년 전 까지만 해도 강류는 여의도의 북측을 돌아 잔잔히 흘렀는데 1913년의 홍수로 인해 영등포방면에서 흘러오는 물이 여의도의 남북으로 갈려 흐르게 되어, 여의도는 이름 그대로 하중도(河中島)가 되었다고 한다. 광복후 국제공항으로 사용되던 여의도공항의 업무가 1958년 김포공항으로 옮겨짐과 함께 비교적 한산한 지역으로 되어있던 여의도가 1968년 서울특별시의 한강개발계획과 함께 크게 부상되었다. 먼저 여의도를 홍수의 피해로부터 구제하고 부근의 공휴지를 모두 이용하기 위해 윤중제를 쌓아서 섬을 안전지대로 만들어 그 안의 버려진 땅 85만평을 새로운 택지로 조성하기로 하였다. 윤중제는 1968년 2월 20일에 착공하여 같은해 5월 31일에 완공되었다. 새 도시건설계획도 진행되어 1968년 3월에 건축가 김수근 팀에 의하여 여의도건설 마스터플랜 제1안이 완성되었다. 여의도광장이 착공된 것은 1971년 2월이었으며 착공 7개월만에 완성되었다.



당산동(堂山洞)

  당산동(堂山洞) 동명은 이 마을 언덕(山)에 당(堂)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이 있어 단산(單山)이라고 지칭하였는데 이 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어 이를 보호하였고 또 동제당(洞祭堂)이 있어 당산(堂山)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하간 이 마을에 당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상북면(上北面)에 속해 있다가 1895년 인천부(仁川府) 12郡 가운데 시흥군에 속했다. 1936년 당산동(堂山洞)은 경성부에 편입되어 당산정(堂山町)으로 개편되었으며, 1943년 구제도(區制度)가 실시될 때 당산동은 영등포구에 소속되었다. 1946년 일제식 명칭을 우리 명칭으로 개칭할 때 당산정은 당산동으로 개칭되었다.
  당산동은 웃堂山, 元堂山, 벌堂山의 자연부락이 합쳐 형성된 동이다.
  웃당산은 은행나무재가 있는 110먼지 일대이고 원당산은 현재 4,5,6가 일대로서 옛날 당집이 있던 마을이다. 벌당산은 일명 안당산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벌판이었던 곳에 생긴 마을로 당산동의 안쪽 마을이라는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산동을  비롯한 영등포지역에 군소 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 부터였다.
  경인· 경부선이 1900년과 1904년에 개통되자 정치, 경제적으로 침략을 노리던 일제는 교통이 편리하고 넓은 황무지로 구성된 영등포지역에 눈길을 돌렸고 이에 따라 일제는 1912년에 최초로 당산동에 조선피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공업지대의 면모는 광복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60년대부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맞아 당산동을 비롯한 영등포구지역은 공업지대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신길동(新吉洞)

  신길동(新吉洞) 동명의 유래는 문헌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1914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경기도의 관할구역으로 편입될 때부터 신길동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신길리(新吉里)라 하여 그 관할구역을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 신길리(新吉里)·상방하관리(上方下串里)라 한 것을 보면 옛날부터, 즉 조선시대부터 불리어졌던 우리 고유의 동리명이 아닌가 한다. 즉「신길」이란 새로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같으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후 신길리는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3년 경성부 영등포구역소의 관할하에 있다가 1946년 실길정은 신길동으로 명칭이 바뀌어졌고 영등포구역소가 영등포구로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관할하에 들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길동에는 조선시대부터 영등포에서 바로 서울로 들어가는 방학호진(放鶴湖津), 즉 「방아곶이 나루」가 있었다.
  신길동에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 와 지금도 토착주민들 사이에서 불리어져오는 다음과 같은 지명이 있다.
  가마꿀 : 전에는 강씨와 박씨가 많이 살던 곳이라 하여 「강박굴」이라 하다가 변하여 가마꿀이라 함.
  귀신바위 : 샛강가에 있는 바위. 여기에서 놀던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는 귀신붙은 바위라고 함.
  밤고지고개 : 방학고지에서 경수가로쪽으로 빠지는 고개로서 현재의 영등포여중 정문 옆 고개를 말함.
  밤동산 : 한강에 면한 마을로 옛날은 밤나무가 많았음.
  방학고지(밤고지) : 옛날에 강가, 지금의 귀신바위 근처에 「방학정(放鶴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하여 방학고지라 한다 하나, 옛 지명인 상방하관(上方下串)이 줄어서 방학고지라 하는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