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冠岳區)

 

 

 봉천동(奉天洞)

 남현동(南峴洞)

 신림동(新林洞)  

 

 

 

 

 

 

  봉천동(奉天洞)

   봉천동(奉天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이 관악산 북쪽 기슭에 있어서 관악산이 험하고 높아, 마치 하늘을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데서 봉천(奉天)이란 한자로 동명을 삼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 속해 있다가 1895년 지방제도를 개혁하면서 태종(太宗)때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 337군(郡)으로 개편할 때 봉천동은 인천부(仁川府) 12개군 가운데 시흥군(始興郡)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동면(東面) 봉천리(奉天里)로 함으로써 봉천동의 행정구역이 설정되었다. 그 뒤 1963년 시흥군 동면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시 봉천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봉천동에는 동네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옛 지명과 자연부락 명칭이 남아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가는굴 : 좁은 골짜기
  감나무꿀 : 예전에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 함.
  낙성동(落星洞) : 봉천7동에 위치하는데 일명 은천, 탑골이라고도 하며 강감찬장군의 출생지라 하여 낙성대를
                        세운 마을이며  낙성대탑이 있던 마을이다.
  능고개 :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능묘 있는 데로 넘어가는고개.
  얹힌바위 : 큰바위 위에작은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얹혀 있음.
  국사봉(國師峰) : 봉천1동에 있는데 궁교산의 사자암(獅子庵)이라는 절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세웠으므로 무학대사를
                        추앙하는 의미에서 사자암의 뒷산을 국사봉이라 부른다.
  쑥고개 : 봉천8동에 있는데 본래 숯을 굽는 가마가 있던 고개라 하여 숯고개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쑥고개로 불리게 됨.

    이 지역에 있는 유적지로 봉천7동 산 48번지에 낙성대(落星垈)가 있는데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역화하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강감찬의 본래 출생지는 지금 공원 터의 동북쪽 약100m 정도에 위치한 봉천동 218번지 14호·19호이며, 그가 출생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이 생가터는 낙성대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었고, 그 자리에는 고려시대의 3층석탑 하나가 있어 낙성대의 위치를 상징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 여름에 故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강감찬의 생가터 일대를 성역화 하여 길이보존하고 현창(顯彰)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이곳 일대 약 1만평의 땅을 물색하고 그해 11월에조성작업에 들어갔다.

  봉천11동 산 4번지 9호에 서향하여 우뚝 솟은 바위에 조선시대의 불상으로는 보기 드문 걸작품인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이 새겨져 있다.

  봉천7동 218번지 4호, 즉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바로 옆에는 서울시 보호수 市나무 1-23호인 향나무가 있다. 나무높이 17m, 흉고 둘레 420cm, 수관직경 10m에 이르는 나무이다. 수령이 650여년이 되는 늙은 나무로 향나무로서는 서울에서 두번째 큰 나무이다.

  봉천동은 재래의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던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기슭 경사지역에 주택들이 들어섰으며, 철거민 집단이주등으로 새로이 형성된 무허가 밀집지역이 산재해 있다. 봉천본동은 여의도 및 시림지구 재개발사업에 의한 철거민의 정착지역이며 봉천2동 역시 경사 25도이상의 급경사지역으로 여의도 및 동부이촌동·창신동 지역의 철거민 이주지역으로 저소득층의 밀집지역이다. 봉천3동 역시 용산구 서부이촌동 및 목동 철거민 이주 정착지역으로 고지대 무허가 밀집지역 및 재개발 대상지역이 되고 있다.

   관악로의 명칭은 1979년에 처음 제정되었다. 서울시가 새로 개설되거난 확장된 s11개 간선동로의 이름을 부여할 때 관악로라 명명된 것으로 지금가지 불리어 온다.
   은천로는 1981년 서울시가 시내 무명의 30개 도로에 대한 가로명을 제정할 때 은천로로 명명되었다가 폭 30m이하도로는 「길」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1984년 가로명 제정 때에 은천길로 개칭된 것이다.  은천길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명칭으로서 강감찬장군의 초명(初名)에서 유래하였으며 지금도 이 도로 인근에는 은천교와 은천초등학교의 명칭이 보인다.
   쑥고개길의 명칭은 봉천 8동에서 신림2동으로 넘어가는고개가 옛날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숯을 많이 궁웠는데, 이에 다라 「숯고개」라고 불리어지다가 「쑥고개」로 변한 고개의 옛 이름을 인용한 것이다.

  

 

남현동(南峴洞)

  남현동(南峴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에 있는 남현(南峴), 즉 남녘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연유한다. 아울러 남녘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라는 뜻의 남태령(南泰嶺;사당동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에 바탕을 두는 이름이라 하겠다. 이는 조선초부터 서울에서 남쪽 지방으로 통하는 국도(國道) 즉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이 곳을 지나 남태려을 넘어가는 길이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과천군(果川郡)에 속하였다. 1914년 현재의 남현동 지역은 시흥군 9면(面)의 하나인 신동면(新東面)의 사당동(舍堂洞)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 신동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신동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이때 남현동지역이었던 사당동은 방배동과 더불어 남성동(南城洞)의 관할지역에 속하였다. 1970년 남성동은 사당동으로 바뀌었고 남현동 지역은 사당1동의 관할구역이 되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신설됨에 따라 신동출장소는 폐지되고 사당동지역은 관악구에 속하게 되었다. 관악구 관할 사당1동지역을 남현동으로 명명하여 동이 신설되었다.

  남현동의 이름이 연유된 남태령에 대하여 살펴보자. 남태령은 18세기 말엽 조선 정조(正祖)가 선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陵)을 참배하려는 행차에 이 고개에 어가를 멈추고 잠시 쉴 때, 정조가 이 고개의 이름을 묻자 과천현(果川縣) 이방이던 변씨가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남태령입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 때 그를 시기하는 이가 있어 그는 「이 고개이름은 본디 옛날부터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바 어찌상감께 거짓을 아뢰느냐」라고 하며 변 이방을 힐책하자, 변 이방이 다시 땅에 엎드려 「이 고개 이름은 본디 여우고개라고 하나 이를 여쭙기가 신하로서 아뢸 수가 없어서 임기응변으로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감히 남태령이라 작명하였나이다」라고 아뢴즉 임금께서 변 이방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이후부터 여우고개라는 말은 사라지고 남태령으로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우고개라 부르게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 고개 가까이방배동에 호랑바위가 있는 골짜기에 호랑골이있고, 이 곳에 여우굴이 있어서 여우골이라고도 한다 하며, 옛날에 천년 묵은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남현동에 남아 있는 옛 문화유적을 살펴보면 남현동 1059번지 13호 곧 남부순환로의 길가 사거리 가까이에 사적 제254호로 지정된 舊 벨기에영사관건물이 있다. 본래는 중구 회현동 2가 2호에 세워졌던 것이었으나, 1982년 8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남현동 538번지 1호에는 면적 661.16㎡(200평)규모의 백제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요지(百濟窯址 ;가마터. 이곳이 예전에는 사당동에 속해 있어서 흔히 사당동요지라 부른다)가 있다.

  또 남현동에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9년(895)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의 하나라고 한다. 비보사찰은 명당에 절을 세우고 기도하면 나라가 융성하게 된다는 불교의 호국사상에서 비롯하였는데, 전국에 3,800여 곳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관음사 아래에는 승방벌(僧房坪)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승방벌은 일명 승방뜰·심방뜰이라고도 부른다.

  과천지방에는 옛부터 전하여 오던 고유한 민속놀이로서 무동답교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는 조선 제 22대 정조때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정조가 선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수원의 화성에 모신 융능(隆陵)을 자주 성묘하여 선고의 영을 위안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의 능행 거동이 빈번하였으므로 그의 능행을 위로하기 위하여 거둥 길 주위의 마을 사람들이 무동답교놀이를 베풀어 임금을 환영하며 그의 효행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해마다 베푸는 민속행사가 되어, 정월에 베풀어 한 해의 액운을 막고 풍년을 비는 행사가 되었다.

 

신림동(新林洞)

  신림동(新林洞)의 동명유래는 이곳이 본래 관악산(冠岳山) 기슭이어서 그 일대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 속해 있다가 1895년 인천부(仁川府) 시흥군(始興郡)에 속하였으며, 1896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소속되었다가 1963년 시흥군 동면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신림리(新林里)가 신림동(新林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림동에는 동네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옛 지명과 자연부락 명칭이 남아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복은말 : 신림2동 108번지 일대로서 「보그니말」이라고도 하며, 그 이름은 복은마을로 福隱村(복은촌)으로 쓴다.
             이는 옛날 이 마을에 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복이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서원말(書院洞) : 신림5동 신림사거리 부근에 서원터가 잇었으므로 그 근방 마을을 이렇게 부른다. 여기에 고려시대에
                        서원정(書院亭)이라는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강감찬장군이 송도(松都)에 왕래할 때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는 없고 이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이 불리고 있다. 이 서원동에 당제(堂祭)를 지내는
                        집이 있었다.
  합실(合室) : 신림10동 중서북부에 있으며 지형이 큰 조개모양을 이루고 있어 합곡(蛤谷)이라 적었던 것을 소리와 뜻으로
                   옮겨  합실이라고 했다.
  밤골 : 신림10동에 있는데 관악산 중턱이라 옛날에 밤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불려진 이름이며 율곡(栗谷)이라고도
          불리운다.
  궁벌 : 계동궁에 딸렸던 들
  방아다리 : 옛날 방아공이로 놓았던 다리
  앵두꿀: 신림동에 딸린 산
  인절미바위 : 울배산 모퉁이에 있는 바위로 인절미처럼 잘라진 바위
  학산 : 산 형국이 학처럼 생겼다 함.

  오늘날 신림동은 이른바 불량주택 산재되어 있고 생활보호대상자가 많이 살고 있어 달동네를 연상케 하고 있다. 개발 전에 철거민들이 집단이주하여 사로 있으며 점차 신흥개발 주택지역이 자리를 잡아가고, 또 발달된 도로망을 중심으로 각종 기관과 상가 및 유흥업소들이 확장되어 도시화를 이루고 있다.

  신림5동 신림사거리 부근은 서원동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당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다. 이 당집은 맨처음에는 신림동 1640의 40,41호에 있었으나지금의 양지병언을 짓느라 헐고 신림본동 산꼭대기인 87의 577호로 이전했는데 이것도 1970년경에 개인땅이어서 주택을 신축하느라 헐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신림 7동에는 난곡시장(蘭谷市場)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난곡(蘭谷)은 비운의 장군인 강홍립(姜弘立)이 유배되어 은거하면서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 뒷산(신림3동과 신림7동의 경계)에는 강홍립의 묘터와 진주강씨(晋州姜氏) 일가의 묘역이 있다.

  신림9동 서울대학교 서쪽에서 관악산 연주봉(戀主峰)을 향하여 올라가 도중의 가장 넓고 깊은 골짜기일대를 자운동(紫霞洞)이라 하는데 참판(參判) 신위(申緯)의 행적과 더불어 명승(名勝)으로 이름 높다. 그 앞산에는 서울대학교 서쪽에 500여년이 되는 성주암(聖住庵)이라는 절이 있고, 그 서쪽에는 약수암(藥水庵)이 있다. 또 자하동 뒷산에는 서울대학교 뒤쪽으로 중간지점에 역시 500여년이 되는 자운암(자운암) 있다.

  관악산은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安養市)아 과천시(果川市)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최고봉은 연주대(戀主臺, 629m)이고 삼성산(三聖山), 호압산(虎壓山)들의 지맥이 있는데, 성승(聖僧)이라고 일컬어지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이이 산 중에서 수도하며, 일막, 이막, 삼막들의 세암자를 지었다. 일막, 이막은 임진왜란 때 타버리고, 지금은 삼막만 남았는데 이것이 삼막사(三幕寺)이다.
  관악산은 본래 화산(火山)이라 하여 그 불을 끄기 위하여 또는 그 기운을 막기 위하여 경복궁(景福宮)앞에 해태(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를 만들어 세웠으며, 관악산의 세력을 죽이기 위하여 산허리에 물동이를 묻었다고 한다.
  관악산과 삼성산 중간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서울대학교의 서쪽, 신림9동의 가운데를 북쪽으로 마장천이 흐르는데,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안양천(安養川)으로 흘러든다. 일명 신림천(新林川)이라고도 부르며, 일부는 복개되어 큰길로 변하고 일부는 지하철 2호선이 깔린 곳도 있다.

  관악구 신림3동 산 112번지 1호에 있는 굴참나무는 나무나이가 1,000여년 되고, 키가 17m이며, 흉고 둘레가 2.5m 가량 되는 노거수(老巨樹)로 천연기념물 제 27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봉천동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명장 강감찬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난 나무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