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구(瑞草區)            다른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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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행정구역(법정동) 서초동(瑞草洞)
 
잠원동(蠶院洞)
 
반포동(盤浦洞)
 
방배동(方背洞)
 
양재동(良才洞)
 
내곡동(內谷洞)
 염곡동(廉谷洞)
 
우면동(牛眠洞)
 
신원동(新院洞)
 
원지동(院趾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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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瑞草洞)

  瑞草洞은 이 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 하여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상초리(霜草里), 서리풀이라고 칭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 瑞草里와 明達里로 칭해 오던 곳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이곳은 서초리와 명달리를 합쳐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칭하게 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었다.
그후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어 이곳이 속하게 되었다가 1988년 서초구가 분리 신설되어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부락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밑(山底)동네는 우면산 아랫마을로 신중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다. 신중초등학교 남쪽은 돼지막굴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여기에서 양돈을 했기 때문이며, 과수원도 이 곳에 있었다.
  궁너머(宮峴)는 교육대학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서 시림이라고도 칭했다. 궁너머는 궁째마을 너머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서 조선시대 어느 왕이 지나다가 이 곳에 별궁을 지었으면 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司都甘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가 자리잡은 일대에 있었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鄭谷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일대를 지칭하는데 예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어른키만한 높이의 자연석 2개에 「鄭谷」이라고 각자(刻字)한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대로변 海州정씨대종친회 건물 앞에 각각 이전해 놓았다. 이 각자는 白石 鄭重萬의 필적이다.
  장안말은 외인주택단지, 즉 삼풍아파트단지 남쪽에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世宗의 4男인 臨瀛大君(임영대군)의 후손이 대대로 살아 왔다고 한다.
  분토골은 서울 교육대학 남쪽에 위치했던 마을로서 일명 富谷洞이라고 칭했다. 전에는 이 마을이 부유한 편이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고 분토골은 마을 근처에서 고운 흙이 나온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밖에도 서초동에는 귓말, 구석말, 상남배기, 王村, 가천동, 무당골, 土谷마을 등의 마을이 있었다.

  서초동은 조선시대의 유명인물이 묻혔던 明堂으로서 八明堂의 하나인 草堂 許燁(허엽)의 묘와 神道碑가 경복여상 동쪽 고속도로에 있었다. 1970년초에 경부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이 묘와 신도비는 이전되었다.

 

양재동(良才洞)

  良才洞은 이곳에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 하여 지은 동명이라 한다.

  양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의 양재동이라 칭해 오던 것을 1914년 일제가 경기도 시흥군 新東面 良才里로 정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양재동 지역은 탄천으로 유입하는 양재천 연안의 농경지가 있던 곳으로 벼농사가 행해졌던 중심지였다. 이후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성남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하면서부터 급속도로 농경지가 택지로 조성되었다.
  양재동에 남아있는 자연부락으로 거여, 비석거리, 상촌, 흥진동,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등이 있다.

  양재동에는 널리 알려진 말죽거리(馬粥巨里)마을이 있었다.

  말죽거리는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서울로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최종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충청도, 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말죽거리는 이 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조선초부터 말죽거리에는 公務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먼 길을 걸어 入京하려는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 이곳에 묵었던 것이다.

  또 다른 說로는 이괄(李适)의 亂때 仁祖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으러 말위에서 팥죽을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說은 역시 병자호란때 仁祖가 淸軍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군은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 이곳은 청군의 장수 龍骨大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군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良才驛)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에 따라 설치된 주요 역이었다.

  한편 이 洞에는 1960년 초까지 北方式 지석묘 6基가 있었다. 1950년대말 김무룡에 의하여 조사된 양재동과 우면동 고인돌무덤은 당시에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관내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면서부터 도시계획에 의하여 밀려나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잠원동(蠶院洞)

  蠶院洞은 조선초에 국립양잠소격인 蠶室都會가 이 곳에 설치되어 蠶室里라 칭하던 것을 1963년에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현재 송파구에 蠶室洞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蠶」자와 인근의 新東面 新院里의 「院」자를 따서 蠶院洞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칭해 오던 곳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년에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동의 원래 명칭이던 잠실리는 현재 신동초등학교 정문 건너편부터 잠원로를 끼고 뉴코아예식장 부근까지 있었던 마을로서 신동초등학교 정문 남쪽의 마을을 웃마을 또는 사거리라고 칭하고 뉴코아예식장 부근의 마을을 아랫마을이라 했으며, 그 중간의 마을을 간데말 또는 비석거리라고 칭했다.

  사거리로 부르는 웃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노폭 8m도로는 옛날에 三南道路로 일컫는 주요한 길이었다. 즉 수원, 용인에서 서울을 오려면 원지동, 말죽거리를 거쳐 이 길을 지나 현재 변전소와 한신아파트 119동 사이의 길을 따라 강변의 잠실나루에 이를 수 있었다. 잠실나루는 일명 점말나루터, 서빙고나루터라고도 불렀는데, 이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용산구 점말과 서빙고로 건너갈 수 있었다.

  할떡거리마을은 현재 뉴코아예식장 부근에 있었으며, 마을명칭은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조선전기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蠶室은 일반 민가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의미한다. 태종은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잠실도회를 설치, 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우선 지방에 시범 잠실도회를 설치하니, 이 조치가 잠실도회의 효시이다.
  서울의 잠실은 아차산, 연희궁의 東西잠실이 존속되다가 新蠶室이 증설된다. 東잠실과 西잠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자취를 감첬지만 新蠶室이 설치되었던 현재 잠원동 지역은 조선말기와 일제침략기까지도 넓은 지역이 뽕나무밭이었다.

 

반포동(盤浦洞)

  盤浦洞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해서 「서릿개」곧 蟠浦(반포)라 하다가 변음되어 盤浦로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一說에는 이곳이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 칭했다고 한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上北面 上盤浦里·下盤浦里 지역이었다. 일제때인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이곳은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칭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성동구 영동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신설된 강남구 관할에 속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된다.

  반포동은 1960년대만해도 신반포路 以西지역의 대부분은 강물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큰비가 내려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곤 했다.

  반포 1동지역은 고속버스터미널 뒤쪽 일대로서 전에는 周興洞 또는 전나무골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주흥동은 일제때 부호 김주용씨의 이름을 붙여 그가 부흥시킨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잠실리의 주민들이 수재로 집을 잃자 이 곳에 집 20채를 건립하여 입주하게 했다. 이 부근에는 전나무가 있었으므로 전나무골로도 칭했다.

  砂平路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 일대는 서래마을이 있다. 西涯마을 또는 서릿개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에는 예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이 20호 이상 있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르므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반포동의 명칭도 이 마을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西涯라는 마을이름은 매곡동 사람들이 이 마을이 서쪽 물가에 있는 마을이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이처럼 불렀다는 것이다.
  砂平路의 명칭유래는 이 곳 일대가 漢江南岸에 위치하여 범람으로 퇴적한 백사장이 넓으므로 사평원(모래벌)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방배동(方背洞)

  方背洞 동명의 유래는 牛眠山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方背라 한데서 연유한다. 우면산은 관악구와 강남구와의 경계에 솟은 해발 290m의 산으로서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우면산이라 불리어 졌으며, 관악구의 관악산과 우면산의 고개에 해당하는 남태령(南泰嶺)이 있다.
  그러나 一說에는 동의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方背洞으로 불리어 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上北面 方背里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新東출장소의 관할하에 들면서, 방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관악구가 설치되어 방배동은 관악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0년 강남구로 편입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속하게 된다.

  옛 지명중 홍문 앞자리라고 불리는 들은 지금의 방배 3동 신동아아파트 자리인 것으로 英祖때 세워진 文化柳氏 4旌門(정문)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다. 이 4정문은 1973년 경기도 안산시 와리로 이전되었다.
  지하철2호선 방배역 부근 방배동 190-1에는 효녕대군(孝寧大君)의 묘소와 사당인 청권사(淸權祠)가 있다.
  또한 방배동에는 고분이 있었는데 이 고분에서는 1970년대에 조선초기의 목우(木偶) 6점이 출토되었다.
  방배동지역은 옛날에는 하절기에 한강이 범람하면 방배동의 저지대 일대는 상습적으로 침수되던 쓸모 없는 늪지대였고 班家村이 아닌 역촌(驛村;일종의 하층계급 거주지역)과 民村지역으로서 城內의 시신 매설(묘지) 및 천민거주지역(무당)으로 구분되었다.

 

내곡동(內谷洞)

  內谷洞은 彦州面의 일부로서 本村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안골, 안말로 불리우던 것이 한자명으로 내곡동이 된 것이다.

  조선말까지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안골, 내곡동으로 칭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안골, 능안말, 구석말, 양지말을 병합하여 廣州郡 彦州面 內谷里라 칭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설된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할하에 내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신설된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신설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내곡동에는 안골을 위시하여 샘마을, 능안마을, 흐능날, 헌인마을, 홍씨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산재하고 있다.

  內谷洞의 동명이 된 안골, 안말 또는 內谷은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이 마을에는 慶州金氏가 오랜 전부터 거주해 왔다.
  능안말은 헌능(獻陵) 안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홍씨마을은 洪氏만의 집성촌이므로 불리어졌다.
  흐능날은 30여호 정도의 주택이 헌인능(獻仁陵) 입구와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샘마을은 1972년도에 창경궁, 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臥龍洞)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원래는 박석고개 좌측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獻陵路) 건너편으로 거의 이주해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헌인능 동쪽에 위치한 헌인마을은 1970년초에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촌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인근 마을에서 이들의 거주를 반대했으나, 정부의 적극 지원정책으로 마을을 이루어 양계를 시작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헌능로의 박석(薄石)고개는 일명 덕영고개라고도 칭하는데 조선시대에 헌인능에 왕의 능행(陵行)때를 대비하여 고개에 네모난 돌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우면동(牛眠洞)

  牛眠洞은 牛眠山 아래 골자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유래된 동명이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 牛眠洞이었다가 1914년 시흥군 신동면 牛眠里로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우면동으로 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였다가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우면동에 남아 있는 마을들의 이름과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시내꿀 : 옛날에는 가시덤불이 우거졌던 곳이라 하며, 일명 형촌(荊村) 또는 샛말이라고도 한다.
  송동 : 소나무가 무성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능터로 예정되었던 곳이라 하여 능안이라고도 하며, 송부원군 산소가 있다고 한다.
  岩山(바우뫼·밤애) : 범바위(虎岩)라는 바위가 있는 산밑 마을명을 일컫는데 서울시공무원교육원과 경계를 이루는 산 아래에 있다.
  城村(잿말, 큰말) : 산이 성처럼 둘러싸여 밤애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우마니의 중심으로 큰마을이 있었다.
  우마니 : 우면리를 우면이라 하다가 변한 이름이다.

 

염곡동(廉谷洞)

  廉谷洞은 이 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영통곡(靈通谷), 염곡동(廉谷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彦州面 廉谷洞으로 칭해왔다가 1914년 염통골의 이름을 다서 광주군 언주면 廉谷里라 칭하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염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염곡동은 구룡산을 끼고 남향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아늑한 마을이므로 예부터 각처 사람들이 이곳에 사는 사람을 부럽게 보았으며, 이 마을을 피난골로 일컫고 있는데 이는 6.25전쟁때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데서 연유한다.
  탑곡(塔谷) 또는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능로(獻陵路)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탑곡은 옛날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 마을에는 慶州金氏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했다.
  이 동의 북쪽에 위치한 九龍山(283.2m)은 옛날 이 산에서 용 9마리가 승천했으므로 명명되었다고 하고 이 산의 주봉(主峰)을 국수봉(國守峰)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는 것이다.

 

신원동(新院洞)

  新院洞은 조선시대 원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이므로 「새원」이라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新院洞, 新亭洞 지역이었다. 1914년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라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신설된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신원동의 마을 이름이 있게 된 새원(新院)은 신원동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새원이란 말 그대로 조선시대에 새로 이곳에 院을 설치하였던 데서 생겨난 마을이름이다.
  새원마을중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 벌말 또는 本村, 坪村이다. 즉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 하고, 또는 한자명으로 평촌이라 하는데, 본촌이란 새원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므로 칭해졌다.
  벌말은 金海金氏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고, 6.25전쟁때 한강을 건너온 북한군이 이 마을에 주둔하자, 과천시 쪽에서 이동해 온 아군이 기습공격하여 북한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
  신원동 남쪽에는 새쟁이(新亭)마을이 있다. 새쟁이란 마을 명칭은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정자같이 서 있으므로 신정이라고 칭해 온 것이다.

 

원지동(院趾洞)

  원지동은 조선시대에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지(院址)라고 하던 것이 잘못 표기되어 원지동(院趾洞)이 되었다 한다.

  원지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동면(東面) 신원동(新院洞)으로 칭해왔다. 1914년 행정구역을 임의로 조정하면서 이 곳을 시흥군 신동면(新東面) 신원리(新院里)라고 칭했다.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신원동과 분리하여 바람골, 양수리, 원터마을의 3개 부락을 원지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다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원지동에 남아있는 마을이름은 다음과 같다.
  바람굴은 새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여 청계산 밑에 있는 마을이름으로 산이 높고 바람이 센 곳이기 때문에 불리어졌다.
  양수리마을은 관현사(寬顯寺) 입구, 유원지 주차장이 위치한 곳으로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붙여졌으나 현재는 폐동되어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운다.  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인 경부고속도로 옆에는 술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지방에서 상경하는 나그네들이 여기까지 오면 서울에 거의 도달했으므로 이 곳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하여 불리어진 바위로 지방에서도 잘 알려진 바위이다.
  개드락이란 골짜기는 이 마을 왼쪽에 있는데 비탈이 심해 불리어진 것이다. 또한 이 마을 위쪽에 청계산 제2야영장이 있고 이 야영장 오른쪽에는 거인의 손자국과 머리자국이 있어 장사바위라고 칭하는 바위가 있다. 그리고 바위가 넓적하다 하여 붙여진 넙적바위도 장사바위 부근에 있다.

  원지동과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성남시로 통하는 2차선 포장도로를 삼남도로(三南道路)라고 일컫는데 조선시대에 삼남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이었다. 즉 현재 세곡동으로 나가는 헌릉로(獻陵路)보다 일 길로 많은 사람들이 달래고개를 넘어 너더리(板橋)를 거쳐 용인이나 수원으로 갈 수 있었다. 이 길을 가다보면 청계산 제 1야영장과 청계산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이 입구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불리어진 것이다.

  그 밖에도 원지동에는 다음과 같은 들판, 바위, 골짜기 이름이 있다.
  진들 : 산등성이가 길게 뻗은 곳에 발달한 들이름.
  솔배 : 옛날 솔바위가 있었던 들이름.
  젯상바위 : 바위가 제상(祭床)같이 생겼다고 한다.
  광명고개 : 원지동에서 서울대공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일명 괭맹이고개라고 부른다.

  서울에 있었던 원으로는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광희문 밖의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는데, 그 중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전한다.
  원지동의 경부고속도로변에는 선돌(立石)과 고인돌(支石)군이 4곳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즉 서울톨게이트 부근과 원지동 350번지, 336,337번지에 고인돌이 있고, 선돌은 미륵당(彌勒堂) 남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원지동 고인돌무덤과 선돌은 서울지역에서는 유일한 선사시대의 거석(巨石)문화유적으로서 고인돌무덤 그 자체는 남방식(南方式) 지석묘의 전형을 이루고 있고, 아울러 선돌과 열석(列石) 및 작업장을 겸비한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서는 최상의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서울지구에서는 원지동 거석기념물이 유일하다고 하는 점에서 이 유적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