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江南區)             다른구 보기

  강남구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과 광주군 언주면 지역이었으나 1963년 1월 신동면 지역은 영등포區로, 언주면 지역은 성동區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강남구가 신설되었다.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나누어졌고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누어졌다.

강남구 홈페이지 http://www.kangnam.seoul.kr/kangnam/index.html

강남구행정구역도  개포동(開浦洞)
 
논현동(論峴洞)
 
대치동(大峙洞)
 
삼성동(三成洞)
 
세곡동(細谷洞)
 
일원동(逸院洞)
 
자곡동(紫谷洞)
 
신사동(新沙洞)
 
압구정동(狎鷗亭洞)
 
청담동(淸潭洞)
 
도곡동(道谷洞)
 
역삼동(驛三洞)
 
율현동(栗峴洞)
 
수서동(水西洞)
 포이동(浦二洞)

 

          

 개포동 (開浦洞)

   開浦란 洞名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이 개벌에 있으므로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 또는 한자명으로 개포(開浦)라 하였다. 실제 개포동 옛마을 이름으로서 지금도 개패, 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의 동명인 개포동으로 불리기 이전 1962년까지 반포리(盤浦里)라 불렸던 것은 지금 대치동 미도아파트 일대에 소반같이 생긴 포구(浦口)가 있어 소반「盤」字의 반포리(盤浦里)로 불리어 왔으나, 국립묘지 일대에 똑같이 생긴 포구가 있어 이미 반포리로 먼저 불리어 오고 있었다. 이 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現 강남구 반포동과의 동명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개포동으로 개칭한 것이다.

  개포동은 朝鮮時代末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일동, 반곡동 일부였는데, 일제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가 되었다. 이후 1963년에 서울시에 편입되어 동명이 개포동으로 개칭된 것이다.
  1973년 7월 1일에는 영동출장소(永東出張所)가 신설되었는데, 개포동은 신설된 성동구(城東區) 영동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성동구로부터 강남구를 분리, 신설하고 개포동은 강남구에 편입되게 되었다. 永東이란 명칭은 영등포(永登浦)의 동쪽지역이란 뜻이다.  1983년 12월 1일 개포동이 개포1동과 개포2동으로 分洞되고 1985년 9월 1일 개포2동이 개포2동과 개포3동으로 다시 分洞되었다.

  개포동은 大母山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동이다. 대모산은 표고 293m로서 산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예전부터 할미산이라 부르다가 헌릉을 모신 후에 어명(御命)에 의하여 大母山으로 고쳤다 한다.
  현재 개포2동에 전하는 자연부락 이름으로 한여울(盤谷洞)이 있다. 그 명칭유래는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세게 되었으므로, 한여울이라 하고 마을이 갯바닥에 있으므로 그 뜻을 따서 漢字名으로 반곡(盤谷)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은 현재 개포동 아파트 506동 앞에서 4단지 쪽을 바라보는 시계탑 주변인데, 개포동이 개발되기 전에는 10여가구가 살았었고, 은행나무가 남아 있었는데, 원주민은 모두 이주하고 은행나무도 1986년 枯死했다 한다.

 

대치동 (大峙洞)

  大峙洞 洞名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 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漢字名으로 大峙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朝鮮末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획정 때 대치리(大峙里)라 하였다.  1962년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관할이었던 이 지역은 1963년 1월 1일에 서울시에 편입되면서는 성동구 언주출장소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에는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 7월 1일에 삼성동에서 대치1,2동이 分洞되었고 1985년 9월 1일에는 대치2동에서 대치3동이 分洞되어 현재에 이른다.

  구마을이라 지칭되는 대치동 975-8에 수령 약 500여년이나 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그 앞에는 「영산단(靈産壇)」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 약 30m로 서울시 지정보호수 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성동 (三成洞)

  三成洞 동명의 유래는 봉은사(奉恩寺), 무동도(舞童島),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三成里라 명명하였던 데서 연유한다.

  朝鮮時代末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日帝때인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획정 때 세마을을 합하여 三成里라 하였다.
  1962년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관할이었던 이 지역은 1963년 1월 1일에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언주출장소의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10월 1일에는 신설된 江南區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985년 9월 1일 삼성동은 삼성로를 경계로 하여 1,2동으로 分洞되어 현재에 이른다.

  산 31번지 일대에는 조선왕조 9대 임금인 成宗과 그 계비(繼妃) 정현왕후 尹氏의 陵인 선릉(宣陵)과 제11대 中宗의 陵인 정릉(靖陵) 이 모셔져 있다.
  73번지에는 봉은사(奉恩寺)가 자리하고 있다. 조계종(曹溪宗) 계통의 이 寺刹은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창건하여 천년이 넘는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원동 (逸院洞)

  逸院洞名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逸院)이라는 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는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本洞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大母山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이라고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일원동은 朝鮮時代末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에 속하였으며, 日帝때인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이 지역에 있던 대청말을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가 되었다. 그 이후 1963년에 이 지역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성동구로부터 강남구를 분리, 신설하고 강남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원동의 대모산 기슭에는 약사(藥師)절이 있다. 이 절은 高麗 공민왕(恭愍王) 2년(1353)에 진정국사가 창건하고 불국사(佛國寺)라 했는데 高宗 17년(1880)에 네 번째로 이 곳에 옮겨 지은 것이다.

 

논현동(論峴洞)

  論峴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에 논고개가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현재 151∼3번지에 있는 논현동 천주교회 마루턱이 높은 고개였으며, 또 영동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동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당시 자연부락이었던 언구비, 절골, 부처말 등을 병합하여 논고개의 이름을 따서 논현리(論峴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논현동은 종전의 광주군 언주면에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논현동이 되었다.
  1980년에는 논현동사무소에서 학동(鶴洞)사무소가 分洞되었다. 1985년 법정동으로서의 학동은 폐지되고 현재 행정동으로서의 학동사무소는 존속하고 있어 논현동의 행정은 논현로를 경계로 논현동사무소와 학동사무소에서 나누어 맡고 있다.

  학동은 마을모양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鶴室, 鶴里, 鶴谷 등으로 지칭되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하여 학리로 명명되어 오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학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논현동의 자연부락을 살펴보면 논고개, 부처말, 비말, 사동, 언금이부락, 안금이부락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부처말은 현재 학동출장소 주위의 마을로 월봉암(月峯庵)이라는 사찰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말은 일명 언구비라고도 불렀는데, 현재 우정식당 주위에 형성된 마을로 옛날 어느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나라 산의 鎭(진)터를 개간하여 동민의 생계를 열어 주었으므로, 동민들은 그 유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이 곳이 비를 세운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비를 언구비라고 하였다.  절골은 현 동사무소 주위의 마을로 옛날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寺洞이라고도 불렀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명에서 암시하듯이 水田농업과 채소류가 주업이었다. 한 예로 현재 공무원 아파트 옆 용요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북쪽편 남산 사이에 남북으로 흐르는 漢江邊인 용산구 서빙고동 넓은 모래사장 벌판에 이르기까지 단무지 무 재배가 유명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효력을 나타내었던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하여 이곳에 집을 사는 사람한테는 취득세, 재산세, 도시계획세, 소방세를 징수하지 않았고, 건물을 짓는 개인이나 회사에도 취득세, 건물에 대한 재산세, 면허세 따위를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인구는 급격히 불어났다. 또한 당시 정부에서는 강북의 인구 분산책의 일환으로 강북지역의 소위 일류라고 하는 12개의 중고등학교를 이 강남지역으로 옮기게 하였다. 더구나 1970년대 초반에 실시된 「학군제」는 이 지역 인구의 급증을 가속화 시켰다.

 

 세곡동(細谷洞)

  細谷洞 동명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자연부락 명칭인 세천리(細川里)의 「細」자와 은곡동(隱谷洞)의 「谷」자를 따서 제정한 것이다.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大旺面)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세곡동이 되면서 성동구 송파출장소의 관할하에 들게 되었다.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대왕초등학교가 있는 세곡동 로터리 부근에 가느다란 개울 세천이 있고, 이 개울가에 세천리 마을이 있다.
  세천리와 함께 세곡동의 명칭이 있게된 隱谷洞은 헌능로(獻陵路) 북쪽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은곡동은 일명 망골(望谷), 막은골이라 칭한다. 막은골이란 이름은 나무를 심어서 마을 수구를 막았으므로 유래된 것이다.
  은곡동에서 자곡동의 못골로 넘어가는 곳에 도당터가 있어 이 산을 도당뫼라고 부른다. 이부근 세곡동 362번지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은곡동 서쪽의 들판을 용푼이라고 한다. 이 용푼에는 굴이 있는데 기이하게도 이 굴에서 불을 때면 700여m떨어진 도당터 고목나무 줄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것이다.
  밤고개 또는 반고개는 이 동에서 율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현재는 1986년에 동부간선도로가 세곡동 로터리에서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까지 개통되면서 낮추어졌다. 비선거리는 세곡동 118번지, 세곡동사무소가 위치한 마을로서 비석이 서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자곡동(紫谷洞)

  紫谷洞은 이곳의 자연부락명인 자양동(紫陽洞)의 「紫」字와 지곡동(池谷洞)의「谷」字를 따서 紫谷里라 칭한 것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자곡동이 된 것이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大旺面)의 자양골(또는 자양동, 쟁골), 못골(또는 목골, 지곡동)로 칭하던 것이 1914년 광주군 대왕면 자곡리라 명명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송파출장소의 관할하에 들게 되었다가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에 있던 자연부락으로서 못골(池谷洞)은 자곡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못골은 일제때까지만 해도 광주군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못골에는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묘가 자곡동 산 32번지에 있는데 묘를 이곳에 쓰면서 그 앞 자곡동 520번지에 연못을 팠으므로 못골이라는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못골에서 자양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당고개라고 부른다. 또한 못골에서 수서동과 일원동의 약사절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모산 절재고개로 칭한다.
  자양골은 서쪽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마을이므로 날이 밝으면 제일 먼저 돋는 해의 붉은 볕을 받으므로 자양골로 부르다가 변음되어 쟁골이라 부르고 있다.

 

신사동(新沙洞)

  신사동(新沙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에 있던 부락 한강새말(新村) 과 사평리(沙坪里)의 이름에서 각각 따와 신사리(新沙里)라 한데서 연유하다.

  조선시대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신촌(新村), 사평리(沙坪里) 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1914년 새말(新村), 동산말, 사평(沙坪)을 병합하여 신사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신사동(新沙洞)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신사동의 자연부락을 보면 모래벌(沙坪), 새말(新村), 새말나루터 등이 있었다. 모래벌은 한자로 사평(沙坪)인데 신사동 앞에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사평원(沙坪院)이라는 주막이 있었다.

  이 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인조(仁祖)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 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이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新村)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현재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新沙渡船場)이라고도 하였다. 이들 마을은 한강변에 위치하는농업 위주의 마을이었으나, 조선후기 난전(亂廛)의 성행과 사상의 활동에 의해 사평을 주심으로 상업도 꽤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3년에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고 또 정부의 급속한 경제정책과 1970년대부터의 도심인구 분산정책에 의한 영향으로 이 마을의 야산과 전답은 개발되기 시작하여 곳곳마다 군소빌딩과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서울남부의 신흥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압구정동(狎鷗亭洞)

  압구정동(狎鷗亭洞) 동명의 유래는 이 곳에 조선 세조(世祖)때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압구(狎鷗)는 한명회의 호로서 일찍이 중국 송(宋)의 재상이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압구정리(狎鷗亭里)였던 지역인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옥골(玉谷)을 병합하여 그대로 압구정리라 하였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압구정동(狎鷗亭洞)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성동구(城東區) 영동출장소(永東出張所)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玉谷), 長者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 구내에 있던 마을이며,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 석기시대의 석부(石斧;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으며, 장자말(長者洞)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으며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압구정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가 동호(東湖)의 남쪽 강가 저자도(楮子島)와의 강물 사이에 서남으로 바라다 보이던 낭떠러지 언덕바지인 산 310번지의 3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동명의 연유가 된 것이다. 압구정이 있던 이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玉水洞)과 금호동(金湖洞)의 동호(東湖)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 와 절경을 이루던 곳이었다.

  압구정 부근에 두멍소가 있었는데, 두멍같이 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못이 묻히면 난리가 나고 이 못이 패이면 평화가 온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못의 위치마저 식별하기 어렵다.

  또 이 마을 앞으로 흐른 개울물이 마치 무지개 모양 굽어 흘렀기 때문에 그 개울 명칭을 무지개개울이라고 붙이기도 하였으며, 청숫골 서쪽 산에 옛날 부처당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나 언제 철폐되었는지 흔적마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되었다.

 

청담동(淸潭洞)

  청담동(淸潭洞) 동명의 유래는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현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청담동(淸潭洞)이었는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청담리(淸潭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淸潭洞)이 되었고 1973년 성동구(城東區) 영동출장소(永東出張所)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시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청담동의 자연부락을 상고해보면 청숫골, 숫골, 큰말, 작은말, 솔모퉁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숫골은 현재 정림아파트 근방으로 한강 연안의 물이 맑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숫골은 청숫골 바로 위쪽에 있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당시 청담동은 한강변에 위치하는 농업위주의 마을이었으나 수산에도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의 수산물로서는 해밀어(蟹密魚;게), 부어( 魚;붕어), 궐어( 魚;쏘가리) 등이 유명하여 청담도선장(淸潭渡船場)을 통해 강북으로 수송되었으며, 이 중 게와 붕어는 나라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과실로는 앵도(櫻桃;앵두)가 유명하였는데 「남한지(南漢志)」에서는 언주면 일대는 앵두의 최적합 산지로 기술하고 있다.

 

도곡동(道谷洞)

  도곡동(道谷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뒤에 매봉산이 둘러 있고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으므로 독부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도곡(道谷)이라 명명하였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양재동(良才洞)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 독골, 양재리(良才里)를 합쳐 양재리(良才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옛 이름 독골을 되찾아 도곡동(道谷洞)이 되었고 1973년 성동구(城東區) 영동출장소(永東出張所) 관할이 되었으며 1975년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곡동의 자연부락을 살펴보면 독구리, 독부리, 독골, 양재리가 합쳐 이룩된 마을이다. 이 마을뒤에 매봉산이 있고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으므로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로 와전되고 거기서 또 독골이 되었는데 양재리와 합쳐 도곡동이 되었다. 이 독구리마을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입성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말죽거리와 매봉산의 중간에 오솔길이 있었으며 이 길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하룻밤 묵고 아침 성문이 열리면 들어가기 위하여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주막집 서너집이 오솔길 옆 골짜기에 있어 언제부터인가 이 마을을 독골(독구리)마을이라 불렀다고 하며, 일제 때 토지개혁 당시 독구리는 도곡리(道谷里)로 칭하여 지다가 이 마을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때 당시 이웃 역마을에 사는 신동명(申東明)씨가 주민들에 의하여 초대동장으로 선출되면서 성동구청에 도곡동으로 신고케하여 도곡동이 되었다고 한다.

 

역삼동(驛三洞)

  역삼동(驛三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驛村)이었던 말죽거리(馬粥巨里), 상방하교, 하방하교 등 역촌의 세 마을을 합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에 속해있었다. 1914년 말죽거리, 아랫방아다리(下方下橋), 윗방아다리(上方下橋) 등 역마을(驛村)의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驛三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역삼동(驛三洞)이 되었고 1975년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역삼동의 자연부락은 말죽거리, 하방하교, 상방하교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말죽거리(馬粥巨里)는 일명 역마을(驛村)로서 양재역과 그 부근 마을인데 현재는 양재동에 속해 있다. 하방하교는 일명 아랫방아다리라고도 하는데, 즉 방아다리 아랫마을로 현 833번지 이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상방하교는 웃방아다리라고도 불렀는데 즉 방아다리의 윗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역삼동에서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1966년 숭실대학 사학과에 의해 발굴된 유적지의 위치는 역삼동 산 21의 1 표고 90m의 야산 위로서 이 일대는 표고 100m이내의 야산 줄기가 이리저리 뻗은 준평원으로, 유적지에서 정남 약 10km 전방에는 표고 544m의 청계산(淸溪山)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표고 283m의 구룡산(九龍山)이, 서쪽으로는 표고 290m의 우면산(牛眠山)이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이들 역삼동 거주지의 연대는 청동기시대에 속하지만 미생식토기(彌生式土器)의 풀현보다 더 내려가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데 다시 말해서 기원전 7세기∼4세기사이에 생존했던 거주지로 보고 있다.

 

율현동(栗峴洞)

  율현동(栗峴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에서 세곡동(細谷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밤고개, 변하여 반고개, 방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율현(栗峴)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율현동은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대왕면(大旺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 방죽말, 밤고개를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율현리(栗峴里)가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된 후 1975년 성동구로부터 강남구를 분리 신설하고 영동출장소가 폐지됨으로서 율현동은 강남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밤고개에 울창하게 심어진 밤나무들은 조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柳尙運)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율현동의 자연부락으로는 방죽마을이 있는데, 이 곳에 큰 방죽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율현동에는 선사유적으로서 석기산포지(石器散布地)가 있다. 이는 지금 사유지이며 1965년에 간행된 김원룡(金元龍)의 「한국사전유적물지명표(韓國史前遺蹟物地名表)」에서 확인되고는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찾을 수 없다.

 

수서동(水西洞)

  수서동(水西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水西)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宮村)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太祖)의 제7子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와 그 봉사손(奉祀孫) 광평대군(廣平大君)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대왕면(大旺面) 수서리(水西里)였으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1966년 서울시에 편입된 후 1975년 성동구로부터 강남구를 분리 신설하고 강남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서동 514번지 8호 이병무(李炳武)씨 소유의 전통한옥이 전통건조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통 건조물은 1984년 제정된 「전통건조물보존법」에 의해 지정된 것으로서 국내에 산재한 전통가옥 가운데 문화재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통가옥으로서 보존가치가 있는 가옥이다.

 

포이동(浦二洞)

  포이동(浦二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들이 되므로 그뜻을 따서 포이동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彦州面) 포이동(浦二洞)이라 하다가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리(浦二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 포이동(浦二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포이동의 자연부락은 다음과 같다.

  갯들 : 게리 앞에 있는 들로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옴.
  게리 : 게의 형국이라 함
  국사봉(國師峯) : 구룡산에 있는 봉우리
  동산말 : 동쪽 산 밑에 있는 마을
  두둑재 : 동산말에서 물미리로 가는 고개인데 낮고 두둑함
  물미리(밀미리) : 큰물이 지면 한강물이 이 마을 앞까지 밀려 들어오므로 물미리 또는 변하여 밀미리라 함.

  포이동, 개포동 일대에 걸쳐있는 구룡산(九龍山)은 해발 283.2m로서 계곡이 9곳 있는 산으로 이 산 이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용 10마리가 등천(登天)하다가 임신한 여자를 보고 놀라서 그 중 한 마리가 양재천(良才川) 연못에 빠져 죽고 9마리가 올라갔다고 하여 구룡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