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松坡區)      다른구 보기

 

 

 가락동(可樂洞)
 
거여동(巨餘洞)
 
마천동(馬川洞) 
 
문정동(文井洞)
 방이동(芳荑洞)
 
이동(二洞)
 삼전동
 석촌동
 송파동
 
오금동(梧琴洞)
 오륜동
 잠실동  
 
장지동(長旨洞)
 풍납동
 

 

 

 가락동(可樂洞)

  可樂洞 洞名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원래 可樂골이 있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또 一說에는 朝鮮時代에는 가락골을 중심으로 5,6개씩 띄엄띄엄 마을이 있어 각각 자연부락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乙丑年(1925) 대홍수때 漢江이 범람하여 松坡洞 一帶가 침수되자 그 곳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가히 살만한 땅」즉 좋은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에 자연부락을 합쳐 가락리(可樂里)라 명명한 바 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하였다. 高宗 32년 (1895)에 가락동은 한성부 11군 가운데 종전처럼 광주군에 속했다.

  1914년 3월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광주군 중대면에 소속시켜 可樂里라 하였다. 1963년 1월 가락리는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75년 10월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자 가락동은 강남구에 소속되었다. 계속되는 인구증가로 1979년 10월 강남구를 구분하여 강동구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가락동은 강동구에 소속되었다가 1988년 송파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가락동에서는 선사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과 거주지 등이 발굴된 곳은 가락동 일대의 야산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진 산마루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현재의 가락동에 주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전후∼청동기초부터 이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문정동(文井洞)

  文井洞 동명의 유래는 병자호란 때 仁祖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 마을에 많이 사는 文氏 性을 따서 文井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一說에는 이 마을 지형이 연꽃처럼 생겼다하여 연화동(蓮花洞)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이었으며 일제때인 1914년 3월 문정골, 헤경머리, 두댐이말을 병합하여 문정리로 하고 경기도 광주군에 소속시켰다.

  1963년 1월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문정동은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88년 강동구에서 분구된 송파구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의 조선시대 자연부락 명칭을 살펴보면 본마을인 문정골을 비롯해서 옛날 임경업장군이 태어났다는 「두댐이마을」과 지금부터 약 백년전에 昔氏라는 한 노인이 길가에 집을 짓고 낮이면 잡화를 팔고 밤이면 비워 두었다 하여「헛가게 머리」로 불리던 것이 차차 집이 들어서자 이 말이 와전되어 「헤경머리」로 된 마을, 현재 李氏가 많이 살고 있는 「개와집마을」등이 합쳐 문정동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文氏들이 門中을 형성하고 世居한 곳으로 이름 났으며 현재는 李氏가 주로 많이 世居하고 있다고 한다.

 

장지동(長旨洞)

  長旨洞 동명의 유래는 마을이 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는 잔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廣州牧이었으며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주막거리, 새말, 구석마을과 매착리(梅着里)의 일부를 합쳐 장지리(長旨里)라 하고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에 속하였다.

1963년 1월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자 장지동은 강남구에 소속되었고 1979년 19월 강남구를 분구하여 강동구가 신설되자 강동구에 편입되었다. 1988년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분구되면서 송파구에 편입되었다.

 

오금동(梧琴洞)

  오금동의 동명은 일찌기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고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가는 길에 이 곳의 백토(白土)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아프다고 말하자 그 후부터 이 곳을 「오금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로 칭해 왔는데 일제가 강점한 후 1914년 부제 실시로 이곳의 오금골을 비롯하여 웃말, 아랫말, 건너말, 안골, 눈머리, 신금리, 개롱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금리로 제정했다. 광복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오금동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 구에 속하였다가 1979년 강동구가 설치되면서 강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1988년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분구되면서 송파구에 편입되었다.    

  오금동사무소 동쪽에 백토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는 깎아져 내려 평지가 되었으며 20m도로와 30m도로가 지나는 사거리가 되었다. 백토고개로 불리게 된 까닭은 이 고개의 흙이 주위의 논과 달리 흰 흙이었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거여동(巨餘洞)

  거여동(巨餘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이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의 일부로서 거암(巨岩)이란 사람이 살았으므로 거암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김이」,「겜리」라 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잔버드리, 개롱리, 뒷말을 병합하여 거여리(巨餘里)라 하다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거여동이 되었다.

  거여동 321번지에는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 12호로 지정된 수령 600여년이 된 향나무가 있다. 이 향나무는 높이 13m, 흉고둘레 3m에 이른다. 이 나무는 노송나무라고도 하고 백공(柏貢), 향목(香木), 원백(園柏), 원송(園松), 보송(寶松)과 향백송(香柏松)이라 불리어지는 상록침엽수로서 잎이 바늘잎으로 된 것과 비늘잎으로 된 것의 두가지 형이 있다.

 

마천동(馬川洞)

  마천동(馬川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馬川里)라 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또 하나 고로(古老)들 사이에 전해오는 동명 유래는 조선조 임경업(林慶業)장군이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를 얻어 거여동을 지나다 백마에 물을 먹여 백마물이란 곳이 있고,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여 마천동(馬川洞)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도 전하는 마천동사무소 뒤쪽 마산(일명 天馬山)에 얽힌 전설로는 병자호란 때 이 산에서 용마가 나와서 임경업 장군이 개롱리에서 갑옷을 입고 투구봉에서 투구를 쓴 후 이곳에서 용마를 타고 출전하였다고 한다.

  마천동 지역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의 일부였다가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이 지역에 있던 돌무더기, 가운데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경기도 광주군 마천리(馬川里)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마천동(馬川洞)이 되었다.

  지금도 불리어지고 있는 마천동의 자연부락으로서는 옛날 마천리의 한가운데에 있다 하여 「가운데말」이 있으며, 온 마을에 돌무더기가 많이 있다 하여 「돌무더기」, 지형이 섬같이 생겨다 하여 「섬굴」이 있다. 그리고 마천리의 세 마을중에 아랫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랫말」, 위쪽에 있다 하여 「웃말」이 있다.

 

방이동(芳荑洞)

  방이동(芳荑洞)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이 마을의 지형이 아늑하고 개나리꽃이 많이 피었으므로 「방잇골」로 불리우다가 한자음으로 방이동이라 고쳐진 것이다.

  조선말가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 방이동(芳荑洞)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부제실시로 「방잇골」,「웃말」,「건넛말」을 합쳐 방이리(芳荑里)로 정하였다.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방이동으로 고쳐졌다. 1975년 강남구 신설로 이 구에 속하였다가 1979년 강동구가 신설되어 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송파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송파구로 편입되었다

  방이동은 백제 도읍지인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을 포함한 지역으로 올림픽공원과 선수촌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사유적지나 농경지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오금동 길가 방이동 산 47번지 4호에는 도합 18필지 9,650㎡의 작은 동산 경역에 이도( 道)가 있는 횡혈식(橫穴式) 석실묘(石室墓)와  도가 없는 수혈식(竪穴式) 석곽묘(石槨墓)가 한께 산재되어 있다. 이를 방이동(芳荑洞) 백제고분군(百濟古墳群)이라 하는데 사적 제 270호로 지정되어 경역(境域) 조성이 잘 되어 있다. 서울 지구에 남아 있는 고대유적지로서 주목되고 있는 이 고분군은 1975년에 5기, 1976년에 재차 실시한 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로 3기가 더 발굴되었다. 이 8기의 고분군들 사이에 30여기에 달하는 민묘(民墓)가 있는데 그 묘비로 보아 고려, 조선시대까지 이 부근이 묘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유적으로 보아 선사시대로부터 삼국,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일종의 공동묘역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방이동의 방이중학교 남동쪽에는 피부병에 특효가 있던 「대왕좌약수(大王座藥水)」가 있었다. 이 약수는 병자호란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49일간 포위되었다가 삼전도(三田渡)로 항복하러 오는 길에 이곳에서 쉬었는데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다. 이때 신하들이 즉시 이곳의 돌 밑을 파자 물이 나왔으므로 인조가 이 물을 마셨는데 이것이 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 후부터 이 약수를 대왕좌약수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1983년 구획정리사업 시행때 없어졌다.

 

이동(二洞)

  이동(二洞)은 1985년 9월 1일자로 방이동에 통합되어 동명칭은 사라졌다.

  이동이란 동명은 전일에 두 개 마을을 병합하였으므로 이리라고 칭하던 것이 이동이 된 것이다. 즉 이곳에는 「몽촌」「일동네」「잣나무골」「큰말」외에「신촌」「웃말」「가운데말」「아랫말」등의 자연부락이 있어 한때 1里, 2里로 나누었다가 다시 병합하여 2개 마을을 병합했다 하여 이리(二里)라고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일제침략말기까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대면(中垈面) 이리(二里)로 칭해왔다가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면서 이동으로 되었다.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했었고 다시 1979년 종래 천호출장소 관내를 강동구로 승격시키면서 이동(二洞)은 강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5년 이동은 방이동에 편입되면서 법정동 명칭은 사라졌다.

  이동 일대는 1960년대부터 국립경기장 지역으로 지정되었던 관계로 거물의 신축음 물론 증축, 개축의 제한을 받아 1983년까지만 해도 초가집이 남아 있어 서울 속의 농촌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86아시아경기와 88서울올림픽을 위해 이곳은 올림피공원으로 개발되었다. 올림픽공원의 개발로 1983년 말부터 1986년 4월말까지 이곳의 총 385동 주택들이 모두 철거되고 957세대들도 각지로 이주했다. 이동은 몽촌(夢村)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 곳에는 「큰말」「일동네」「잣나무골」등 여러 마을이 있었지만 이를 통털어 몽촌으로 칭해왔다.

  이곳을 몽촌으로 부르게 된 연유를 살펴 보면 고대 삼한(三韓) 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자음으로 고쳐져 몽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곰」의 음이 「꿈」으로 전화되고 다시 한자로 옮겨질 때에 꿈을 의미하는 「夢」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동을 몽촌 또는 조선중기에는 고원강촌(古垣江村)으로 칭했던 것은 이곳에 몽촌토성이 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몽촌토성은 백제초기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으로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 토성은 백제건국에서 웅진천도(熊津遷都;475년)까지 한성(漢城)인 위례성(慰禮城)을 형성한 백제초기 토성 중의 하나로 1982년에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몽촌토성은 타원형으로 이어진 야산을 이용하여 그 위에 진흙을 쌓아서 성벽을 이룬 토성이며 남북의 지름이 750m, 동서의 지름이 500m 되는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토성의 둘레에는 방어용 개천인 해자(垓字)시설이 되어 있고 성채에서는 목책(木柵)과 망루(望樓)도 발견되었다. 이 성안에서는 백제의 회백색(灰白色) 연질토기(軟質土器)가 많이 채집되었을 뿐 아니라 경질토기(硬質土器)도 발견되고 있으므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의 위례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