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江東區)       다른구 보기

  오늘날의 강동구지역은 백제전기의 왕도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및 한성지역(漢城地域)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가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을 때는 고구려 남평양성(南平壤城)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신라(新羅)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인 문무왕(文武王) 때는 이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라했다가 다시 남한산주(南漢山州)로 개칭하여 이에 속하였다.

  고려 성종(成宗)때에는 다시 광주목(廣州牧)으로 개편되어 내려오다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오늘날의 강동구지역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구천면(龜川面)에속해 있었다.  구천면(龜川面)의 지명은 조선 성종(成宗)때에 이곳에 살았던 조선초기의 명신 구천(龜川) 어효담(魚孝膽)의 호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구천면은 이 후 1907년에 구천면(九川面)으로 한자명이 바뀌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이 지역은 서울시에 편입되게 되었다.

 

 하일동(下一洞)
 
상일동(上一洞)
 
명일동(明逸洞)
 
고덕동(高德洞)
 
암사동(岩寺洞)
 
천호동(千戶洞)
 
성내동(城內洞)
 
길동(吉洞)
 
둔촌동(遁村洞)

 

 

 

 

 

하일동(下一洞)

  하일동(下一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게내(蟹川)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일리(下一里)라 하던 것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하일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하일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능골, 벌말, 말우물, 강매터, 가려울 등 자역부락을 합하여 하일리(下一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하일동(下一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일동에는 자연부락 명칭이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가래여울(가려울;추탄楸灘)  : 한강 여울가에 잇는 마을, 강가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가래여울(추탄)  이라 하고
                           줄여서 가려울이라 하는데 백제 때부터 요충지로 되었다.
  벌말(큰말, 평촌) : 마을이 벌판 한가운데 있으므로 벌말이라 불렀다고 하고, 또는 여러마을 중에 가장 큰마을이라 하여
                           큰말이라고도 한다.
  건너말 : 벌말 건너에 있는 마을
  능골(陵谷) : 능을 모실만한 곳이라 함
  말우물(斗井谷) : 네모가 져서 구식 말의 모양과 같이 된 우물이 있으므로 말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두정곡이라 한다.

  씨족이 모여 농업을 주업으로 하여 사는 자연부락들이었던 하일동은 1967년 서울시 9개 구청 산하 철거민이 집단 이주, 정착함으로써 점차 혼성부락으로 전환되어 갔다.

 

상일동(上一洞)

  상일동(上一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상일동과 하일동의 사이를 흐르는 게내(蟹川)의 윗쪽이 되므로 상일리라 하던 것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하일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상일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게내, 게내안말과 동자골(童子谷)의 일부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상일리(上一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상일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부락 명칭과 옛 지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게내(蟹川) : 게가 많이 있어 게내 또는 한자명으로 해천(蟹川)이라 부르는 게냇가에 있는 마을
  게내안말 : 게내 안쪽에 있는 마을
  동자골(童子谷) : 명종(明宗) 때 승 보우(普雨)가 이 곳에 절을 짓고 동자부처를 모셨다 하여 동자골이라 한다.
  찬우물고개(冷泉峴) : 닥밭재 오른쪽에 있는 고개로 그 밑에 찬 우물이 있으므로, 찬우물고개(냉천현;冷泉峴)이라 한다.

  상일동 지역에는 역사적 유적지, 인물, 설화, 전설 등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이곳에서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것으로 추정되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검파두식(劍把頭飾)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는 암사동 선사유적에서 볼 수 있는 바의 신석기시대인들과는 달리, 청동기 때에는 전대(前代)의 강반주거(江畔住居)에서 휠씬 내륙쪽으로 이동하고 확산한 것을 보여주는 고덕동,명일동유적들과 같은 한 예라고 생각된다.

  또 상일동에는 조선 태조(太祖) 때의 개국공신인 유창(劉敞;?∼1421)의 묘가 있다.

 

명일동(明逸洞)

  명일동(明逸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고려 성종(成宗) 11년(994)에 이곳에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서 명일원(明逸院)을 두어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와주었으므로 그 이름을 때서 명일원, 원텃골이라 하던 데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명일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명일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샛말, 염주골 등 자역부락을 합하여 명일리(明逸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명일동(明逸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일원(明逸院)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이어지는 요로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유지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되나, 조선초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전하는 전국의 1,310개 원명에서 찾아 볼 수 없어 그 이전에 폐치되었는지 혹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명일동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당시 함께 편입되었던 상일동, 하일동, 고덕동 등과 마찬가지로 서울 외곽지대의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잔존되어온 지역이었다.

  이러한 농촌지역적인 성격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명일동의 이러한 옛모습은 지금도 남아 전하는 예전의 자연부락 명칭에서도 볼 수 있다.

  간낫굴 : 원터 건너에 있는 마을
  염주골 : 염주사(念珠寺)라는 절이 있었던 마을
  건너말 : 염주골 건너쪽에 있는 마을
  샘말 : 원텃골과고덕리 사이에 있는 마을
  샛말 : 원텃골과 염주골 사이에 잇는 마을
  큰골 : 큰산 밑에 있는 마을

  명일동 지역에는 역사적 인물, 설화, 전설, 중요 유적지 등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명일동 야산에서 선사시대 거주지가 1기 발견되어 학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명일동거주지는 청동기후기의 것이라고 생각되며 1961년에 발굴되었다.

     

 

고덕동(高德洞)

  고덕동(高德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고려말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이양중(李養中)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을 반대하여 이 곳에 와서 숨어 살면서 벼슬 제의도 거절하는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을 받았던 데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고덕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고덕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가재울, 비석말, 방죽말, 동자골 등 자역부락을 합하여 고덕리(高德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고덕동(高德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덕동의 동명이 고려말 이양중의 높은 덕을 기리는 데서 유래하였는데 고덕(高德)이라는 명칭은 이 근처 지명에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하일, 상일동을 지나 한강에 유입하는 고덕천(高德川), 이양중이 이 산에 은거하였다는 고지봉(高志峰), 해발88m의 응봉(鷹峰)이 한강과 접해 있으면서 고덕동과 암사동을 분계하고 있는데 이 산줄기를 고덕산(高德山)으로 부르는 등 인근에 고덕과 관련된 명칭이 많이 남아있다.

  가재울(가재골) : 가재가 많았으므로 가재울 또는 가재골이라 한다.
  고더기 : 고덕리(高德里)가 변하여 고더기라고도 한다.
  고지봉(후미께) : 한강가에 있는 산으로 후미진 곳에 있으므로 후미께라고도 하는데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이
                       세상을 피하여 이 산에 은거하였으므로 고지봉(高志峰)이라 한다.
  방죽말(防築洞) : 방죽이 있는 마을이므로 방죽말 또는 한자명으로 방축동(防築洞)이라 한다.
  비석말(碑石村) : 세조(世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어효담(魚孝膽)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므로 비석말 또는
                       한자명으로 비석촌(碑石村)이라 한다.

  1895년에 고덕동에 편입된 지역에 있는 배재중고등학교는 1885년 8월 3일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가 창립한 학교로 1886년 6월 8일에는 고종(高宗)으로부터 설립재가를 받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사액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원래 중구 정동(貞洞)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84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암사동(岩寺洞)

  암사동(岩寺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오늘날 산 23번지 일대에 신라시대에 절(寺)이 9개나 있어 구암사(九岩寺)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하였으므로 그 한자명으로 암사리(岩寺里)라 한데서 연유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암사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암사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참말, 우묵골, 점말, 새능말, 섬말, 갯물 등 자역부락을 합하여 암사리(岩寺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암사동(岩寺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암사동을 구성하고 있던 자연부락과엣 지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갯물(갯모루,開野峴) : 개(漢江)모퉁이에 잇는 마을이므로 갯모루 또는 갯물이라 하고, 벌판에 낮은 고개가 졌으므로
                        한자명으로 개야현(開野峴)이라 한다.
  복지말 : 1957년에 이석겸(李錫謙), 김재홍(金在弘) 두 사람이 월남피난민을 위하여 새로 농장을 만들고 복을 받는
                        마을이란 뜻으로 복지말(福地村)이라 했다.
 여뭇골 : 성종(成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정성근(鄭誠謹)이 부모 묘소 밑에다 여막을 짓고 6년을 시묘(侍墓)하다가
                        성종이 돌아가매 또 3년상을 입었던 곳이므로 여뭇골(여막곡;廬幕谷) 이라 하는데 변하여 우목골 또는
                        우묵골이라고도 한다.
  점말(店村) : 도자기를 만드는 店이 있었는데 백제시대에 궁궐에서 쓰일 그릇을 구위내던 곳으로 옛부터
                         광주분원(廣州分院)과 함께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하였다. 1925년 을축년(乙丑年) 홍수 때에는 옹기를
                         굽던 이 일대의 200여채가 모두 물속에 잠겼던 일도 있었다 한다.
  참앞(站前) : 광나루에 잇는 뱃참인 하진참(下津站)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참앞이라 한다.
  토막나루 : 참(站) 앞에서 구리시 토막리(土幕里)로 건너가는 나루로 나무토막으로 배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암사동에는 많은 역사유적들이 남아 있다.

  암사동 동명의 유래가 되는 암사(岩寺) 즉 바위절터가 암사동 산 23번지에 남아 있다. 이곳에 신라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九岩寺)라고 하였으며 하진참(下津站) 동쪽 바위에 있었으므로 일병 바위절(岩寺)이라 하였다. 구암사에 출입자가 많았으나 신라와 백제의 전재 때 가옥과 절이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암사3동의 한강상류 접안지점에 자리잡고 있던 구암서원(龜岩書院)은 조선 숙종(肅宗) 8년(1667)에 건립되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신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거의 비슷한 시대 인물인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 조선 성종(成宗)때 인물인 정성근(鄭誠謹), 인조(仁祖) 때의 수몽(守夢) 정엽(鄭曄), 동시대의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그리고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을 배향하고 숙종(肅宗) 23년 (1697)에 현판을 사액 받았다. 그러나 근 200년간 지속되어 온 이 서원은 대원군이 집권함에 따라 고종(高宗) 8년 (1871)에 전국의 650여개에 달했던 서원을 47개로 줄이면서 나머지 서원을 정리할 때 철폐되었다.

  암사동 115번지 이래에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가 있다.

  이는 현재의 워커힐로부터 한강을 건너 마주 보이는 강변 사질퇴적지(砂質堆積地)에 위치하고 있다. 평상시는 강변으로부터 약 700∼800m떨어져 있는 이곳은 강변에 평행되게 동서방향으로 좁고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강쪽과 그 반대편으로는 완경사로 되어 있다. 암사동유적은 바로 이 대지와 그 양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일대의 토질은 고운 사질토로 되어 있다. 한반도의 중심부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 그 유역은 남북의 완충지대로서의 그 지리적 조건, 풍부한 수원, 기름진 땅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조건에 들어맞는 곳이었기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이 유적은 1925년 이른바 을축년(乙丑年) 홍수에 이곳의 한강변 모래 언덕지대가 심하게 패여져 나가면서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었고, 그로해서 이곳이야말로 한반도 중앙부에 있어서의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 문화를 꽃피운 대표적인 유적지임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일제때에 많은 토기편이 채집되었고 그후 1967년에는 대학연합발굴단, 1968년에는 서울대사범대 조사팀, 1971∼197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83년에는 서울대 암사동유적발굴단에 의한 대규모 조사로 수혈주거지군(竪穴住居址群)과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고, 많은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암사동 유적지는 취락형태를 갖춘 주거지로서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곳으로서 1979년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시가 1983년 복원공사를 착공하였다.

 

천호동(千戶洞)

  천호동(千戶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원래 이 지역을 곡교리(曲橋里)라 하였는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옛날부터 이곳이 인가(人家) 수천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동명을 따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천호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천호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당말, 벽동말을 병합하여 마을앞에놓여 있던 굽은 다리(曲橋)의 이름을 따서 곡교리(曲橋里)라 하였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동명을 천호동(千戶洞)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호동은 원래 광나루(廣津)로 인해 형성되기 시작한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 광나루는 신라시대에는 북속(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를 행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양진(楊津)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하사(下祀)로 제사를 받들었고, 이 때부터 광나루 즉 광진(廣津)이라 하였다. 광진은 육로로는 서울에서 광주로 통하며, 뱃길로는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東萊)로,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향하는 요충의 도선장(渡船場)이었다.

  광나루수영장은 한강이 오염되기 이전에는 서울 근교의 유일한 수영장으로 유명했으나 한강변 모래 채취와 강물의 오염으로 이제는 수영장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1983년 서울시에서 한강종합개발사업을 위해 광나루수영장을 폐쇄조치하였다.

  천호동 지역에 원래 있던 자연부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곡교리(曲橋里) : 마을 앞에 굽은 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굽은 다리 또는 한자명으로 곡교(曲橋)라 하며, 또 여러 마을
                     중에 한가운데 있으므로 가운뎃말이라 하기도 한다.
  당말 : 마을 뒤에 신당이 있으므로 당말 또는 한자명으로 당촌(堂村)이라 한다.
  벽동말(碧桐村) : 벽오동나무가 있으므로 벽동말 또는 한자명으로 벽동촌(碧桐村)이라 한다.

 

성내동(城內洞)

  성내동(城內洞) 동명의 유래는 풍납리토성(風納里土城) 안쪽에 마을이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써 「성안말」「안말」또는 성내리(城內里) 등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성내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성내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 벌말을 병합하여 성내리(城內里)라 한 것이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성내동(城內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내동은 조선시대 때 성안말, 안말, 벌말, 곰말 등 자연부락이 합쳐져 성내동이 되었다.

  「벌말」은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골말」은 벌말 동쪽 골짜기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분토골」은 갈붙처럼 흰 흙이 많이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밖에 고개 또는 들판 이름을 들어보면 벌말 서쪽에 있는 산마루에 붉은 흙이 많다 하여 「붉은더기」라 불렀으며, 또 안말에서 둔촌으로 가는 고개를 「성피나리」라 불렀다. 벌말 서쪽에 있는 벌은 「애겟벌」이라 불렀고 그 남쪽에 있는 들을 「오동봇들」이라 하였으며 벌말 북족에 있는 산에 왁새가 많이 있다하여 「왁새마루턱」이라 불렀고 벌말 남쪽에 쪽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하여 「쪽다리」라 불렀다. 또 벌말 남쪽에 있는 들에 넓은 늪이 있다하여 「늘근너미」라 불렀다.

 

길동(吉洞)

  길동(吉洞) 동명의 유래는 마을로부터 강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吉한 곳이라 하여 길동(吉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길동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 하여 붙은 「기리울」이라는 마을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길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길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구천면(九川面) 기리울이었던 길동은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아랫말, 골말, 방아다리를 합하여 길리(吉里)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길동(吉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길동은 옛날에는 아랫마을, 웃마을, 골마을 등 몇집씩 흩어져 사는 빈촌마을이었다. 지금도 토착주민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길동의 옛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지명들이 불리어져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건너말 : 응달말 건너쪽에 있는 마을
  골말 : 마을이 산골짜기에 있음
  기리울(吉里) : 길동을 지칭. 길동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하여 붙은 이름
  길리교(吉里橋) : 길리 앞에 있는 다리
  방아다리 : 지형이 방아다리와 같은 곳에 놓인 다리
  아랫말 : 골말 아래쪽에 있는 마을
  응달말 : 응달쪽에 있는 마을
 

 

둔촌동(遁村洞)

  둔촌동(遁村洞)이라는 동명이 생긴 유래는 이곳에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은사(隱士)인 이집(李集)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 속해있다가 1895년 태종(太宗)때에 제정되었던 8도제(道制)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府)337군(郡)으로 개편될 때는 한성부 11군중 광주군에 속하였다.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道) 339군(郡)으로 개정하고 5등(等)으로 구분하였는데, 둔촌동은 경기도 38군중 1등에 해당되는 광주부(廣州府)에 소속되었다. 1906년 광주부는 광주군(廣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때 둔촌동은 광주군의 구천면(龜川面)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지역에 있던 약수터, 굴바위, 안둔굴, 밖둔굴등 자역부락을 합하여 둔촌리(遁村里)라 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 둔촌동(遁村洞)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둔촌동은 옛날에는 천호동과 성남시를 잇는 구도(舊道)에 면한 한촌(寒村)에 불과한 농촌마을이어서 유적지나 전설 및 설화는 남아있지 않으나, 고려말의 지조 높은 은사 이집(李集)이 이곳에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어 동명도 그의 호를 따랐고 그와 관련된 옛 지명들이 아직 남아있다.

  굴바위 : 둔촌동 뒤 일자산(一字山) 서남쪽에 있는 굴로 된 바위, 둔촌 이집이 신돈(辛旽)의 박해를 피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 한다.
  둔굴(遁窟) : 둔촌동 뒤에 있는 바위로 된 굴. 이집이 이곳에 은거하며 호를 둔촌이라 하였으므로 둔굴이라 한다.
  삿갓바위 : 굴바위 위에 있는 바위. 모양이 삿갓과 같다.
  원숫굴(절굴, 온숫굴) : 일자산 밑에있는 골짜기. 옛날에 절이 있었으므로 절굴이라 하고 절 앞에 더운 우물이 있으므로
                  온숫굴(溫水窟)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원숫굴이 되었다 한다.
  응봉(매봉,鷹峰) : 일자산에 있는 봉우리

  둔촌동은 이집과 관련된 것 외에는 유적지나 전설 및 설화, 역사적 인물이 없는 곳이나 여기 약수터가 한군데 있어 유명하였었다. 둔촌약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 약수터는 천호동로터리에서 겨여동으로 꺾여 들어가는 한길을 따라 걸어서 5분쯤 걸리는 곳의 왼편에 있다. 둔촌약수는 물맛이 맵고 싸하므로 후추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초천(椒泉)이라 하며 또 찬우물 한자명으로 냉정(冷井)이라 하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맛이 사하고 톡쏘는 바람에 못 마실 물로 여겼던 이 물이 위장병, 심장병, 피부병 그리고 신경통 따위에 두루 좋다는 천연탄산수임을 알게 된 때는 1938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약수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북일면(北一面) 초청리(椒井里)의 약수에 견주면 그 맛과 질이 좀 약할지는 모르나 서울에서는 유일한 탄산수였다. 최근에는 인근에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수량이 줄어들고 수질도 크게 변하여 약수터는 폐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