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麻浦區)
공덕동(孔德洞)
구수동(舊水洞)
노고산동(老姑山洞)
당인동(唐人洞)
대흥동(大興洞)
도화동(桃花洞)
동교동(東橋洞)
마포동(麻浦洞)
망원동(望遠洞)
상수동(上水洞)
상암동(上岩洞)
서교동(西橋洞)
성산동(城山洞)
신공덕동(新孔德洞)
신수동(新水洞)>
신정동(新井洞)
아현동(阿峴洞)
연남동(延南洞)
염리동(鹽里洞)
용강동(龍江洞)
중동(中洞)
창전동(倉前洞)
토정동(土亭洞)
하중동(賀中洞)
합정동(合井洞)
현석동(玄石洞)
「孔德」이라는 동리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실지는 한자의 「공덕」의 의미보다는 우리말의 「큰더기」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가고 보여진다. 즉 우리말로 좀 높은 구원(丘原)지대를 「더기」또는「덕」「언덕」으로 호칭하는데 공덕리 일대는 대개 만리현(萬里峴), 아현(阿峴), 대현(大峴)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 내려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옛날에 우리말로「큰더기」,「큰덕이」, 「큰덕」으로 전칭(轉稱)되던 것이, 당시 음이 비슷한 한자의 「공덕(孔德)」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아닌가고 보여진다. |
구수동은 신수동과 함계 한성부에 속하게 된 것이 효종(孝宗) 9년(1658)에서 현종(顯宗) 9년(1668)사이의 10년간에 이루어졌다고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에 추측하고 있는 만큼 그 전에는 성저(城底) 10리내로 되어 있었다. |
영조(英祖) 27년(1751) 9월에 한성부 주민들을 유사시에 도성 수호에 출동케하는 절차를 마련한「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노고산동의 명칭은 보이지 않으나, 아현계(阿峴契)만 나타난다. |
유래 : ① 당인동 동명은 ‘댕말’에서 유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현재 당인리발전소가 있는 일대에 明나라 李如松의 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된다. 중국의 대표적인 나라를 흔히 唐나라라 하고 중국인을 당나라 사람이라 부르는 데서 당인동이라 부르게 됨. |
이동은 인접한 용강동(龍江洞)과 함께 독구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독막 또는 독마을(甕里)로 불리워지던 지방이었다. 종전의 서강방(西江坊) 옹리계(甕里契)에 속하던 이 부근 마을이 일제시대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에 들어가게 되면서 옹막(甕幕), 옹리(甕里)의 지명이 음의 변전과 우리말의 의미를 모르는 일본인들의 조작에 의하여 옹리상계(甕里上契) 관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동막상리(東幕上里 ; 현재 용강동),
옹리하계(甕里下契) 관내를 중심으로 한 마을은 동막하리로 변칭되었다. |
유래 : 이곳에 복숭아나무가 많고 봄철이 되면 복사꽃이 피어 경치가 좋으므로 '복사골'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 |
유래 : 細橋 즉 ‘잔다리’가 있던 데서 동명이 유래. 잔다리의 동쪽의 윗쪽 마을이었으므로 ‘윗잔다리’ 또는 東細橋里로 불림. |
유래 : 우리말 ‘삼개’로 불리어지는 포구 이름을 한자로 ‘麻浦’라 한 데서 유래. |
망원동의 동명은 한강변의 명소 망원정(望遠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처음 한성 오부(五部)중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에
속하였는데 고종(高宗)조 초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보면 망원정 1,2,3계(契)가 나오는 것으로써 그 지역도 퍽 넓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지역명칭도 정자 이름 그대로 망원정(望遠亭) 또는 망원정동(望遠亭洞)으로 부르던 것이 후에
와서 "정(亭)"字가 생략되어 망원동으로 호칭된 것으로 보여진다. |
상수동(上水洞)은 성종(成宗)때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나타나지 않고, 영조(英祖)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상수동의 옛날 동명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2 부방조(部坊條)를 보면 훈국(訓局) 후영(後營) 소속의 동계(洞契)로 북부(北部) 성외(城外)의
수암리계(水岩里契), 수생리계(水生里契)가 보이고 육전조례(六典條例) 중에는 북부(北部) 연희방(延禧坊)에 수색리계(水色里契), 학암리계(鶴岩里契)가 보이며, 갑오개혁 당시 문서에는 북서(北署) 연희방 구역중 상리계(上里契)의 수상리(水上里), 음월리계(陰月里契)의 휴암(休岩) 등 동계명이 보이는데 이러한 지역은 대개 지금의 상암동 및 수색동의 일부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써 오늘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休岩)에서 그 명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
유래 : 細橋, 즉 ‘잔다리’가 있던 데서 동명이 유래. 細轉洞의 서쪽 마을이 되며, 지형이 낮은 곳에 있으므로 ‘아랫잔다리’, ‘잔다리 아랫마을’, ‘西細橋里’로 불림. |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개혁 당시의 동리(洞里) 관계를 보면 북서(北署) 연희방(延禧坊)(城外)에 성산리계(城山里契)가
있고 그 소속으로 중동(中洞), 야지동(野芝洞), 후동(後洞), 무이동(武夷洞), 야동(冶洞) 등의 동명이 보인다. 성산(城山)이라는 명칭은 대개 부근에 산이 성(城) 같이 둘려 있으므로 우리말로 「성메」,「성미」로 부르던 것이 한자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전에는 이 성산 일대의 마을들이 인근의 가좌동(加佐洞), 증산리(甑山里), 신사동(新寺洞) 등 여러 동계와 함께 훈국(訓局) 후영(後營) 소속으로 도성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
유래 : 孔德里에서 비롯됨. 동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말 ‘큰더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옛날 우리말로 좀 높은 丘原地帶를 ‘더기’·‘덕’·‘언덕’으로 부르는데, 공덕동 일대는 만리현·아현·대현 등 고개마루에서 서남쪽으로 펼쳐진 언덕진 지대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큰더기’, ‘큰덕이’, ‘큰덕’으로 轉稱되던 것이 음이 비슷한 한자의 ‘孔德’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임).
1751 : 西部 龍山坊(城外) 新倉契?孔德里契 |
신수동이 한성부에 처음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英祖) 27년에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 라고 나타났으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기록하였다. |
유래 : 이 곳에 새 우물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 |
유래 : ‘애고개’, ‘애우개’, ‘아이고개’라는 고개 이름에서 유래. 이 고개는 마을 남쪽에 萬里峴과 서북쪽의 大峴이라는 두 개의 큰 고개 중간에 있었는데, 고개가 작기 때문에 애고개, 즉 ‘兒峴’으로 부르던 것이 ‘兒’가 ‘阿’로 변하여 ‘阿峴’이 되었다고 함. |
연남동은 197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개정에 따라 새로 생긴 동이다. 당시 서대문구내 연희동(延禧洞)의 일부를 떼어 마포구에
붙이면서 따로이 동명을 연남으로 하게 된 것이다. |
염리동은 조선시대 한양 천도 후
1396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部) 52방(坊)으로 정했을 때에는 한성부에 속하지
않았다. 영조(英祖) 27년에 반포된 수성책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보면 서부(西部)에 신화방(神化坊)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이
신설되어 9個坊이 되었다. 염리동이 속한 용산방이 어느 때에 한성부에 편입되었는가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를 참고하면 효종(孝宗) 9년(1658)에서
현종(顯宗) 9년(1668)까지 약 10년간 어느 해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용강」의 동명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의 면명(面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동중에 지형이 용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용의 머리'로 불리어지던 곳이 있고, 그 '용의 머리'로
불리어지던 곳이 있는 이곳 마을이 앞으로 큰 강에 임하여 있는 위치관계로 「용강」의
동명을 이루는 데에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
중동은 본디 여러 마을 중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뎃마을」또는 「간뎃말」로 부르던 우리말의 마을 이름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
창전동은 서강방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처음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창전리계(倉前里契)로 기록되고 있다. |
헌종(憲宗)朝의 저술(著述)인 「경조부지(京兆府誌)」,고종(高宗)朝의「육전조례(六典條例)」등
옛날 문헌에도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의 토정리계(土亭里契)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은 옛날부터 「토정마을」즉 토정동, 토정리 등으로 부르고 기사(記寫)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 2에 의하면 토정리계는 공덕리계(孔德里契)와
함께 수도 서울의 방위를 맡은 각 군영(軍營)중 훈국(訓局) 좌영(左營)에 속하기도 하였다. |
유래 : 물가 마을 중 윗마을을 上水里라 하고 아랫마을을 下水里라 한 것처럼, 물가 마을 아래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下中里라 부르다가 갑오개혁 때 賀中里로 함. |
유래 : 옛날 이 마을에 ‘조개우물’로 불리어지는 우물이 있어서 ‘蛤井洞’이라 하였는데, 뒤에 ‘蛤’이 ‘合’으로 轉寫되어 合井洞이 되었다 함. |
현석동의 명칭이 조선시대 한성부에
나타나게 된 것은 「수선전도」에 현석리(玄石里)라고 기록되어 있던 것과 영조(英祖)때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서부(西部) 서강방(西江坊)(城外)
흑석리계(黑石里契)로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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